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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반란, 출애굽

기사승인 2024.03.23  04: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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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산 나의 강이여 3

ⓒ이해학 대표 제공

우리 어머니는 1916년생 병진년 용띠이시다. 2022년 7월 8일 돌아가셨는데 한국 나이로 107세였다. 서른 여섯에 과부가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쯤 되어서이다. 작은 아버지 한 분이 나를 불러 침통한 이야기를 하였다. “너도 이제 자기 이름을 쓸 수 있으니 그만하면 됐다.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을 살아라. 그러면 일 년에 쌀 한 가마니는 받을 것이다. 그러면 네 엄마를 봉양할 수 있다. 그래야 네 엄마가 다른 데 시집 가지 않고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다. 만일 시집가버리면 너는 고아가 되는 거야” 하며 내 의견을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다면 학교를 그만두고 머슴살이를 해야겠지요.” 하였다. 이 말을 뒤늦게 들으신 어머니는 갑자기 괴성을 지르시며 무슨 소리냐고 하신다. “이 애 아빠가 해학이는 대학까지 보낼 거라고 몇 번이나 장담했는데 학교를 그만두다니 절대 안 될 말이죠. 내가 벌어서라도 이 아이 대학을 책임지겠소” 우시면서 펄펄 뛰셨다. 나는 어머니가 크게 화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는 며칠 뒤 가출을 하시고 얼마 뒤에 돌아오셨는데 남원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마당에 사람들이 서 있고 방안에도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들어가 보니 할머니가 아랫목 가운데 앉으시고 작은 아버지 두 분이 양쪽에 자리 잡았다. 어머니는 소복을 입으시고 건너편에 섬처럼 떨어져 꿇어앉아 있었다. 나는 울상이 된 채로 방구석에 앉았다.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머니를 잡도리하였다. 한참 어머니가 교회 다닌 과정을 물으셨다. 어머니는 남원에 가서 젊은 여자가 장사를 하면서 아무데서나 잠을 잘 수 없어서 혼자 사는 ‘차금니’라는 할머니 집에서 더붓 잠을 잤다는 것과 그 어른이 어머니에게 교회를 같이 가자고 하는데 안 갈 수 없어서 말 대접으로 한 번 가준 것이 다니게 되어버렸노라고 설명을 하였다. 할머니는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앞에 있는 질그릇 화로에 담배대를 몇 번 두들기시고는 선고를 하시었다.

“니는 지아비 빈소를 보살피지 않고 1년 탈상을 치르기도 전에 집 나갔제. 돈 벌어서 아들을 가르친다고 혔지만 시방은 예수 귀신꺼정 들려 밤낮도 모르고 발광을 허니 우리가 챙피혀서 못 살 것다. 동네 사람들이 동네 망한다고 i아내라고 야단이야! 그냥 쫓아내도 되는 디 내가 시에미로 한 번 기회를 줄 텅 께 솔직히 말 혀라. 함께 살고 싶으면 예순가 뭣인가를 버리고, 정 예수를 믿고 싶으면 아예 들어오지 말고 집에서 나가거라. 알 것 제.”

방안과 마당이 할머니의 서릿발에 얼어붙었다. 작은 아버지는 기고만장하여 어머니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어머니가 빌고 용서를 받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하였다. 무거운 공기가 압축된 느낌을 모두가 받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어머니가 예수를 버리고 나와 함께 살아 주기를 바랬다.

ⓒ이해학 대표 제공

드디어 어머니가 서서히 고개를 들더니 조용하고 힘 있는 언어를 쏟아내신다.

“어머니 저는 우리집에서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도 믿겠습니다!”

할머니가 부들부들 떠시고 어깨가 축 처지셨다.

“저런 망할 년! 당장에 나가!” 발음이 안 되는 말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어머니 말에 분기탱천한 작은 아버지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화로를 어머니에게 던졌다. 순간 어머니가 벌떡 일어서며 “주여!”라고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의 서릿발 기운이 어머니의 당당한 기운과 침착함에 밀려 맥을 쓰지 못하였다. 작은 아버지가 성난 파도처럼 으르렁거리며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어머니는 바위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나는 “주여!”하며 일어서는 어머니 몸에서 광채를 보았다. 어머니 몸은 노란빛을 발하였고 얼굴은 천사처럼 눈부셨다.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믿는 신(神)이 이겼다. 나도 어머니의 신을 나의 신으로 삼겠다. 무지렁이처럼 짓밟히고 학대당하고 업신여김당하여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았던 어머니에게서 저런 용기가 나오다니! 나는 그날 비로소 키 140센치에 몸무게 40키로의 가냘픈 여인이 거인으로 닦아왔다. 그것이 나의 어머니이다.

생각할수록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상상 못 할 일이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 그 작은 체구로 물동이를 날랐다. 이를 불쌍히 여긴 할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물동이를 날라주었다고 일기장에 기록해 놓았다. 내가 본 어머니는 늘 부엌에서 상추에 된장을 싸먹었다. 그리고 일년 내 내 베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일기장에 보니 고모 둘과 시아제 둘을 결혼시키느라 너무도 힘들었단다. 소문이 좋아서 동내 결혼하는 처녀들 결혼준비를 밤잠 안 자고 다 해주었는데 아무도 사례를 안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엇보다 할머니의 원칙없는 잔소리와 학대를 그대로 받으면서도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은 어머니가 감히 반란을 일으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 반란은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자기운명을 자기가 선택하는 전환점을 넘은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종교가 하는 일이란 자기운명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이해학 대표 제공

이 사건은 어머니의 일생과 나의 운명을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우리 집의 중심이 바뀌었다. 단순하게 할머니 중심에서 어머니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우리의 관습이 된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있었다. 가문, 남성, 시어머니 등 온갖 허위의식의 탈이 벗겨지고 위계질서가 바뀌고 있었다. 제사를 지낸다거나 할머니 밥을 먼저 쌀밥으로 뜨는 일은 변하지 않았다. 허나 어머니가 남원으로 가면서 할머니 허락을 받느라고 실갱이 하는 일은 없어졌다. 어머니는 자유를 쟁취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무엇보다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였다.

이날 이후로 산에 가서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귀신이라고 수군대거나 i아내야 한다고 고자질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오히려 자기들이 불러오던 <유종아짐>이라는 호칭에 품격을 더해 예우를 갖추었다.

그 날부터 나는 어머니께 어떻게 해야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더니 주기도문을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나는 5리 거리의 학교를 오가며 주기도문을 수백 번씩 외웠다. 지금도 내가 주기도문으로 신앙의 첫걸음을 한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불교의 전통과 유교의 전통이 혼합되어 절에도 가고, 제사도 지내는 습관들을 정리해 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기독교인으로 모습을 갖추어 갔다.

돌이켜 보면 기독인이 되어서 유별나게 잘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늘 배우고 삶을 개선하는데 열중하였다. 그러나 화로를 던진 작은 아버님은 노름에 열중하여 아버지가 사놓은 20여 마지기 논밭과 집까지 다 팔아먹었다.

내가 참여한 모든 운동의 밑둥이 여기에 있다. 우리 친적들과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면 여기가 그 출발점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서 자기운명을 스스로 선택한 사건이기에 우리 가정의 출애굽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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