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전킨, 전주선교부에서도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기사승인 2021.11.27  15:42:54

공유
default_news_ad1

- 호남선교의 선구자, 미국 남장로교 전킨 선교사 ⑷

▲ 기전학교. 2005년 효자동(완산구 유연로 133)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화산동 교사 ⓒ기전여고

1904년 남장로교 선교부는 연례회의에서 군산선교부의 전킨을 전주로 발령을 냈다. 이는 전킨의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그가 안정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사역지를 전주에서 5km 이내로 제한하였다. 그의 성품과 평소의 활동 방식으로 보아 그에게 지방 순회를 맡기면 계속 무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의 과로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전킨은 테이트, 매커첸과 함께 전주선교부의 사역을 책임져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주선교부에서 전킨이 맡은 사역은 네 가지였다.

첫째는 전주교회 목회였다. 그는 전주교회(현재 서문교회)의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교우들의 숫자가 늘어나 예배장소가 비좁았으므로 그는 서문밖 780평의 대지에 57평의 반양식 예배당을 건축을 완성하였다. 총 공사비 3,500 냥 중에 2,300냥은 성도들이 헌금하였으며 건축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은송리에서 선교부 건물의 해체된 자재들을 이용하였다. 그래도 모자라는 부분은 은행에서 대출하였으나 미국 교우들의 헌금으로 이내 빚을 갚아 교회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교회 이름이 ‘서문밖교회’로 바뀌었다.(1)

또한 그는 시내전도에 주력하였다. 주일 오후에는 교인들과 시장에 나가 전도지를 배포하며 직접 전도하였다. 수천 권의 소책자가 집중적으로 배포되었으며 신흥학교 학생들도 노방전도에 참여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는 1907년 평양신학교 강의 차 평양에 머물면서 평양의 대부흥을 목격하였다. 그는 전주로 돌아와서 전주의 대부흥을 위하여 테이트, 매커첸 선교사와 함께 각 교회에서 모인 170명과 함께 4월 두 주간 동안 성경반 집회를 열어 정오기도회와 저녁 부흥집회를 가졌으며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를 경험하였다. 교인들은 전도 모임을 조직하여 주일 오후와 장날에 전도활동을 펼쳤으며 전도인 1명과 전도부인 1명을 두어 지속적으로 전도에 매진하게 하였다.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 북문에서, 맥커첸 선교사는 동문에서 교인들과 전도활동을 벌였으며 매주 목요일 밤 기도회, 금요일 밤 주일학교 남교사 모임, 토요일 밤 주일학교 여교사 모임과 병원전도 등 다양한 교회의 사역이 전개되며 전킨의 전주선교부의 교회가 32개에서 60개로 늘어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둘째는 김제-금구 지방 순회 사역이었다. 그가 전주선교부로 부임할 당시 그 지역에 8개 교회가 있었다. 전킨은 지방 순회 때 마다 환등기를 이용하여 전도하였다. 1904년 가을 김제군 선돌교회에서 4명이 세례를 받았고 금구의 성말교회에서는 7명이 세례를 받았다. 1907년에는 김제와 금구에서 287명을 문답하여 79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 사이에 3개의 교회가 늘어 모두 11개가 되었다.(2)

셋째는 전주 남학교(신흥학교) 교육선교였다. 전주 남학교는 1901년 해리슨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해리슨은 아내인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수업을 진행하였다. 기도회와 성경, 지리는 데이비스가 산수, 역사, 성경은 해리슨이 가르쳤고 오후에는 한국인 교사가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전킨은 1904년부터 전주 남학교의 교장으로서 지리와 산수를 가르쳤다. 그가 맡은 3년 사이에 학생이 32명으로 증가하였다. 1905년 남장로교 선교부 14회 연례회의는 전주에 근대식 학교를 세우기 위해 교사 양성이 급선무라는 논의를 하였고 1907년 연례회의에서는 전주에 증등 과정 즉 고등과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2월에 넬리 랭킨 선교사, 3월에 니스벳 선교사 부부가 교육 선교사로 전주선교부에 합류를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킨이 염원하였던 고등과는 그의 사후, 12월 2일에 시작되었다.

넷째는 평양신학교 강의였다. 전킨은 남장로교의 대표로서 평양신학교에 출강하였다. 그는 1905년에는 총 12주간 의 학기 중 중후반기 6주간에 걸쳐 ‘여호수아’서와 ‘구원의 계획에 관한 철학’을 가르쳤다. 1906년, 1907년에도 남장로교 선교부 대표로서 신학교에 출강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와 함께 걸식아동을 돌보며 고아원을 세웠다. 그는 거리의 아동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적당한 일거리를 주었고 아이들의 자립능력을 키워주려고 선교부의 부지에서 농사를 짓도록 도와주었다. 그의 자신을 돌보지 않는 무리한 헌신은 전주에서도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고 계속되었다.

1907년 그는 평양산힉교 강의를 위해 평양에 한 달 머물렀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와서 성경반을 지도하며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평양으로 올라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제 1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참석을 하였다. 그는 쉴 틈이 없는 사역의 긴장과 과로로 말미암아 지쳐 있었다. 1907년 성탄절 행사를 마친 후, 다음해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였으며 가족들과 함께 밤늦게 까지 성탄의 기쁨을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오한을 느끼고 잉골드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고열에 시달리는 그를 위해 군산의 오긍선과 다니엘이 달려왔고 레이번과 테이트와 코델이 번갈아 간호를 하였으나 고열에 시달리다가 1908년 1월 2일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3)

그의 죽음 전의 모습을 선교사 불(Bull)은 아래와 같이 기록에 남겼다.

그가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지 유언을 쓰고 그의 아내와 몇 가지 사업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는 아들을 불러서 자기는 그들을 떠나야 하므로 더 이상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없지만 그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하늘의 아버지가 계신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나는 본향에 가서 매우 행복하다”는 것이었다.(4)

전킨 선교사와 드루 선교사는 군산 지역에 있는 섬들을 돌며 순회설교를 하였다. 전킨 선교사는 아마도 그 시대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전도자 중의 한 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훌륭한 웅변 실력과 유창한 언어구사 그리고 따뜻하고 자비로운 성품과 한국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겸손하고 소박하고 기품이 있는 매너로 한국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어필하였다. 처음부터 그는 한국인들의 스스럼없이 사랑방을 찾아가서 그들과 이야기하며 그들의 삶의 고초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복음의 본질로 선교에 임하였다.

아래는 니스벳 부인 선교사가 장례식에 목격한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께서 당신에게 헌신한 이 병사를 하늘나라로 부르셨을 때 나는 선교 경험이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선교사에 불과했다. 나는 그의 장례식 때 어떤 분이 해 주었던 인상적인 말을 잊을 수 없다. 전킨 선교사를 땅에 묻기 전에 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국인들이 볼 수 있도록 허용해 주는 일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었다. 존경심이 아닌 호기심으로 와서 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남선교의 개척자가 되시는 어떤 분이 이렇게 대답했다. “전킨 선교사는 살아 있는 동안 한국인 만나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았으며 바빠서 안 만나 준적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만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나는 슬픔에 젖어 있는 눈으로 전킨 목사를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들을 쳐다보면서 몇 주 전에 전킨 선교사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었다. 그는 선교사의 삶이 희생의 삶으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격렬한 반대를 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5)

그의 시신은 유언대로 군산 구암 동산의 두 아들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가 현재 전주 선교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전주 선교사 묘역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전주여학교❯를 ‘전킨 기념학교’라고 명명하여 학교 이름을 ❮기전학교❯라고 명명하였다.(6)

한국 선교사로서의 16년 동안의 그의 삶은 실로 초인적이었다. 나라를 잃고 헤매며 고난을 당하는 조선인에 대한 사랑과 연민, 예수의 영에 사로잡힌 종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과 충성심으로 가슴이 화산처럼 타올라 과로와 피곤을 인정할 줄 몰랐다. 그는 다른 기후와 문화, 불편과 불안, 온갖 유행병과 풍토병을 장애물로 여기지 않고 친구 삼아 지냈으며 끝내 조선을 사랑하여 관제처럼 부음이 되었다.

자신의 안일과 명예를 구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존재로 삶을 일관한 전킨 선교사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미주

(미주 1) 전병호,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 377-378.
(미주 2)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86.
(미주 3)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98.
(미주 4)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98.
(미주 5)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58-59.
(미주 6)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101.

 

참고서적

*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도서출판 경건, 1998)
* G. H. 존스, 『한국교회 형성사』 (홍성사, 2013)
*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군산시기독교연합회 전킨기념사업회, 2018)
*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8)
* 류대영,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검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9)
* 디지털군산문화대전- 전킨
* 블로그 <hkmo1님의 블로그>, 호남선교의 개척자 전킨 선교사와 전북 군산
* 블로그 <이성과 영성>, 전킨, 군산 복음화의 선구자, 이 땅에 축구 보급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