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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들의 파격

기사승인 2021.11.06  15:5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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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선교의 선구자, 미국 남장로교 전킨 선교사 ⑴

▲ 미국 남장로교 7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조사 정해원

조선에서의 기독교의 복음 전파는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선교사들은 한민족(韓民族)이 4000여 년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는 방식으로 조선인들에게 다가갔다. 갓을 쓰고 도포자락을 입고 종자를 거느리며 점잖게 위세를 부리며 행세하기를 좋아하는 양반의 나라 조선인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참으로 기이하였다.

절망에 빠진 조선인들에게 위로와 부활을 전하다

선교사들은 거룩하지 않고 고고하지 않고 권위적이지 않고 신비하지도 않은 점잔하지 않은 방법으로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노래를 부르며 노방전도를 하였다. 그들은 천박하게 장날 장터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으며 쪽 복음서와 달력을 판매하였다. 그들은 거지처럼 집집의 대문을 두드리며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축호전도를 하였다.

그들은 조선 오백년이 형성한 가문과 족벌, 출신 성분과 지위 고하와 빈부귀천의 신분사회에 휘둘리지 않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며 생명 그 자체에 주목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여성, 고아, 과부, 걸인, 병든 자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높은 곳을 향하지 않고 낮은 곳을 향하였다. 고난과 불편, 풍토병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도보로, 말로, 배편으로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사람들과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망국 백성에게 위로와 부활의 소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1883년 황해도 솔내에 교회가 세워지고 1884년 알랜 선교사가 입국한 이래 30년 동안 한반도에 2,00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선교부와 교회들은 학교와 병원을 통하여 지역사회 근대화와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견인하였다. 급기야 3.1만세운동을 전개하여 한민족의 독립 염원과 기개를 만방에 떨쳤다.

30여년이라는 짧은 선교 역사 속에서 복음이 신속하게 전파된 것은 조선의 멸망과 일본의 악랄하고 비열한 식민지 경영과 탄압이라는 정치적인 환경이 크게 작용하였음이 분명하다. 거기에 혁명적 사건과 상황이 더해졌다. 유교 윤리의 계급적 조선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양반이 개종한 상놈과 여성들과 아이들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러나 그런 환경과 상황이 있다고 해서 복음이 절로 꽃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희생한 선교사들의 죽음이 많은 열매를 거둔 것이다.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의 저서 『호남 선교 초기 역사』 (경건, 1998)에 의하면 1892년에서 1919년 11월말까지 조선에 와서 선교한 미국 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모두 108명이었다. 그 중  9분의 선교사님들이 사역 중에 현장에서 돌아가셨다. 그들의 피와 눈물은 호남 선교 초창기에 호남의 대지와 산, 전라도 개땅쇠들의 가슴에 관제처럼 부어졌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호남지역에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선교부가 세워졌으며 복음이 들불처럼 퍼졌다.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이 된 아홉 분들은 1902년 6월 20일 전주에서 사망한 린니 데이비스(해리슨 부인) 선교사, 역시 전주에서 1908년 1월 2일에 사망한 전킨 선교사, 오웬 선교사를 필두로 해서 유진 벨 부인 선교사, 마가렛(유진 벨의 두 번째 부인) 선교사, 존 커티스 선교사, 폴 사케트 선교사, 피츠 선교사, 랭킨 선교사 등이다.

본 글은 군산선교부를 개척하는 중에 두 아들을 잃고 편도선 절제수술을 받는 등 인간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1904년에 전주선교부로 발령을 받아 서문밖교회를 건축하고 전주선교부를 완산에서 화산으로 옮기면서 과로가 원인이 되어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여 호남선교의 밀알이 된 전킨(William McCleery Junkin, 1892-1908년) 선교사의 히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보며 추모하는 글이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된 7명의 선교사

1865년 12월 미국 버지니아주 크리스천벅에서 태어난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가 조선에 파송한 최초의 7인 선교사 중의 한 명이었다. 남장로교 최초의 7인 선교사는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와 그의 부인 팻시 볼링(Pasty Bolling), 전킨과 그의 부인 메리 레이번(Mary Leyburn), 테이트(Lewis Boyd Tate)와 그의 여동생 매티(Mattie Tate) 그리고 린니 데이비스(Linnie Davis Harrison) 등이다.

1891년 10월 내쉬빌에 있었던 SVM(세계 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 집회에 유니온 신학교의 레이놀즈와 카메론 존슨, 맥코믹 신학교의 루이스 테이트가 참석을 하였다. 당시 집회의 주 강사는 안식년으로 돌라온 호러스 언더우드와 밴더빌트 대학교 유학생인 윤치호였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선교사의 선교보고와 윤치호의 ‘복음이 필요한 조선’에 대한 강력한 호소에 감명을 받은 테이트와 레이놀즈, 존슨은 조선 선교에의 소명을 확인하며 함께 조선으로 가기로 마음을 나누었다.

테이트는 돌아가자마자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한국 선교를 신청하였다. 존슨은 한국 관련 서적을 구입해서 보고 친구인 전킨과 레이놀즈에게 빌려주었다. 전킨은 비록 내쉬빌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1891년 12월 레이놀즈, 존슨과 함께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를 희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은 ‘조선 선교사 파송이 불가능하다’는 회신과 함께 선교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로 선교 지망을 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동요하지 않고 매일 함께 모여 조선을 위해 기도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냥 기다리지 않았다. 내쉬빌 집회 후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유니온 신학교를 방문하였을 때 영접하였으며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남장로교 산하의 교회에 알리기로 하였다. 그들은 언더우드 부부가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와 버지니아의 주요 교회들을 방문하여 환등기를 사용하여 한국을 소개하게 하였으며 교회 기관지에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자신들의 소명을 알렸다. 그들의 노력은 남장로교에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을 일으켰다.

한 달 사이에 상황이 바뀌었다. 남장로교가 지원하고 있던 그리스 선교가 정치적 불안으로 중단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언더우드의 친 형인 존 언더우드가 재정 부족으로 한국 선교를 할 수 없다는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형편을 듣고 2,000달러를 기증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또한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를 염원하며 500달러를 기부하였다. 두 가지 잇단 사건 후에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는 전킨과 레이놀즈, 테이트를 한국 선교사로 임명하였다.(1) 그들은 믿음으로 기다린 지 두 달 만에 ‘8월에 항해할 준비를 하시오’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어서 다른 4명의 여성이 한국 선교로 부름을 받았다. 팻시 볼링은 5월에 레이놀즈와 결혼하여 남장로교 최초 선교사 그룹의 일원이 되었고 메리 레이번 또한 6월에 전킨과 결혼을 하여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테이트 선교사의 동생인 매티 테이트는 신학을 공부한 여성으로 6월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으며 오지 선교사가 희망이었던 데이비스는 남장로교 해외선교실행위원회에 콩고 선교사를 자원하였으나 여자라는 이유로 거부를 당하였다가 당시 오지나 다름없는 한국 선교사를 지망하게 되었다.

7인의 선교사는 1892년 9월 7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 센트럴장로교회와 그랜드애비뉴장로교회가 주최한 환송 예배에 참석하였다. 전킨은 일행과 함께 한국에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도중에 캔자스시티에서 편도선염을 앓았다. 결국 덴버에 남아서 1주일간 치료를 받고 자신을 기다려준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와 함께 9월 27일 ‘Empire of China’호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요코하마에서 먼저 도착한 테이트 남매를 만나 1892년 11월 3일에 기도하며 염원하였던 조선 땅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제물포에 함께 도착한 선교사가 6명인 것은 7명 중의 1명인 린니 데이비스는 한국 공사관 서기관이었던 이채연의 부인을 따라서 10월 17일에 서울에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전킨 선교사를 비롯한 7명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처음에는 북장로교 선교회 선교사들의 집에 머물렀다. 후에 서대문에 있던 전 독일 공사의 저택을(2) 1,500달러에 구입하여 공동으로 다섯 명이 함께 살았으며 테이트 남매만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은 서울에 체류하며 조선어와 문화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93년 1월 그들은 장로교공의회에서 결정대로 전라남북도와 제주도 그리고  충청남도의 6개 군을 선교지역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선교구역이 정해졌음에도 그들은 선교지로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계속 체류하며 호남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한국 언어와 문화, 지리와 역사를 배우며 선배 선교사들이 터득한 선교 노하우를 공유하며 선교부지 마련 등의 일로  서울에 1년 이상을 머무르게 되었다.

미주

(미주 1)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32-33; 류대영,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검토』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41-142.
(미주 2)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45; 송현강은 『미국 남장로교의 한국 선교』 39쪽에서 북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앨런이 소유하고 있던 주택이라고 주장한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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