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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선교의 열매, 개복교회와 구암병원

기사승인 2021.11.20  17: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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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선교의 선구자, 미국 남장로교 전킨 선교사 ⑶

▲ 1896년 4월 의료선교사 ‘드루’와 ‘전킨’이 군산진영 터가 있었던 수덕산 기슭에 세운 포교소.

전킨과 두루 선교사의 군산 선교부 설립

1895년 3월, 전주 선교부 설립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남장로교 선교부는 두 번째 선교부를 열기로 하여 전킨과 드루 두 내외에게 군산선교부를 개척할 사명을 주었다. 1895년 3월, 그들은 군산을 답사하가 위해 떠났다. 그들은 네 명의 선원이 운행하는 삼판호를 세내서 약과 책, 생필품을 적재하고 인천을 출발하여 120마일의 해안 여행을 떠났다. 평소 나흘쯤 걸리는 여행이었으나 그들은 비와 안개로 인하여 열하루 만에 금강하구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수주일 동안 군산과 그 주변 지역에서 매일 아친 9시에서 10시 반까지 설교를 하고 그 뒤로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때로는 50명에 달하는 환자를 돌보았는데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생선, 굴, 달걀과 미역 등을 감사의 표시로 가져왔다. 답사여행으로 그들은 주민들과 친밀해졌으며 군산선교부를 열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1)

1895년 가을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다시 군산을 방문하여 군산 해변에 인접하고 있는 수덕산 자락 (월명공원 일대)에 초가 2채와 땅을 구입하였다. 1896년 4월 5일에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료선교사는 함께 작은 일본 돛배를 타고 군산으로 이주하였다. 얼마 후에 린니 데이비스 선교사가 합류를 해서 군산은 호남선교의 두 번째 거점이 되었다.

조지 톰슨은 『한국 선교 이야기』의 70쪽에서 당시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896년 당시 군산은 약 100채 정도의 초가로 구성된 작은 어촌이었다. 부두도 없었고 우체국, 진신국도 없었다. 길은 좁고 구부러졌으며 더러웠다. 사람들은 무지하고 미신을 숭배하여 남자들은 술에 취하고 노름에 빠져 있었으며 여자들은 다투기나 하고 영혼을 숭배하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외국인들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1896년 여름은 군산 가족들에게 길고 덥고 먼지투성이 시련의 시기였다. 언덕에는 나무가 없었으며 들에는 풀이 없었고 집에는 유리창이 없었다. 전킨이 살고 있는 집은 해변에 가까웠기 때문에 끊임없이 홍수가 났다. 증기선들이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서울에서 가져오는 공급물자가 끊겼다. 그들의 음식은 고기, 살, 닭고기와 달걀 등 지방에서 살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든 요리는 숯불 화로에서 해야 했다. 이것이 군산 가족들이 보낸 그 뒤 삼년 동안의 일과였다.

전킨 선교사는 그는 이사 온 다음 날인 4월 6일에 송영도와 김봉래, 차일선 등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1895년 군산 방문 시 만났던 사람들로 세례 받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전킨은  수세를 원하는 예비신자 훈련을 3개월 동안 주제별로 시켰으며 드루 선교사는 두 달 간의 준비 작업을 거쳐 6월부터 훗날 군산 예수병원이 되는 의료사역을 시작하였다. 1896년 7월 20일 전킨은 김봉래와 송영도에게 세례를 베풀며 군산선교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남장로교의 선교지인 호남에서 결실한 최초의 열매가 되었다.

그런데 1896년 가을 제5회 남장로교 선교부가 연례대회에서 군산 선교부를 폐쇄하고 남쪽에 보다 나은 선교부의 땅을 찾기로 결의를 하였다. 당시 선교부는 나주를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지목하였으나 드루 선교사의 맹렬한 반대로 군산선교부 폐쇄가 유예되었다. 

전킨 선교사는 1896년 11월부터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호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 군산교회(개복교회)의 출발이다. 같은 해 11월에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린니 데이비스가 군산으로 내려와 여성반 두 개와 소녀반 두 개 소년반 하나를 만들어 여성교육과 어린이 교육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으며 여성반은 군산교회 여신도들의 주축이 되었다.(2)

같은 해 드루 선교사가 일본에 다녀오면서 제물포에서 의료선교선으로 황포돛대 배를 구입하였다.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선교선을 타고 고군산열도의 섬들과 금강변의 위치한 충청도 서천, 화산, 한산, 옥포, 임포, 청송을 지나고 궁멀에서 서포, 나포, 웅포, 용안을 지나 강경과 부여까지 올라갔다. 또한 만경강 줄기를 타고 월포, 옥포, 동자포, 신창포구, 목천포, 남참나루터, 송지동까지 지경을 넓혀서 전도활동을 활발히 벌였다.(3)

1897년 제 6회 남장로교 선교부는 연례 모임에서 군산선교부의 복음전도사역이 매우 성공적이었음을 확인하며 군산 선교부를 계속 유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전킨 선교사의 1897년 5월의 보고서에 의하면 군산선교부에는 주일예배에 정규적으로 참석하는 40명의 신도가 있었고 한 주 헌금이 530전이었으며 헌금을 위해 두 사람의 회계가 임명되었고 헌금은 가난한 사람과 설교하러 나가는 형제의 경비로 쓰기로 하였다. 헌금이 남을 경우에는 시골교회의 필요와 교회 건축 시 쓸 수 있도록 종자돈으로 모으기로 하였다고 한다.(4)

군산선교부의 궁멀로 이전과 전천후 복음전도

전킨 선교사는 쪽 복음서를 돌리며 전도를 하였고 드루 선교사는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주었다. 그들은 배편을 이용해 멀리 군산 앞 바다의 섬들과 금강 상류 변에 있는 충청도에 까지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그러나 일본이 고종에게 요구한 군산항의 개항으로 수덕산(월명공원) 일대를 비롯하여 현재의 영화동, 장미동, 영동, 중동 의 땅 약 17만 3천 평이 일본의 조계지가(5)되어 그 중 10만 2천 평이 일본인들의 주거 용지가 되는 바람에 전킨과 드루 선교사는 군산선교부를 수덕산(월명공원 일대)에서 군산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 문제 직면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1898년 제 7회 연례모임에서 군산선교부를 궁멀(구암동)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땅을 매입하였다. 그곳은 데이비스 선교사가 주일학교를 시작한 궁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드루 선교사의 선교선을 띄우기 좋은 선창이 있었다. 전킨은 1899년 4월부터 선교부와 사택을 겸한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 궁멀선교부의 일자별 공사 상황을 이남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6)

4월 3일 일꾼들을 시켜 부지 정리 작업을 시작.
4월 20일 일꾼들이 일을 하자 말고 가버림- 일종의 태업
4월 22일 일꾼들의 부주의로 기와를 운반하던 중 모두 박살남
5월 1일 일꾼 중의 리더가 작업을 거부하고 일을 중단시킴.
5월 3일 담장에 쓸 재료를 모두 잃어버림
5월 5일 목수가 돈을 더 달라고 요구하며 역시 작업을 거부
5월 22일 목수가 열흘 동안 쉰다며 집으로 가버림
6월 20일 창문을 도둑맞음

전킨 선교사는 일꾼들의 횡포와 외국인에 대한 괄시와 텃세를 견디다 못한 나머지 임피 군수를 찾아가 하소연을 하며 도움을 요청하였다. 게다가 장마철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단되자 그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의 건강을 염려한 선교부는 그에게 여름휴가를 일본으로 가도록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건물이 완공되고 12월 21일 군산선교부가 수락산에서 궁멀로 이사하여 새 시대를 맞이하였다.

전킨은 구암동(궁멀)에서 다시 정규 예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군산교회는 곧 난관에 봉착을 하였다. 일본의 조차에 의해 항구 일대가 다 일본인들에게 장악되자 항구주변에 살던 신도들이 다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의 전도 활동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았으나 뜨거운 반응이 도시 변두리와 시골에서 왔다. 시골에 사는 신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자 토요일 밤에 교회로 왔다. 그리하여 전킨 선교사는 그들을 따라서 신도들이 사는 마을로 순회 전도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1899년에는 군산 선교부의 정규적인 예배 장소가 네 곳으로 늘어났다. 군산교회(현 개복교회), 궁멀교회(현 구암교회), 대야 만자산교회(현 지경교회), 김제 송지동교회(김제시 공덕면)가 바로 그 교회들이다. 계속해서 전킨은 조사들과 함께 통사동교회(개정 통사리교회), 남차문교회(익산 남전리), 제석교회(웅포), 월성리교회(김제 봉남면), 대창교회(김제 죽산면), 입석리교회(월천면)를 개척하였다.

1899년경 군산, 전주, 목포 등 세 곳의 선교센터에는 선교사들의 주택이 세워졌고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공간이 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좀 더 긴 기간 동안 시골로 전도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선교사들은 3주나 4주 동안 집을 떠나서 규모가 작은 성도들의 모임을 방문하였고, 교회를 세웠으며, 미전도지역을 찾아다니며 전도하였다. 순회 전도여행을 떠날 때는 텐트, 침낭, 담요, 통조림, 빵, 커피, 또는 코코아, 음식을 담은 상자,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용기, 옷, 책, 소책자, 벌레약을 필수로 가지고 다녔다.

전킨 선교사는 순회전도, 거리 전도에 열심 하였지만 의료, 교육을 통한 선교를 소홀이 하지 않았다. 전킨 부부는 집에서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이 안락소학교(구암초등학교), 1902년에 세워진 영명학교(현 제일중고)와 아내인 메리 레이번이 시작한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가 되었다. 그는 드루 선교사와 함께 구암병원 (군산 예수병원)을 세우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순회하지 않고 선교센터 안에 있을 때는 드루 박사의 선교병원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의 친구가 되었고 이내 그들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초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또한 궁멀(구암)을 중심으로 하여 대야, 익산, 전주, 장항, 서천, 논산, 부여, 김제 등을 순회하였으며 금강, 만경강, 동진강 뱃길을 따라 복음을 전하러 다녔다.

안타깝게도 1901년 서울 서대문밖에서부터 막역한 동지로 함께 헌신했던 드루 선교사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7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드루는 군산 예수병원 설립자였다. 외과의사로서 탁월했던 그는 ‘하루 종일 햇살이 한 줄도 비치지 않는 음침한 작은 진료실과 수술실’에서 일하였으며 아플 때도 있고 자리를 비울 때도 있었지만 그는 첫 두 해 동안 4천명의 환자를 돌볼 정도로 희생적이었다.(7)

그는 병원에서 진료뿐만 아니라 자기가 치료한 환자들이 돌아가서 세운 교회를 돌보았으며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는 전킨과 함께 금강을 오르내리며 섬과 내륙의 오지를 돌며 순회 진료를 하였으며 전도용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그는 수년 동안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은 혹독한 사역으로 쇠약해진 결과로 선교부의 소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돌아오지 못하였다. 

드루가 떠난 이후로 전킨은 심신이 아팠다. 그러나 불 선교사의 도움을 힘입어 순회선교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자신의 소진을 느꼈다. 군산 선교부를 연지 8년이 되었을 때 그의 몸은 열악한 환경과 과로로 허약해졌고 아내의 병과 두 아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사역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는 순회 중에 말이 길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하였고 무리한 일정으로 편도선염이 악화되어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1899년 아들 시드니를 1903년에 프란시스를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한 그 자신도 오랫동안 이질에 시달려 건강이 악화될 대로 되었다. 아내 또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미주

(미주 1)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69.
(미주 2)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70.
(미주 3) 전병호,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 179-180.
(미주 4)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72.
(미주 5) 전병호, 『호남 최초 교회 설립자 이야기 전킨 선교사』, 139.
(미주 6) 같은 책, 150.
(미주 7)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74.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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