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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

기사승인 2024.05.07  03: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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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생명의 치유자’ 5(마가복음 5:28-29)

▲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여인의 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사회적 낙인이 되었다. ⓒGetty Images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주일예배에 참여하신 한성교회 모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크신 은혜와 평화를 가득 내려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 생명의 치유자’라는 주제로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다섯 번째 시간으로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앙고백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였습니다. 그분은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손을 뻗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내겐 희망이 있다. 예수님이 보이신 생명의 힘, 그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그 생명의 힘이 영원히 나를 향해 있다고 굳게 믿는 한 나는 진정으로 산 사람이요, 존귀한 사람이다.’ 이 마음속 고백이 바로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혈루증 앓는 여인이 했던 고백입니다. 그녀의 마음속 말을 다시 들어 보십시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향한 간절함, 그분에 대한 깊은 신뢰, 꺾이지 않은 마지막 희망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요? 왜 하필 ‘옷에만 손을 대어도’라 생각했을까요? 본문 5장 25, 26절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녀는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왔습니다. 그간 많은 의사를 찾아 다니며 도움을 청했지만 도리어 괴로움만 겪었습니다. 제 가진 것을 다 허비하면서까지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보려 몸부림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만 더 깊어졌습니다. 여기에서 혈루증은 만성적이고 불규칙적인 자궁 출혈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루증 때문에 이 여인이 겪었을 고통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터입니다. 육체적 고통은 물론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인습과 편견으로 보아 그보다 더 한 고통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하혈을 부정한 것으로 분류하는 율법을 오용했지 않습니까? 이 여인은 더러운 사람 취급당하며 사회로부터 소외되었을 게 분명합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이보다 더 한 고통이 뒤따랐을 터입니다. 자신 있게 마음껏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세월이 지속되었습니다. 얼마나 큰 자괴감이 들었을까요?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요? 이것은 결국 내가 나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곧 수치심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예수님 뒤에서 이 여인이 취했던 행동을 보십시오. 누가 들을까 싶어, 누가 볼까 싶어,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그저 속으로만 생각할 뿐입니다. 나 때문에 그분이 부정해질까 싶어, ‘어디다 손을 대냐’ 주위 사람들 비난할까 싶어, 그분의 몸에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합니다. 그저 조용히 그분의 옷을 살짝 터치할 뿐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의 힘이었습니다. 그간 이 여인은 지독한 고통을 이겨내려고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홀로 고군분투했습니다. 이곳 저곳 용하다는 사람, 안 찾아간 곳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으로부터 건져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치유를 바라고 찾아간 사람들은 저마다 제 잇속만 챙길 뿐 치유에는 무심했고 무능했습니다. 살려고 애쓰는 데 멈추지 않는 하혈처럼 생명의 기운만 자꾸 소진됐습니다. 여인에게 유대 사회는, 더 나아가 이 세상은 생명의 힘을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생명의 힘을 빼앗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녀에게 들려온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말 그대로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 무엇으로도 소진될 수 없고,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분이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 있으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란 믿음의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땀 흘려 수고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땀과 수고가 우리에게 생명을 더해 줍니까? 아니면 그저 우리 생명의 힘을 소진시킬 뿐입니까? 과연 이 세상에 훼손될 수 없는, 훼손되지 않는 생명의 힘이 있습니까? 이 세상 어디에 그 생명의 힘이 있습니까? 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의 수고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에 있는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의 몸부림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까이함에 있는 것 아닙니까? 혈루증 앓는 여인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확신했기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5장 29절을 보십시오. 혈루 근원이 곧 말랐습니다. 병이 나은 것입니다.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 그녀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녀의 몸이 이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체 다 헤아리지 못한 순간에 이미 예수님의 생명의 힘이 그녀를 사로잡았고 그녀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아직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은혜가, 아직 온전히 해명되지 못한 삶의 신비가 이미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다시 힘을 내고 있습니다. 이 은혜와 신비 앞에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믿음입니다.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언제나 예수님 함께 계신다는 믿음, 그 예수님이 내 영원한 생명의 힘이라는 믿음이 우리로 그 헤아리지 못한 은혜와 신비를 맛보게 합니다.

본문 5장 30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아시고 무리들을 향해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너희에게는 이 여인이 품은 믿음이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의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31절에 의하면, 주변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서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다 예수님 옷깃에 사람 손이 닿은 것 뿐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절하고 확신있는 믿음으로 당신 옷에 손을 대신 여인을 정확하게 찾아 주목하십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지만, 그 속에 나는 그저 익명의 한 사람일 뿐이지만, 우리에게 예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정확하게 찾아 주목하십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주목하여 보실 때 여인은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신비로 자기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 그저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장 34절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인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육체적 질병보다 더 한 고통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을 터입니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던 그녀에게, 내가 나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던 그녀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딸아, 너는 내 딸이다. 네가 내 딸인 것이 나는 기쁘고 행복하다. 너도 나를 신뢰하며, 나를 네 영원하고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으니 이제 그 무엇도 네 생명의 힘을 빼앗을 수 없다. 딸아 평안해라. 너 자신으로 마음껏 살아라. 너는 이제 병으로부터 자유롭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이제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당당히 제 인생을 살아갈 터입니다. 이 여인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생명의 힘이 오늘 우리에게도 미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무지와 불신앙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 생명의 힘이 가로막힌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볼 두 번째 여인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열두 해를 고통받고 있던 그때를 같이하여 한 소녀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었습니다. 그런데 열두 살을 맞은 이 딸이 어느날 죽게 되었습니다. 죽을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열두 살이 되었으니 그 소녀가 이제 ‘나는 누구인가’를 물으면서 자아정체성을 형성할 시기를 맞이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문제는 자아정체성을 형성할 때가 된 그 소녀를 둘러싼 환경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회당장입니다. 회당장은 유대 사회의 지도층 인사입니다. 그는 유대 사회를 지탱하는 율법의 수호자입니다. 그는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 유대 사회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한 소녀가 자랐습니다. 이제 열두 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녀가 과연 자신이 여성임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은 온전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을까요? 내가 곧 나라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살아 있어도 정말 산 것일까요? 죽을 지경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이렇게 보면, 혈루증 앓던 여인의 고통과 죽을 지경에 이른 이 소녀의 고통은 서로 맞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회당장이 자기 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 딸을 사랑했기에 딸이 죽을 지경에 이르자, 유대 사회의 지도급 인사였던 그가 체면 따지지 않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간청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무능 인정하고 자존심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 간청한다는 것 자체가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됩니다. 다만 이제까지의 그 사랑의 방식이 문제였을 뿐입니다. 회당장은 자기 딸이 그저 유대 사회의 율법 체계에 온전히 순응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겠지요. 그저 유대인들이 인정할만한 명예로운 남자의 한 아내로 조신하게 살길 바랐겠지요. 그래서 자기 딸이 자라면서 품게 된 갖가지 의문, 여성으로 살면서 느끼는 혼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열등감 등에 대해서는 무심했을 터입니다.

회당장은 딸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내 방식대로는 딸을 온전히 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품었던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간청한 내용을 보십시오. 5장 23절입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용한 의사들처럼 직접 와서 내 딸의 병도 꼼꼼히 살피고 그에 딱맞는 능력으로 반드시 고쳐 달라’는 요구입니다. 치유 방식을 자기가 정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보인 믿음과 상반됩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였지 치유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회당장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신뢰가 아니라 치유책이었습니다.

우리 때로 이렇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도와주신다면, 이 방식대로 일이 개선되어야 하고 이 방식대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해.’ 만약 이런 생각이 고착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방책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도움을 알아차리지도, 인정하지도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다 내어맡기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회당장의 믿음은 불완전하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당장의 간청대로 그의 딸이 머문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 와중에 혈루증 앓던 여인을 만나 그녀를 치유하셨습니다. 그 순간 죽을 지경에 처했던 회당장의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딸 주변을 지키던 사람들이 급하게 회당장에게 찾아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 귀찮게 할 필요가 없다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의 죽음을 알리는 그들과는 상황 인식을 달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5장 36절에서 회당장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딸 안 죽었다. 진짜 문제는 네가 나에게서 그저 네 딸의 치유책만을 찾는다는 데 있다. 내가 곧 생명의 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너 자신을 다 내어맡길 생각 같은 건 아예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네 딸의 존재와 삶을 다 내게 맡길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저 딸만 낳으면 그냥 예전처럼 회당장으로, 율법의 수호자로 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저 딸이 낳으면 그냥 예전처럼 내 방식대로 키울 생각을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 왜곡된 율법 체계로부터 나에게로 온전히 돌아설 생각을 못하느냐, 왜 네 딸을 율법이 묶인 유대 사회로부터 나에게로 온전히 이끌 생각을 못하느냐’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믿음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의 딸이 나아도 여전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장이 혈루증 앓던 여인이 품었던 믿음을 보인다면, 딸의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이 죽은 줄로 알고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5장 39절에서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신앙을 보인 그들을 내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 틈에서 삶의 희망을 잃어 버린 소녀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이라 외치셨습니다. 곧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모두가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내 딸이어서 기쁘다.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 네게 있다.’ 이런 의미입니다.

소녀는 예수님의 말씀에 일어나 걸었습니다. 회당장의 불완전한 사랑 속에서 잠들어 있던 소녀가 예수님의 생명의 힘으로 깨어났고 자기 자신으로 당당히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무엇으로도 훼손될 수 없는 생명의 힘이 우리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곳 가까이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때로 우리가 손 내밀 힘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분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도 혈루증 앓던 여인처럼 그분을 우리의 영원한, 유일한 희망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앞에 온전히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온전히 살고, 진정으로 삽니다.

김현주 목사(한성교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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