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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역사, 아버지의 비밀

기사승인 2024.02.29  0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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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산 나의 강이여 2

▲ 내가 태워버린 동네 당산나무 ⓒ이해학

나는 아버지를 몹시 싫어했다. 가까이 오시면 심장이 뛰고 닭살이 돋는 듯하였다. 그런데 41세를 살다 가신 아버지의 배나 더 산 지금 나에게 아버지는 산(山)이라고 고백한다. 아버지만큼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가며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산 사람도 드물다.

나는 다섯 살 정도부터 아버지의 학생이 되어 역사 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술기운이 얼큰하여 기분이 좋을 때면 어김없이 나를 불러서 무릎을 꿇게 하고 항상 하던 공부를 반복시켰다. 아버지의 역사는 전주 이씨 덕흥 대원군파의 역사였다.

우리 가문은 전주 이씨로 뼈대 있는 가문이다. 양반의 가문보다 더 지체 높은 왕족의 가문이다. 왕족의 가문이라는 사실을 늘 강조하셨다. 우리 시조는 신라 말기에 사공공(司空公) 벼슬을 역임하였고 전주가 본관인 이한(李翰)공 어른이시다. 이한공의 21대손이 조선을 세운 이성계 태조 대왕이시다. 태조 대왕이 나라를 세워서 우리는 그 덕으로 왕의 후손이 된 거다.

우리는 전주 이씨 중에서도 덕흥대원군의 후손이다. 덕흥대원군은 중종 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이다. 그리고 선조 대왕의 아버지시다. 처음에는 간단한 역사가 나이가 들면서 복잡해져 갔다. 누구는 몇 자녀를 두었고, 자녀들 이름이 무엇이고, 누구와 결혼하여 몇 자녀를 두고, 누구의 양자로 가서 나중에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끝도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잘 들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한 뒤, 대답하거나 암송을 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면 거친 수염으로 내 볼을 마구 비볐다. 나는 아버지의 따가운 수염도 싫었지만, 입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더 싫어해서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몸을 뒤로 젖히곤 하였다.

아버지는 마치 조상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아들을 낳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발이 저리고 아프고 지루해서 건성으로 대꾸하며 속으로 ‘나는 크면 절대 조상 이야기하려고 자식을 무릎 꿇려 놓는 일은 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였다.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뼈대 있는 가문 이야기는 몰락한 가문에 대한 아픔이고 다시 번듯하게 세워지길 원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이 다 모이는 당산나무 아래서 내게 질문을 하시고 내가 이한 공 시조로부터 43대 손이고 덕흥대원군 중시조로부터 14대손이라는 것을 대답하도록 유도하여 동네 어른들에게 똑똑하다는 말을 듣게 하였다. 좀 커서는 삼강오륜(三綱五倫) 같은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나는 뜻도 모르고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요,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고 앵무새 같이 외어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아버지의 의도는 충분히 보상받고 있었다. 나는 삽시간에 이웃 동네까지 천재 소년으로 소문이 난 것이다. 그렇지만 부끄럽게도 내가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는 ‘수’나 ‘우’는 한둘이고 ‘미’나 ‘양’으로 도배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별수 없이 아버님 도장을 몰래 찍어 학교에 제출하였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항렬만큼은 잘 기억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재’자 항렬이고 시조로부터 41대손이시고 덕흥대원군으로부터는 12대손이다. 아버지는 ‘용’자 항렬이고 시조로부터 42대손이고 덕흥대원군으로부터는 13대손이다. 나는 ‘해’자 항렬이고 시조로부터 43대손이고 덕흥대원군으로부터는 14대손이다. 그 다음에는 ‘주’자 ‘우’자 ‘기’자 항렬로 이어진다.

“지금 우리 마을에는 ‘우’자 항렬까지 있으니 너는 그 아이들에게 할아버지뻘이다. 어른은 예의를 잃지 않아야 하고, 너보다 나이가 많은 항렬이 낮은 어른들에 대해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아버지의 교훈은 중요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우’자까지 있어서 또래 아이들이 나를 ‘아재’라고 많이 불렀다.

한번은 내가 아랫도리를 입지도 않고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새로 시집온 새댁이 “하나씨 꼬추를 내놓고 다니믄 챙피 안하요” 해서 창피한 것을 알고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바지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써서 바지를 입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싸움이 붙으면 ‘아재’도 소용이 없고 힘센 놈이 이겼다. 누구보다 바로 윗집 우팔이는 빠꿈사리(소꼽놀이) 친구다. 우리는 잘 놀다가도 툭하면 싸웠는데, 억지를 부리는 우팔이를 한 대 때리면 그는 울며 집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똑같은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의 형 우칠이나 우오가 나와서 잘잘못을 물어보지도 않고 나를 사정없이 패고 들어가 버린다. 어느 때는 우팔이 누나인 옥례 누나까지 구정물을 퍼붓고 들어가는데 내가 울고 들어가면 우리 식구들은 사정도 안 물어보고 왜 싸웠냐고 야단을 쳐서 잘 울지도 못하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다수의 횡포에 시달리며 억울함을 속으로 다스리느라 애를 썼다.

항렬 이야기 다음으로 아버지는 화탄(花灘)으로 이사 온 조상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화탄 윗마을은 전주 이씨의 씨족 마을로 전주 최씨 한 세대를 제하고는 마을 구성원 전부가 이씨였다. 그러므로 시제. 관혼상제의 일들을 함께 상부상조하였고 마을의 일들을 항렬이 높은 연장자들이 이끌어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나는 어렸을 때는 왕족이라는 자부심을 조금이나마 가졌는데 나이가 들면서부터 왕족 족보를 하나 구해서 양반행세를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하였다. 왕족이면 아무리 가난하여도 부자일 텐데 마을에 기와집 한 채 없고 고즈넉한 도자기나 고서적 하나도 없는 양반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 점의 의혹도 없이 덕흥대원군파 족보를 내 머리 속에 쑤셔 넣어주려고 하였다.

▲ 화탄마을 마을회관 표지판 ⓒ이해학

후에 자료를 확인해 보니 조선 중종 임금의 일곱 번째 아들 덕흥대원군의 4대손인 승한공이 병자호란 때 순창 덕진방 옥정리에 거주하였고 나중에 화탄으로 이주하였다. 재현공은 덕흥대원군의 12대 손으로 나의 할아버지와 같은 항렬이시다. 그 어른이 우리 화탄 쪽 강변에 소나무와 꽃나무를 심어 가꾸셨다. 이때부터 마을을 화탄(花灘)으로 불렀다. ‘은어가 올라오는 계절에 꽃잎이 떨어져 흘러가는 꽃여울’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재’자 항렬 바로 뒤의 ‘용’자 항렬로 덕흥대원군 13대 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홍진 세상에서 왕족이라는 것이 아버지 자존심이었고 뱃심이었다.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가장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창빈 안 씨의 능이 있는 동작동, 덕흥대원군의 위패를 모시는 도정궁 그리고 남양주에 있는 덕흥대원군의 덕릉이었다. 아버지는 이 장소들을 통해서 덕흥대원군과 피가 통하며 왕족으로서의 정통성이 확인된다고 믿었다.

나를 왕족으로 확인시켜준 사건이 터졌다. 우리 마을 꼭대기 집에 사는 사람이고, 객지에 나가 큰 장사를 해서 부자인 이주가 죽어서 마을로 돌아왔다. 시신을 실은 차가 물가에까지 왔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나가서 동네에 못 들어오게 막았다. 그 아들이 빌고 사정하여 밤중에야 고인 시신이 마을로 들어왔다. 그는 덕흥대원군 문중 땅을 판 큰돈을 혼자 다 써버린 것이다.

작은 아버님이 술만 드시면 문중 땅 팔아 나누어 먹은 사람들 이름을 외치며 한풀이를 하셨다. 불의에 대한 분노인지, 주동 인물 속에 못 들어간 한풀이인지 몰라도 우리 집안은 동네에서 못 배우고 가난한 소외 분위기가 압축되어 있었다. 그 뒤 고등학교 방학 때 선용 작은아버님이 나를 동작동 국립묘지에 기어이 데리고 가서 높은 곳에 올라 “해학아 잘 들어라, 이 넓은 땅이 덕흥대원군 문중 땅인데 몇 놈이 몰래 먹어부렀어야.” 마치 복수를 명하는 뉘앙스로 푸념을 토하셨다.

내가 아버지를 가장 멋있게 본 것은 만가(挽歌) 선창이다. 동네 상여가 나갈 때마다 상여 맨 앞에서 핑경을 흔들며 만가를 선창하여 마을을 주도하는 어른으로 두각을 나타내셨다. 그럴 때면 나는 어깨가 으쓱하였다. 아버지는 이야기꾼이셨다. 우팔이네 사랑채에는 동네 남정네들이 겨우내 모여 가마니나 덕석을 짜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나는 가끔 방문 앞에 가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곤 하였다. 아버지는 항상 이야기를 주도하셨다.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목포 해남 남도 섬의 특색있는 풍물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남도의 먹을거리와 주막집 술의 특색 이야기와 때로는 술집 여자들 이야기까지 들으며 내 얼굴이 붉어졌다.

한참 뒤에 깨달은 것이지만 아버지의 위대함은 가계 부흥이었다. 빚에 찌든 가계를 살리기 위해서 농한기에 시골을 뛰어나가 박물장사를 하여 빚을 다 갚고도 논밭을 20여 마지기 산 성공인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추측인데 나보다 8살 많은 누이가 있었는데 내가 다섯 살 무렵 홍역으로 죽었다. 그 당시는 여자아이를 낳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아들을 못 낳는다고 할머니 성화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아버지 봇짐을 지고 따라나섰다. 간데 마다 아버지의 넉살 친근감과 조그만 인형 같은 색시 칭찬이 자자했단다. 오랜만에 할머니의 성화로부를 벗어나 해방이 된 부부는 남도 해변 주막을 돌며 사랑을 나누고 그 덕에 내가 태어났다고 나는 상상해본다.

▲ 어릴때 동생과 놀았던 우리밭에 있던 소나무 지금은 카누경기장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이해학

내가 태어나서도 아버지는 장사를 나가셨고 돌아오실 때 일본 사탕을 사 오셨다. 그 묘한 맛도 잊을 수 없지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어른들이 내게 사탕을 하나 주면 받고, 하나 더 주면 먼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받기를 반복하여 어른들을 즐겁게 하였다. 이렇게 욕심이 없어서 어쩌냐는 어른들의 걱정까지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인정하는 효자가 되는 것에 명예를 걸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을 때 삼년상을 치렀고 묘소 근처에 움집을 짓고 처음 몇 달 동안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렸으나 할머니 등살에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시묘(侍墓)살이를 끝까지 못 한 것을 후회하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홀어머니를 잘 모셔 효자 소리를 듣고 싶어 하였다. 하여 할머니의 말은 무엇이든지 곧이곧대로 들으며 순종하였다. 나는 할머니가 내게는 지극하게 정을 주시는데 어머니에 대해서는 지독하게 대하신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발행해드린 어머니의 일기책 <맹순 할매의 억척 기도 일기>에 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잡아먹었다거나 점쟁이 말대로 궁합이 안 맞았다고 온 동네를 쓸고 다니셨다. 결혼해서 몇 년인데 아들을 못 낳는다고 얼마나 구박을 하였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시집온 지 삼 년이 넘었는데 괜히 억지를 부리신다고 항변하고 있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할머니는 밖에 나가실 때 광에 있는 쌀독에 그림으로 표식을 해놓는다. 이런 경우 아버지는 언제든지 할머니 편을 들어 효도를 증명하러 들었다. 무서운 것은 술을 드시면 죄 없는 어머니를 사정없이 때리는 습관이 있었고 성질을 참지 못하면 베틀을 몇 번씩 부쉈다. 조그만 어머니 몸에는 늘 멍 자국을 가지고 살았다.

뿐만 아니라 가정의 살림을 위한 유일한 생산물은 베짜기였다. 어머니는 철 따라 무명 베를 비롯해 삼베나 명주 베를 짜느라 베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나는 어머니가 베틀 위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여러 번 보면서 어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어머니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효도라는 명분으로 폭력을 즐기는 분이셨다. 나는 절대 닮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효를 가르치면서 불효의 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자신의 이중성, 모순, 위선을 모르는 채 나에게 충효와 삼강오륜의 정신을 주입하려고 혼신을 다 하였다. 그런 아버지의 조급함과 열성 그리고 강박관념이 나를 내리눌렸다. 아버지 앞에 앉으면 나 자신도 모르게 안절부절하며 오금이 저렸다. 아버지 말씀을 듣는 중에는 아무리 발이 저리고 소변이 마려워도 참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훈육도 전쟁과 더불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을 피해 밤마다 마루밑, 아궁이, 대나무밭을 돌며 숨어다니다가 마지막에는 키가 큰 수수밭에서 여름을 나셨다. 동네 남정네 상당수가 빨치산에 의해서 지리산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국군이나 경찰에 의해 끌려가 적성강 섬밭 가에 줄 세워져 기관총에 쓰러졌다. 나는 몬댕이 산에 올라가 이 장면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섬진강으로 번지던 핏빛을 잊을 수 없다. 둘째 방용이 삼촌은 다리에 할미꽃으로 부스럼을 내어 군대를 피하고, 막내 선용이 삼촌만 군에 가서 부상병으로 제대해 돌아왔다. 아버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군대 징집 나이가 아니어도 낮이고 밤이고 도망 다니는 길밖에 없었다. 밤마다 할머니가 날라준 주먹밥 정성도 소용없이 살기 위한 도피행각은 몸의 한계라는 덫에 걸려버렸다. 아버지는 급성 폐렴에 걸려 1952년 1월 21일 (음력) 춥고 추운 날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나는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의 강압적 역사 교육과 독단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다행감보다 어머니가 얼마나 좋으실까를 생각하였다. 그런데 실제는 너무 달랐다. 어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는 어떻게 사느냐’고 통곡하시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제국들의 전쟁이 쓰나미 같이 몰려왔고 그 피해 복판에서도 전쟁의 공포를 못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일기에는 내가 아버지 빈소에 동네 친구들을 몰고 와 놀이를하다가 할머니에게 혼이 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아버지와 나만 아는 숨은 비밀스런 사건이 있다. 어느해 정월보름 쥐불 놓는 날이다. 나도 불을 피우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서 불씨를 가지고 조용한 곳으로 간다는 것이 벼짚을 쌓아놓은 곳으로 갔다. 하필 그곳이 마을의 중심인 당산나무 앞에 있는 논이었다. 내가 깡통을 놓은 곳에서 불이 일기 시작하여 금방 볏짚으로 옮겨붙었다. 나는 당황해서 옷을 벗어 불을 꺼 봤으나 불은 화마가 되어 당산나무 가지로 옮겨 붓기 시작하였다. 동네사람들이 양둥이나 함박지등에 물을 퍼와서 당산나무 불은 껐으나 큰 가지 하나가 검게 타버렸다.

나는 두려움에 떨며 도망을 가서 다른 볏짚에 숨었다. 우리 할머니는 속도 모르고 “해불개야”를 부르며 동네를 휘저었다. <해불개>는 할머니가 부르는 나의 애칭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가 나를 때려 죽일 것 같았다. 어둠이 깔리고 추워서 웅크리고 있다가 나는 잠들어 버렸다. 아버지가 와서 나를 안고 집에 데려다 누이며 할머니께. “아가 불을 지르고 겁이 나서 숨어 있다 잠들었으니 그냥 재우세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잠든 척하였다. 다음날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너지” 하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방화범은 누군지 잡히지 않았다.

이해학 대표(사단법인 겨레살림공동체)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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