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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선교를 향한 준비

기사승인 2021.11.13  15:4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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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선교의 선구자, 미국 남장로교 전킨 선교사 ⑵

▲ 메리 레이번 여선교사와 초창기 군산 주일학교 학생들 ⓒ 전킨기념사업회

선교사들의 전주 및 전라도 지역 탐색과 후퇴(1893-1895년)

미국 남장로교 최초의 7인 선교사 중 한 명인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는 1892년 12월 선교 구역이 결정되기 전에 마펫 선교사를 따라서 공주와 전주를 돌아보았다. 그는 침구와 짐들 그리고 구리 동전을 조랑말에 한 가득 싣고 다니면서 생명의 위협과 공포를 체험하였다고 하였다.(1) 그러나 본격적인 그들의 지역 탐색은 그들이 파송한 조사 정해원이 전주 은송리에 26달러를 주고 선교부로 사용할 초가집을 매입한 후부터였다.

1893년 9월에 전킨 선교사는 테이트 선교사와 함께 조랑말을 타고 하루에 56km씩 달려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를 방문하였다. 마침 늦가을 장마로 개울물이 불어나서 건너기가 어려웠다. 전킨은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져 한국인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들은 두주 정도 전주에 머물며 로나 가톨릭 신부를 방문하였고 전주부와 인근을 답사하였다. 정해원이 선교부지로 구입한 성문 밖의 초가집을 확인하고 감사드렸으며 서울로 돌아가서 동료 선교사들에게 전주를 ‘산기슭에 아름답게 자리 잡은 인구 5만의 도시’라고 보고하였다. 테이트는 그 해 11월에 다시 은송리 선교 거점을 방문하여 보름 동안 머물며 선교부 개설 준비를 하였다.

1894년 2월 제3회 선교회 연례회의에서 그들은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여동생 메티를 봄에 전주에 보내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들이 전주에 무사히 적응하면 가을에 전주 선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테이트 남매는 3월 19일에 전주로 향해 떠났으며 지난해에 구입한 집에서 6주간을 지냈다. 매티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고 찾아오는 여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었고 테이트 선교사는 한국어 선생과 시장과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처음부터 5~ 8명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으며 그들은 세례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미공사관의 철수 명령에 따라 동학농민운동으로 치안이 마비된 전주에서 5월 초에 서둘러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테이트 남매가 전주로 떠난 8일 후에 3월 27일에 남장로교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온 드루는 레이놀즈와 함께 6주 동안 전라도 탐험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인천에서 일본 증기선을 타고 스물네 시간 만에 금강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군산이 미래 선교부의 자리로 가망성이 좋다고 점을 찍었다. 그들은 3월 31일에 전주 은송리 선교 주택에 여장을 풀고 테이트 남매와 조사 정해원을 만났다. 그 후 드루는 목포를 거쳐 벌교에서 발의 병으로 말미암아 여행을 중단하였고 레이놀즈는 순천을 거쳐 5월 7일 부산에서 베어드 선교사를 만나 휴식을 취하고 다시 배편으로 인천을 통해 5월 12일에 서울로 돌아 왔다.

전킨과 드루의 서소문 선교

레이놀즈와 드루, 테이트 남매가 전라도에 있는 동안 전킨은 안성 일대에서 2주간의 일정으로 전도하고 있었다. 기간은 대략 4월 말에서 5월 초였다. 경기도에도 동학으로 인한 혼란이 밀려들자 그는 미국 영사의 연락을 받고 서울로 철수하였다.(2) 미국 공사관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서울로 소환하였다. 지방에서의 모든 선교 활동은 금지되었으나 서울에서의 선교활동은 계속 되었다.

전킨은 동학농민운동을 지켜보면서 ‘동학’에 대하여 공부를 하였다. 아래는 그가 “The 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글이다.

동학은 1865년 경상도 상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경주는 부산에서 45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동학의 시조인 최제우는 학자였는데, 몇 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파 과정을 눈여겨 본 결과 그는 그것이 참 종교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만 앓아 눕게 된 그는 백방으로 치료를 위해 노력했지만 별 무소용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동쪽에 떠오르기 시작한 어느 날 아침. 그는 무아지경 가운데 초자연적인 존재와 조우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상제이다. 나를 경배하라. 그러면 인간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최제우는 이때 평소에 갖고 있었던 생각을 질문합니다. “가톨릭은 참 종교입니까?” “아니다. 말과 시간은 같을지라도 생각과 영혼은 찬된 진리와 거리가 멀다.” 최제우는 이때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성경대전❯이라는 동학의 경전을 쓰게 되는데. 유교에서는 오륜(五倫)을, 불교에서는 수양을, 도교에서는 신선사상을 채택하였습니다. 유불선 삼도를 조합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미하는 천주(天主)는 가톨릭의 일 것입니다. 가톨릭은 간접적으로 동학이라는 이름과 관련이 있는데, 왜냐하면 서학으로서의 가톨릭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3)

이런 글을 한국에 입국한 지 1년 반이 조금 지난 선교사가 썼다는 것은 그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어 참으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894년 6월 전킨 선교사는 동학으로 현장에 내려갈 수 없게 되자 서대문 자기 집에서 직접 전도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사랑방을 개방하였으며 한국인들을 초청하였다. 전킨의 사랑방은 금방 소문이 났으며 하루에 8-10명이 그곳에 들려 전킨의 전도를 받았다. 한 불교 승려는 3차례 정도 사랑방을 방문하여 그를 만난 후에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승려복을 벗어 전킨에게 기념으로 주었다.

전킨의 서소문 전도는 7월에 드루 선교사의 진료가 더해지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드루는 매일 오후 내내 전킨의 사랑방에서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전킨은 환자들을 위해 통역하면서 직접전도를 하였고 그의 조사들도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며 환자들에게 복음을 증언하였다. 여성 환자들을 위해 매티가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1895년 3월 전킨의 사랑방은 단순히 전도거점을 넘어서 예배를 드리는 처소가 되었다. 전킨은 군산 1차 답사를 다녀온 뒤에 4월 2일, 두 사람의 신도에게 세례를 주었다.(4) 그들은 남장로교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며 그 세례식은 한국에서 남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치루어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1895년 여름, 전킨과 드루는 서울의 콜레라 대유행 때문에 여름휴가를 중단하고 서울 도심으로 가서 전염병 구호활동에 나섰다. 상황은 심각하였고 8월 8일 하루 동안 서울 도성의 한 출입문 근처에서 22명이 콜레라로 죽었고 또 다른 관문에서는 50명이 사망을 하였다. 드루는 의료선교사들과 함께 환자를 진료하였고 전킨 또한 물자 보급과 구호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의 국왕 고종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은으로 된 잉크스탠드를 받았다.(5)

전킨 선교사를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도착한 후 3년 동안 서울 선교본부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어를 학습하며 서대문 밖과 은성부재에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를 시작하였고 호남지역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레이놀즈의 아들과 전킨의 아들이 죽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러는 사이에 1894년 3월 드루 선교사 부부, 1895년 4월 유진 벨 선교사 부부가 도착하였고 1896년 2월에 해리슨 선교사가 도착하였다. 1895년 2월, 테이트와 레이놀즈는 전주로 와서 선교부 설립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으로 전주의 1/3이 황폐해졌으며 예전에 구입했던 집도 폐허가 되어 이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예전의 집보다 조금 높은 완산의 언덕에 땅을 더 사고 두 채의 초가집을 구입하여 수리를 하였다. 레이놀즈는 아내의 병환으로 한 달 만에 서울로 돌아가야 했고 테이트는 좀 더 오래 머물렀다.

1895년 성탄주간에 테이트는 여동생 메티와 함께 군산을 거쳐 전주로 이사를 하였다. 내한한 지 3년 2개월 만에 본격적인 호남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집을 정돈하고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주일이면 테이트 방에는 남자 아이들이, 매티의 방에는 여자 아이들이 몰려 들었다. 그 당시 테이트는 조사와 함께 문밖 입구에 서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사랑에서 예배를 드렸다.

1896년 11월에 해리슨 선교사, 1897년 6월에 레이놀즈 선교사가 전주선교부에 도착하여 선교부의 얼개를 갖추었다. 1년 반이 지난 1897년 7월 17일 테이트의 집에서 5명이 세례를 받았다. 테이트의 사환 김내윤, 김창국(옥와), 김창국의 모친 강씨, 함성칠의 부인 임씨, 유씨 부인 (김성희)가 전주 교회의 첫 열매가 되었다.

미주

(미주 1)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48.
(미주 2)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50.
(미주 3) 같은 책, 51.
(미주 4)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57.
(미주 5) 같은 책, 57.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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