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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님이 내 몸을 빌려 다시 외치고 계신 것’

기사승인 2012.09.06  18: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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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준하 선생 장남 장호권 씨 인터뷰

9월 6일 오전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를 만났다. 강남에 있는 지인의 사무실로 우리를 초대한 그는 8월 1일 장준하 선생의 묘가 개장된 직후 한 달 남짓 된 시간동안 진상규명 활동을 비롯한 방송출연 등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우리와 잡은 인터뷰시간 앞뒤로도 기자들과의 일정이 잡혀 바쁜 와중이었지만 장준하 선생의 ‘후배’인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간 일간지와 공중파, 팟캐스트에 출연해 얘기하던 장준하 선생의 타살 의혹과 관련된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기지하고 있는지라 각설하고 장준하 선생의 가족에 얽힌 삶의 단편들과 2012년 죽은 지 37년 만에 다시 살아 역사에 외치는 소리를 장남인 장호권씨의 입을 빌어 청해 들었다.

   
▲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씨를 9월 6일 오전 강남의 모 사무실에서 만났다.ⓒ에큐메니안 고수봉 기자

막내 장호준 목사 이야기

   
▲ 장준하 선생의 막내아들 장호준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경기노회 소속으로 미국 유콘스토어스 한인교회 담임을 맡고 있다.
우리가족은 종교의 선택이 자유로웠다. 나는 종교를 갖고 있지 않고 여동생은 가톨릭, 막내는 개신교 목사,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이다. 장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막내는(장호준 목사)는 다른 대학은 갈 수 없어서 신학대학에 갔고 나중에 기장 목사가 됐다. 그 후 내가 있던 싱가폴로 내려와 감옥에서 마약중독자들을 교화하는 일을 도왔고 태국 오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99년 미국으로 건너가 코네티컷주에서 유콘스토어스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장호준 목사와 관련된 재미난 일화가 있다. 그는 미국에서 목회를 하는데 1년에 두 번 큰 모습의 변화가 있다. 머리를 길러 뒤로 묶어 말총머리를 한 모습과 삭발에 가까운 모습이다. 알고 보니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 백혈병환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동안이고 박정희의 아들 박지만과 같은 또래이다. 미국에서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게 실천하면서 살고 있다.

장준하 선생의 개종은 부인을 위한 것

장준하 선생님이 생애 마지막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당시 문익환 목사님을 비롯해서 ‘왜 개종하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기도 했지만 이후 그 진위를 아셨던 분들은 장선생님을 이해했다. 가톨릭에는 혼배성사라는 의례가 있는데 이것을 해야 결혼한 것으로 인정하는 전통이 있다. 장준하 선생은 1975년 7월 즈음 즉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어머니 소원이었던 혼배성사를 하기위해 개종을 했고 혼배성사를 올린 후 1주일도 안 돼 돌아가신 것이다. 단지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에 그리고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생을 마감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장선생님의 집안은 오래된 기독교 집안이었다. 할아버님이 목사님이셨고 증조할아버님은 장로님이셨다. 고신측 목사님이셨던 할아버님은 국이 두 번 식을 때까지 식사기도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아버님은 신학을 하셨지만 일찍이 깨이신 분이셨다. 어머님을 따라 성당에 가시기도 하시고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에 가시기도 하셨다. 그런 것을 보면 근자에 와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의 성직자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러한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이미 하셨던 분이셨다. 그런 이유가 내가 아버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이다.

(본지에 문동환 목사의 글 가운데 장준하 선생이 가톨릭 집안의 여자와 혼인하기 위해 고민했던 일화를 소개한바 있다. 그분이 현재 어머니라는 것을 장호권 선생의 증언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두 분이 서둘러 결혼했던 이유는 당시 미혼인 처자들은 위안부에 끌려갈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막고자 혼례를 올린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일제의 마수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지만 장선생님은 결혼한 지 1주일 만에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됐다. 자기희생적인 삶을 많이 사신 것이다.

문동환 목사님은 나에게 큰 빚이 있다?

   
▲ ⓒ에큐메니안 고수봉 기자
나는 장준하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세달 전인 1975년 5월에 결혼을 하게 됐다. 당시 문동환 목사님이 나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셨는데 1시간이 지나도 결혼식장에 나타나시지 않았다. 약속된 결혼식이 한 시간이지나 두 시간이 가까워 올 때 쯤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하객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할 수 없이 하례객으로 참석하신 함석헌 선생님께 결례를 무릅쓰고 주례를 부탁했다. 함석헌 선생님은 주례사를 미리 준비해 오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례사라기보다는 시국강연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결혼식이 끝나고 난 후 문동환 목사님이 헐레벌떡 뛰어오셨다. 잊어먹고 계셨다고 했다.(웃음) 얼마 전에 한국에 오셔서 만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 말씀을 하시면서 평생 갚지 못할 죄를 졌다고 농담삼아 말씀하곤 하셨다. 당시 내 아내는 동아일보 출신이었는데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됐었다. 장준하 선생님은 내 결혼식 때 모인 축의금을 모두 걷어 당시 동아투위 활동하던 곳에 모두 후원하기도 하셨다.

애국애족 정신으로 사셨기에 외로우셨던 장선생님

   
▲ 1944년 초 장준하 선생의 사진. 장 선생은 그해 1월 일본 육군에 학도병으로 입소하여 훈련을 받고 일본 관동군 쓰가다 부대에 배치된다.
그분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신학도로서 마음속에는 신이 있지만 신 말고는 국가와 민족 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반면에 그리워하다가도 현실로 돌아오면 장선생님을 소외하는 경우도 많아서 장선생님은 일생을 외롭게 사셨다. 그분이 그 시대에 꼭 필요한 분인데 필요한 것만 취하고 버리는 것이다. 특히 정치계에서는 그랬다. 당시 YS와 DJ 측근들 까지도 장선생님을 이용했다. 그리고 불필요하게 장선생님에게 정치적으로 라이벌의식을 가졌다.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때 장선생님을 이용하고 이후에는 장선생님을 배제시키곤 했다. 그래서 외로우셨다.

학도병탈출, 신혼 때 이미 계획된 것

장선생님 14살 때 길거리 사진관을 지나다가 대한민국 지도를 보고 끌어안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만큼 어려서부터 애국애족정신이 깊으셨다. 그래서 나는 가끔 어머니께 ‘어머니는 후실이십니다. 아버지는 이미 결혼하셨는데 왜 후실로 왔기 때문에 가족이 이렇게 천대받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곤 했다. 장선생님이 20대 초반에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를 할 정도로 진취적이셨지만 그 전의 삶도 굉장히 개혁적이셨다. 농원을 부수어 학교를 짓고 학생들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하고 여학생들도 활동하기 편한 치마로 바꾸는 등 개혁적인 활동을 하셨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학생들이 혼나면 달려가 어른들과 토론하여 설득하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상당히 혁명적이고 개혁적인 마인드를 갖고 계셨다. 신학을 접하면서 청교도적인 삶과 개혁적인 성향을 분출하는 것이 어머님과의 결혼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서신 것이다.

   
▲ 1944년 7월 탈영 무렵의 장준하, 왼쪽은 노능서, 오른쪽은 김준엽
어머님의 안전보장을 위해 결혼도 하고 기왕 학병으로 차출됐으니 이미 (독립운동에 대한)계획을 하셨던 것이다. 학도병 떠나기 전날 신혼생활 1주일도 안됐을 때 장선생님은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가서 편지를 보낼 것이다. 편지에 성경구절이 있으면 내가 도망간 것으로 알아라.” 그 얘기는 군대 끌려가서 즉흥적으로 도망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생활 1주일 동안에 어머니께 앞으로 삶의 계획을 전하신 것이다.

장선생님은 탈출하기 직전 어머니께 편지를 보내셨는데 그 안에 야곱의 돌배게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장선생님은 이미 탈출하신 상태였고 중경 6천리길을 걷기 시작하셨다. 그 때부터 어머니 집에 매일같이 경찰이 찾아왔지만 어머니는 ‘왜 그러느냐, 우리 남편이 죽었느냐’라며 시치미를 떼고 넘어갔다고 했다.

장정 6천리 그리고 반쪽의 해방

장선생님이 중경에 갈 때 고인이 되신 김준엽 선생(전 고대총장)과 당시 56명을 끌고 가면서 밥을 해 먹이는 담당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쉬는 시간에 도박을 하는 등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장선생님이 강한 처벌을 가해 그런 일이 없도록 했다. 그 처벌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해방이후 장성으로 활동했던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인사들도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25세 청년 장준하가 김준엽 선생과 함께 목숨을 걸고 50여명을 지키기 위해 그런 고민과 헌신을 했다는 것이다.

중경에 와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한 사람당 하나씩 당을 만들어 사분오열 된 모습을 모며 장선생은 “우리가 이 꼴 보려고 수천리길을 목숨 내놓고 온 줄 아느냐? 차라리 일본군으로 돌아가 비행기를 몰고 와 다 폭파해 없애 버리고 싶다.”며 일갈을 날렸고 다른 사람들은 ‘저 젊은 놈이..’하면서 화를 냈지만 백범 선생은 그 뜻을 알고 통곡했다는 일화를 들었다. 

그런 굳은 마음과 자세로 미완의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장선생의 마음은 더 무거웠다. 외세에 의한 반쪽짜리 해방이었는데 당시 국내 재벌들과 어울려 경회루에서 기생파티를 열고 춤추고 술에 취한 모습을 보면서 장선생은 돌배게에 ‘나라에 망조가 이제부터 다시 시작돼는 구나’라고 한탄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해방이후 역사의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의 망령이 다시 살아 이후 60년간을 우리나라와 민족을 유린하고 있고 이명박 정권이 친일행각을 벌이더니 이제는 원조 친일 황군세력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37년간 장선생님은 이러한 모습을 참다못해 더 이상은 못기다리겠다는 심정으로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오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분은 돌아가셔서도 나라 걱정을 하신 것이다.

‘장준하 선생님이 내 몸을 빌려 다시 외치고 계신 것’

내가 그동안 흰소리하면서 ‘장준하의 아들이 아닌 장호권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며 외도를 하고 있었는데 다시 그분이 나타나시면서 ‘장호권이는 없다.’ 제 몸을 빌려서 장선생님이 들어와서 무엇인가를 하시려는 것 같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누구를 지목해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같이 살아 있는 내 몸뚱아리에 장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이제는 더 이상 일제 36년 그 후 70여년의 일제잔재의 세월을 연장시켜서는 안 되겠다. 잘 못했다가는 이 나라가 다시 예속 되겠다.’라고 외치시고 있다.

   
▲ ⓒ에큐메니안 고수봉 기자
이 나라가 독재 권력을 떠나서 일본이나 외세에 넘어갈 것 같다. 밤에 잠자다가도 식은땀이 난다. 가쓰라-데프트조약처럼 현재 미국과 일본이 밀약을 계속 해오고 있다. 한반도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평화유지군중 하나로 일본 자위대가 들어 올수도 있다. 그 안에서 일본이 기득권을 주장하며 법정관리를 해야겠다고 주장하면 예속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1%의 친일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이익은 더 많아지고 치안유지는 일본에게 넘겨 호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매국노가 우리나라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꼴을 더 이상 참기 어려워 장선생님이 죽어서도 역사의 한복판에 나서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 이 일은 장선생님이 하시는 것이구나’

장선생님의 유골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진상규명에 대한 요구가 요원의 불길처럼 막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의문사 진상규명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갔는데 3일 만에 20만 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무섭게 번져나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 이 일은 장선생님이 하시는 것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 나는 지방 곳곳을 다니면 강연을 하기 시작했는데 형식적으로는 장준하선생관련 된 강연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장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돌아간다. 지금처럼 친일세력이 나라를 농락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싸움을 하라고 하시는 구나’생각한다.

개묘한 이후 오늘까지는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그 시간 안에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제작했다는 것이 놀랍고 방송이후 국민들의 반향은 대단했다. 종편에서도 출연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메이저 방송이 다루지 않다보니 종편에서 장준하 선생을 오히려 선전해주는 효과가 난 것이다.

장선생님이 과거 유신시절 민주세력을 화합시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YS, DJ 그 두 세력의 만남은 수십 년 동안 꿈도 못 꾸던 것이었다. 주변에서 ‘1967년 장선생님이 신한당과 민중당을 합당해 윤보선과 협력 것 같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과 같이 대를 이어 이것을 합쳐놓았는가.’라는 얘기를 듣는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한 게 아니다. 장선생님이 한 거다.’라고 답변했다. 이렇게 여러 세력이 모이기 시작하니까 수많은 세력과 국민들이 모이고 있다.

정치인들과의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한 바 있다. “여러분은 과거의 잘못은 덮고 넘어갈게 아니라 그 과오를 낱낱이 밝히고 답습하지 않는 현재를 살아가면서 미래를 계획해야한다.”

이 나라는 1%그들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의 나라다. 나라가 더럽다고 떠난 다는 생각은 일종의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관리인을 잘 뽑아야 하고 그 길에 올해 12월 대선이 있다.

어찌됐든 나는 금년 말 대선까지는 장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는 장호권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다.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장선생님이 내리는 지상명령대로 그 날이 될 때까지 올바른 지도자를 뽑는 순간까지 노력할 것이다. 그날이 오게 되면 아마 해방시켜주실지 모르겠다.

편집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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