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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교의학>에서 제시된 신학의 학문적 가능성

기사승인 2022.01.15  16:5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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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 신학의 학문성과 과제를 말하다 ⑶

▲ 개신교의 신학대전이라 불리는 칼 바르트의 『Die kirchliche Dogmatik』 (교회 교의학) ⓒWikipedia

1932년에 출판된 『교회 교의학』(CDⅠ/1)은 이 시기에 바르트가 도달한 신학의 이해를 발전시킨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철저하게 교회에 맞추어져 있다.

“신학의 학문 분야로서의 교의학은 교회에 고유한, 하나님에 관한 말의 내용에 관하여 그리스도교 교회가 수행하는 학문적인 자체 검토이다”(CDⅠ/1, 3).

바르트는 신학의 학문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째, “신학은 모든 다른, 이른바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한 특정한 인식대상에 대한 인간적 노력이다.” 둘째, “신학은 그 경우에 다른 모든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한 명확하고 일관된 인식의 길을 걷는다.” 셋째, “신학은 다른 모든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와 모든 사람들에게(이 대상에 관심을 갖고 따라서 이 길을 걸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 이러한 길에 대하여 해명하는 자리에 있다”(CDⅠ/1, 7이하).

그러나 이것은 ‘현대’ 신학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타당한 학문의 개념의 요구들에 신학 자체를 종속시키는 것에 의해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 아니다.

“방법에 관하여, 신학은 아무것도 다른 학문들에게서 배울 것이 없다”(CDⅠ/1, 8).

바르트는 마치 10년 전의 강연의 내용을 연상케 하는 말을 한다.

“신학은 그 자체를 질서 있는 우주의 일원이 아니라 다만 무질서한 우주에서의 임시변통으로 이해할 수 있다”(CDⅠ/1, 10).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 이래 거듭 시도되었던, 신학을 일반 학문들 속에 포함시키려는 이른바 백과사전적 시도들로부터 신학을 해방시켜서 신학의 고유한 학문적 특성을 확립시키려는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셀름을 통하여 전혀 새롭게 신학의 이해에 도달한 바르트는 전과 달리 당당하게 신학의 학문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신학은 그것이 진리를 향한 인간의 관심으로서 이러한 종류의 다른 관심들과의 연대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의 학문이다. 둘째, 신학은 ‘학문’이라는 개념을 단순히 다른 학문들에 양도하지 않음으로써, 고전적 전통에 대한 마땅한 존경과 더불어 ‘이교도적’ 일반적인 학문개념에 대한 필요한 항의를 또한 천명한다.

셋째, 신학이 ‘학문들’과 학문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동일한 이름 아래 총괄된다는 사실에 의해서 신학이 증명하는 것은 그것들의 이교성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신학적 과제에 대한 그것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또한 신학이 참을 수 없는 학문개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들을 교회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신학은 죄사함을 믿고, 이교적 만신전의 최종적 현실을 믿지 않는다”(CDⅠ/1, 11).

바르트는 이와 같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정의하고, 그가 1922년에 제기했던 곤경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신학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이 곤경의 해결은 ‘해야 한다’와 ‘할 수 없다’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든 넘어서는 ‘제3의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발견되고 오직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에 관한 진술들 속에서만 표현될 수 있다. 『교회 교의학』은 이 제안들을 명확히 말하려는 것이며, 그 처음에서부터 거듭 새롭게 시도하려는 것이다.

그 처음에서 출발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어느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함께 출발했던 이른바 ‘현대’ 신학과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존재와 함께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제1권에서 ‘계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은 누구인가?’라는 중심적인 질문과 함께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그 대답을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발견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바로 이 삼위일체론이 그리스도교의 신론을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바르트는 더 단호하고 더 분명하게 삼위일체론을 계시와 관련시킨다. 사실 그는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은 자신을 주님으로서 계시한다’는 진술의 해석으로서, 그리고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그 자신을 ‘계시할 수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계시 가운데서 자유로운 하나님 자신을 만난다는 진리의 해설로서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에게 계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인상들, 혹은 판단의 기초 위에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상 영원부터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향해 있는 하나님 아버지가 이전에, 본래부터 그리고 영원히 그 자체로서 있는 자라면, 그리고 이전에 본래부터 그리고 영원히 그 자체로서 있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향하였다면, 그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본질적인 신성을 단언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단언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1) 바르트는 이런 의미에서 단지 ‘경륜적’ 삼위일체만이 아니라, 또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본질로서 가르치며, 「교회 교의학」제1권 제1부에서 논의되는 삼위일체론은 본질적으로 계시의 주격, 자신을 계시하시는 ‘주님’을 다룬다.(2)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 그의 말씀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인식 가능성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식하는 가능성을 위한 이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 혹은 현실성 안에서만 주어진다. 바로 이것이 그로부터만 모든 신학적 반성이 시작해야 하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다.

이 관점에서부터, 우리는 또한 『교회 교의학』 제1권이 출판되었을 때 절정에 달했던 자연신학에 반대하는 바르트의 부단한 논쟁을 이해할 수 있다.(3)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의 존재(계시 가운데의 하나님)가 하나님을 인식할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자연적’ 이성의 능력들에 의해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시도인 자연신학은 하나의 불가능성이 되기 때문이다.(4)

미주

(미주 1)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T. F. Torance, Karl Barth, Biblical and Evangelical Theologian, Edinburgh: T & T, 1990, 최영 옮김, 『칼 바르트, 성서적 복음주의적인 신학자』 (서울: 한들출판사, 1997), 234-239; John Thompson,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 Pennsylvania: Pickwick Publications, 1991, 13-36을 참고.
(미주 2) berhard Bush, Karl Barths Lebenslauf, Nach seinen Briefen und autobiographischen Texten(1975), tr. by J. Boden, Karl Barth, His life from letters and autobiographical texts, London: SCM Press Ltd., 213 이하.
(미주 3)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는, 제4장 “칼 바르트는 과연 자연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나?”를 참고.
(미주 4) C. Schwöbel, “Theology”, John Webster,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Karl Bar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33. 이것은 왜 바르트가 시종일관하여 그리고 집요하게 자연신학을 히틀러의 전제적 체제의 참된 성격을 감지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러한 인식 위에서 행동하는 것을 실패한 독일 교회와 관련 짓는가 하는 이유이다. “민족의 혁명”이 아니라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계시를 통하여 알려질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부정은, 바르트에게는, 자연신학, 즉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신학과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의 공통분모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전제적 체제와 독일 그리스도인들 양쪽 모두에 대한 저항의 형식은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근원적인 정치적 악은 신학적 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된 것으로서의 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는 정치적인 함의를 갖는다. 제1차 세계대전의 처음에, 바르트는 세계에 속한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혼합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의하였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두 ‘세계들’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로 진행되는 시기에 바르트는 세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혼합하는 것에 반대하여 항의하였는데, 그 까닭은 단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거기에는 단지 하나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 사상과 신학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Frank Jehle, Ever against the Stream, The Politics of Karl Barth, 1906-1968, Grand Rapids, 2002를 참고.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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