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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기사승인 2016.05.31  11: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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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리의 늦게 가는 세상>

다시 산을 찾았다. 
두고 온 꽃들 때문이었다. 
고은님의 시처럼 ‘그 꽃’ 이 생각나서였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임정훈

지난 산행은 동티모르에서는 처음이었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주변을 보기보다 일행들과 뒤 처질까봐 잰걸음으로 따라가기 바빴다. 인적 드문 산길에서 마주쳤던 앙증맞고 청초한 꽃들도 무심한 듯 지나쳤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긴 시간을 참고 기다렸을텐데 가만히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내내 그 사랑스러운 꽃들이 눈에 밟혔다. 화무십일홍. 꽃들은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꽃들을 보러 다시 산에 한번 더 가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임정훈ⓒ임정훈

산으로 접어드니 마음이 앞서 간다. 지난 산행 때 보았던 채송화 같던 그 꽃은 아직도 여전할까. 그 곁에 봉우리 맺혀 있던 꽃들은 피었을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진다.아침 일찍 나섰지만 차에서 내리니 더위가 확 달려든다. 언제나 여름인 동티모르. 이제는 익숙해 질 때도 되었건만 ‘시원한 가을이 언제쯤 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본다.  

언제부턴가 소박하고 작은 꽃들이 좋아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이 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작은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쓴 꽃들이 기특하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것이 최선을 다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보듬어 주고 싶어진다.

꽃이 가까워질수록 더 궁금해졌다. 드디어 산모퉁이에서 그렇게 보고 싶던 꽃들을 마주했다. 감사하게도 그곳엔 아직도 많은 꽃들이 무심했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풀 섶 옆에 살포시 들어 있는 다섯 개의 꽃잎을 가진 하얀색 꽃
솜털 보송보송 날리며 살포시 피어난 채송화 같은 꽃
누군가가 그토록 좋아한다는 연보라색으로 곱게 물들인 꽃
군무를 이루고 피어 있는 패랭이꽃처럼 생긴 꽃
빨강 주황으로 조화를 이루며 깻잎 같은 잎사귀에 핀 꽃
서로 대칭을 이루며 바라보고 있는 쌍둥이 꽃
빨간색 별 같은 꽃들이 환하게 웃으며 다시 돌아 온 나를 맞이했다.

ⓒ임정훈

그동안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아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준 꽃들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내게는 들꽃, 풀꽃이 전부였다.  

드문드문 피어있는 꽃을 보며 어느 만큼 더 걸었을까.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면서 작고 소박한 꽃들을 바라본다.자신 보다 다섯 배는 더 넓은 하트모양의 잎사귀 사이에 아주 작은 하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다.

ⓒ임정훈

‘넌 왜 여기서 혼자 피어 있는 거니?’
문득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싸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세상에 피었기에 
우리들의 마음도 평화롭게 피어나고
너희들이 묵묵히 꽃을 피우고 있기에
우리는 용기를 얻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거란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나태주 시인이 말 한 풀꽃처럼
보면 볼수록 예쁜 사람들인 학생들이 생각났다.

ⓒ임정훈
ⓒ임정훈

나는 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 설 때 마다 가슴이 설렌다.
아니 학교로 가기 위해서 가방을 챙길 때부터 마음이 설레였을거다.
학생들을 만난다는 것은 나에겐 참으로 큰 기쁨이다.

누군가 동티모르에서의 삼락을 말하며 그 중에 하나가 제자가 커가는 것을 보는 재미라고 했다. 나는 아직 그 말은 모르겠다.
나에게 제자는 한 명 한 명이 그저 사랑스러운 풀꽃 같을 뿐이다.

<필자 소개>

필자 임정훈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 딜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음

임정훈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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