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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자 박정희가 장준하 의사를 살해했다.

기사승인 2012.09.04  15: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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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동환 목사, “진상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명박도 박근혜도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 장준하 선생(1918-1975)과 문동환 목사(1921- )
'장준하' 하면 나는 '정의의 화신'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내가 장준하를 만난 것은 1943년 봄이다. 나는 동경에 있는 일본신학교 예과에서 1년 동안 공부하다가 신병의 이유로 1년 쉰 뒤 다시 복교를 했더니 장준하가 와 있었다. 해맑은 얼굴에 꼭다문 입을 보며 '알맹이 있는 자'라고 생각하여 우리 둘은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가 '정의의 화신', '행동의 사람'으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 당시 신학교 기숙사에 있는 한 한국인 학생을 중심으로 물의가 생겼는데 장형이 그 학생이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을 알자 곧 기숙사 사감을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당시 장준하게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다. 그들의 사랑이 깊어져서 결혼하기로 생각을 하는데 그 여자 친구의 부모가 반대를 하다는 것이었다. 그 까닭이란 그 여자의 부모는 가톨릭 신자여서 신학생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곧 장형을 찾아가 결혼해 버리라고 권했다. 장거리 연애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당시는 학생들을 학병으로 보내려는 일본 정부의 정책이 구상 중에 있었다. 마침 우리 형제도 일본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과단성이 있는 장형 또한 금방 결정을 하고 일본을 떠났다. 그것이 아마 1943년 가을이었으리라. 그 후 얼마 있다가 우리 형제(문익환, 문동환 형제)도 귀가했다. 만주 간도에 있는 용정으로 말이다.

   
▲ 윗줄 왼쪽부터 장준하, 문익환, 윤동주
귀가한 뒤 나는 장형에게편지를 보내다. 결혼은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얼마 있다가 장형의 아버지에게서 회신이 왔다, 장형은 결혼을 하고 학병으로 중국에 갔다는 것이다.

그 후 장형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것은 해방 뒤 서울로 남하해서이다. 목회하시던 아버지를 공산주의자들이 못살게 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온 뒤 우리 형제는 김재준 목사가 세운 조선신학교(현재 한신대학)에서 1년 공부하고 졸업을 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 문제로 신학교가 다 문을 닫았을 때 김대현 장로의 협조로 조선신학원을 창설한 바 있었다. 조선신학원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지 않다.

그 때쯤 중경에 있던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 요원들이 귀국을 했다. 그리고 그 중에 장준하가 있은 것이다. 나는 명동거리 2층에 있는 자그마한 그의 아파트를 찾아 그를 만났다. “장형!” “문형!” 하고 둘은 껴안았다. 정말 감격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만났다. 동그스럼한 애티있는 얼굴이었다. 그날 나는 그가 어떻게 일본군을 탈출하여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중국군에 가담을 했다가 중경에 있는 김구 선생의 품으로 들어갔는지 거기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 1946년 겨울 서울 우이동 화계사에서 백범뒷줄 오른편이 장준하 선생
그날 나는 장형더러 조신신학원에 입하하여 일단 신학교를 졸업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도 조선 신학교 졸업생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젊은 신학도들로 구성된 '복음동지회'의 일원이 됐다. 그러나 1951년 내가 도미유학의 길에 오르면서 그와의 접촉은 중단되었다. 내가 1961년에 귀국하자 그는 벌써 한국 정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가 감옥에 들락날락 하면서 병원 생활을 할 때 이따금씩 병원에 만나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를 다시 그와 깊은 관련을 다시 맺게 된 것은 그가 박정희 독재 타도를 위한 백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하면서 였다. 내가 종로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사무실에 들렀는데 그가 거기에 와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그는 “문형. 잘 만났어. 여기에 서명을 해줘!” 하는 것이었다.

“몸도 약한데 또 이런 것을 하다가 또 감옥에 들어갈 것이 아니야?” 하고 묻자 그는

“등산을 많이 해서 몸을 나아졌어. 이번에는 무언가 이루고야 말 것이야!”

이렇게 말한 그의 눈에는 확신의 차 넘쳤다. 그러나 그것이 장준하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후 나도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해직 기독교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교회를 만들어 정의를 위하여 고난당하는 이들을 생각하면서 신앙고백을 하고 기원을 했다. 그것이 1975년 8월 초였다.

그런데 1975년 8월 17일 일요일 갈릴리 교회 예배를 미친 뒤 장준하가 경기도에 있는 약사봉에 등산을 하다가 추락사를 했다는 소식이다. 등신을 자주 해서 등산의 도사가 되었다고 뻐기던 그가 추락사를 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더군다나 마음에 결심을 하고 백만 명 서명 운동을 시작한 그가 그런 실수를 할 까닭이 없었다.

그 다음날 나와 나의 형 문익환, 복음 동지회 동지 유관우 등과 같이 약사봉을 찾아갔다. 장형과 같이 등산을 했다는 몇몇 사람의 안내를 받으면서 말이다. 어디에서 어떻게 추락을 했는지를 알아보려고 말이다.

약사봉은 그리 높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 왼편으로 약 70미터나 되는 바위로 된 벼랑이었다, 바위들 틈새 여기저기에 잔 소나무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바람벽은 내려올 길도 없고 내려올 이유도 없는 벼랑이었다. 그 바위 위의 등산로로 가려면 그 밑에 있는 길을 한참 지나 왼편으로 언덕을 올라 돌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행은 얼마 가다가 점심을 먹고 등산길에 올라설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 동행했던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행은 벌써 그 앞을 지나 얼마 먼저 갔고 장형은 뒤떨어져 걸어갔는 것이다. 그러니 장형이 그 바위 위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형이 메고 있던 마호병(안에 유리로 된 물통)도 깨지지 않았고 차고 있던 시계도 그대로 가고 있었고 몸에도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벼랑에서 떨어졌다면 상처투성이 일 텐데 말이다.

그래서 제 형과 복음동지회 동지 유관우가 그 집을 찾아가서 시체를 자세히 검사했다. 상처 난 흔적이란 양쪽 팔꿈치에 파랗게 멍이든 자국이 있고 바른쪽 귀 뒤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끌고 언덕 밑으로 끌고 가면서 귀 뒤의 급소를 타격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그래서 유관우가 가지고 갔던 활동사진기로 그것을 찍어서 장준하 부인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본 장준하 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 남편은 이번에 죽을 각오를 했어요.
신변처리를 완전히 했던 거예요.
중경정부에서 사용하던 태극기를 이화대학 박물관에 기증을 하고
내가 그 동안 미사에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기가 가톨릭 교회에 입교까지 해 주셨지요.“

그 후 이것을 본격적으로 조사하라고 당장 경찰에게 강력히 호소했으나 당국은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문익환 목사가 장형의 장례식 상주가 되었다.

   
▲ 1975년 8월 17일 사고 후 장준하 선생의 시신과 37년이 지난 2012년 8월 장선생의 유골
지금 해골을 보면 그 때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 정확했다. 따라서 이제라도 그 사건의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 이것이 처리되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도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문동환 목사 moon210505@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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