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주석, 시민사회운동의 길을 열다 (5)
▲ 1981. 8 청년Y 하계수련회 / 산청 묵곡수련장 ⓒ장혜란 제공 |
전두환 신군부로 인해 다시 민주주의에 암운이 드리웠을 때 기독교계 일부가 YMCA로 진입하였다. 합법대중운동을 돌파구로 잡은 분들이었다. 인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던 이창식(1) 선배도 그 중 한 분이었다. 그즈음 황주석 선배가 이창식을 찾아갔고, 그가 내어준 「YMCA운동지침서」를 통해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노동현장의 전위로 활동하던 그가 갑자기 YMCA에 들어간다고 하자 동료와 선후배의 날선 공격이 많았다. 치열하게 살았던 황주석의 동지들에게 YMCA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지들의 질타를 뒤로 하고 YMCA에 투신했다.
마산YMCA가 첫 부임지였던 건 우연이었다. 내정되어 있던 분에게 사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황주석 선배가 마산에 첫발을 내디딘 1980년 3월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 5개월 후여서 그에 대한 기대도 안고 있었다.
마산YMCA 간사로 일하게 된 황주석 선배(이하 간사)는 부임 직후 ‘서울에서 소개를 받았다’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아남산업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내가 마산 집에 머물면서 다른 활동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황주석 간사는 자신과 함께 마산YMCA에서 필요한 일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나 역시 YMCA를 운동단체로 생각하지 않은 터라 내켜하지 않았지만, 황주석 특유의 끈질긴 설득에 1980년 4월부터 나도 마산YMCA에서 일하게 되었다.
다음 해인 1981년 11월 민청학련 관련으로 옥고를 치른 이상익까지 합류해 마산YMCA의 실무지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 실무책임자는 문창교회 장로였던 지태영 총무였는데, YMCA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일익을 맡고자 했던 운동권출신 실무자 세 사람을 잘 이해해주고 적절히 보호하며 조직을 원만히 이끌었다.
청년조직에 관심 많아
▲ 로댕클럽 전회원 교육 중 ⓒ장혜란 제공 |
황주석 간사가 집중적으로 공을 들인 대상은 청년이었다. 그가 마산에 오기 전부터 마산YMCA에는 청년동아리들이 있었다. 그중 이념동아리는 하나뿐이었고 그 외는 등산, 음악 등 취미동아리들이었다. 황주석 간사는 이들 기존 청년동아리의 조직을 강화하는 한편, YMCA 운동의 정체성과 운동성을 위해 이념동아리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부임 직후 시행한 ‘마산YMCA시민대학’ 수료생 청년 7명과 논의하여 1981년 2월 11일 ‘로댕’이라는 청년동아리를 탄생시켰다. ‘사회문제를 깊이 생각하며 살자’라는 의미로 정한 이름이었으며 회원 대부분이 현장노동자였다. 창립총회에서 황주석 간사는 이념동아리의 중요성에 대해 강연을 했다. 로댕은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했는데, 주제는 역사, 한국경제, 교육학, 노동, YMCA이념교육, 지도자교육 등이었다.
로댕동아리는 자체수련회와 유적지탐방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회원들을 결속하고 역량을 키워나갔다. 회원 수가 늘어나자 내부에 소조직을 만들어 연합형태의 동아리로 발전시켰다. 로댕은 1990년대 말경까지 20여 년간 다양하고 왕성하게 활동했던 마산YMCA의 대표적인 청년클럽이었다.
70년대 중반 가동되기 시작한 창원공단에는 직장을 찾아 전국각지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는 5년 간의 군수 및 기간산업 근무를 조건으로 병역특례를 받은 청년도 많았다. 병역특례자들은 2년간 연 3주의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그 훈련과정에서 알게 된 20~30명의 청년들이 친교모임 ‘창우회’를 조직해 서로 교류하고 있었다. ‘창우회’는 ‘창원에서 만난 친구들의 모임’이란 의미다.
친교모임이었던 창우회 회원들은 YMCA회원이었던 한 분의 제안으로 1980년 말 마산YMCA 회관을 방문해 황주석 간사를 만났다. 상의 끝에 월례회 등 창우회의 집회공간으로 YMCA 회관을 사용하기로 했고, 즉석에서 15명이 YMCA회원으로 등록하였다. 그 후 창우회는 자연스럽게 마산YMCA 청년동아리로 등록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회원들이 창원공단 17개 사업장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락망 체계나 조직 동원이 유리해 다양한 대형행사를 많이 치렀다. 가장 돋보였던 행사는 1981년 9월 26일 제1회를 시작으로 1986년 제6회까지 개최한 공단예술제였다. 창우회는 마산Y 창원지회의 출범과 프로그램에 큰 힘이 되었고 1995년 창립한 창원YMCA에서도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확대되는 조직, 넓어지는 활동
▲ 2001. 2 마산YMCA 시민논단 강연 ⓒ장혜란 제공 |
황주석 간사로 인한 마산YMCA의 변화는 컸다. 그는 마산YMCA 부임 3개월이 지난 1980년 6월 20~21일 이틀 간 경남 창녕부곡온천장에서 전국 중소도시Y 총무와 프로그램 간사들을 초대하여 노동문제중심의 「중소도시YMCA 프로그램개발을 위한 워크숍」을 주관하였다. 며칠 뒤인 6월 27일에는 회관에서 회원운동체로서의 YMCA로 자리 잡기 위한 회원교육을 시행하였다. 교육과 친교를 병행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외에도 그로 인해 다양한 프로그램이 도입되었고,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의식교육도 많이 시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산YMCA가 대중조직으로서의 기틀을 잡기 위해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고 판단, 이를 위해 마산YMCA합창단 창단(1982. 6. 10) 등 시민 누구나 호감도가 높은 문화예술 쪽에도 관심을 많이 두었다.
황주석 간사는 마산YMCA의 미래를 끌어갈 지도력을 키우기 위해 YMCA활동을 통해 성장한 젊은 층을 이사로 영입하는 데도 힘썼다. 81년 총회 직후 이사회에 ‘청년이사’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여 논의 후 허정도(전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를 이사로 선임하였고, 이어서 82년 김창기, 83년 김종대, 89년 이용규 씨를 이사로 선출하였다. 이 중 김창기 씨 외 세 사람은 이후 마산YMCA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장래 YMCA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대학Y에 공을 많이 들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훗날 마산YMCA 제5대 총무(현 사무총장)를 하게 되는 마산대학 행정학과 학생 이영환이었다. 이영환은 동료 10여 명과 함께 소위 의식화 교육을 받았다. 가르친 이는 황주석, 정혜란 두 간사였다. 이영환은 2학년 때인 1981년 ‘마산지역 대학Y연합회’를 발족시키고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훗날 이영환은 “원래 꿈은 교사였지만 YMCA 간사를 택한 것은 황주석 간사의 설득 때문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조직 강화에 힘쓴 황주석 간사의 성과는 컸다. 1982년경 마산YMCA 회원조직은 청년클럽 7개 186명, 사랑의Y노동형제단 소조직 10개 70명, 대학Y 6개 109명과 연합회, 고교Y 9개 328명, 어린이Y 3개 78명, 이 외에 마산YMCA 중등교사회 17명, 자모회Y 44명, 노인Y 42명, 와이즈멘 3개 클럽 회원 62명 등도 있어서, 마산YMCA에 속해 활동하는 회원이 모두 936명, 동아리는 40여 개나 되었다.
▲ 2002. 5 마산YMCA 촛불대학에서 강연 ⓒ장혜란 제공 |
1980년, 황주석 간사는 노동자교육 외에 일반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교육프로그램을 구상 착수하였다. 목적은 시민의식화였고 프로그램은 교양강좌, 시민대학, 공개강좌 등이었으며 그가 부임했던 1980년부터 시작하였다. 사회문제를 주로 다룬 시민대학은 황주석 간사가 담당하였으며, 교양강좌는 내가 맡았다. 시민대학의 교육기간은 2주간에 걸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0회 강의였다. 주로 사회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내용을 담았다.
한 해에 두어 차례 진행하였으며 보통 30~40명이 참석하였다. 대상은 신분, 나이, 성별 구분 않고 다양하였다. 강사는 지역의 교수와 언론인 등 전문가들이었다. 교육수료자들 중 다수는 회원조직으로 연결되었다. 이 분들 중 다수가 이후 마산YMCA 회원, 위원, 이사로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 노인대상 경로대학과 주부대학도 개설되었는데 경로대학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981년 한국YMCA는 교육민주화라는 역사적 소명으로 ‘YMCA중등교육자협의회’를 각 지역에 결성하였다. 합법적이며 국제조직인 YMCA가 수십 년 묵혀온 독재정권의 관제교육 틀을 깨기 위한 시도였다. 마산에서는 1981년 12월 마산YMCA 중등교육자협의회가 창립되었다. 회장은 마산여상 김용택 선생님이었고 황주석 간사가 당연직 총무를 맡았다.
황주석 간사는 YMCA를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부응하는 시민운동체로 성장시키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이념과 지도력을 후배들에게 전수시켰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이영환, 이종호, 박성철 등이 마산YMCA 실무자로 헌신한 것이 그 열매다. 그 운동성은 윤경태와 차윤재를 거쳐 이윤기 사무총장으로 이어져 마산YMCA의 사회운동에 대한 지향성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아기스포츠단의 자모들을 생활운동체로 조직하자는 그의 아이디어 ‘등대’는 마산YMCA에서만도 그간 30여개 3백여 명이 거쳐 갔고 지금도 10개 등대에 5~60명이 활동 중이다.
한국현대사의 대전환기였던 80년대를 거치면서 마산YMCA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이라는 그 시대가 요구했던 자기역할을 할 수 있었고 그 정신은 지금도 계속된다. 기본속성과 조직구성에서 가질 수밖에 없는 보수성에도 불구하고 마산YMCA가 시민운동체로서 제 모습을 지킬 수 있는 까닭은 대중적 기초공동체운동의 새로운 비전을 품고 YMCA 운동에 헌신하는 실무자,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이사와 위원들, 무엇보다 YMCA를 통해 훈련되고 의식화된 회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황주석이 뿌린 씨앗의 열매다.
1982년 8월, 그는 수원YMCA로 떠났지만 첫사랑이었던 마산YMCA와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시민논단·회원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2000년부터 무려 16년간 직을 맡았던 차윤재 사무총장을 천거해주기도 했다.
몇 가지 기억
▲ 1981. 7 전국 대학Y 임원수련회 / 의정부 다락원캠프장(맨 앞줄 오른쪽 네 번째가 황주석 간사) ⓒ장혜란 제공 |
황주석 간사님은 내가 보아왔던 이른바 운동권 사람들의 경직된 모습과 달리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예의바른 분이었다. 재정형편이 좋지 않아 수익성프로그램으로 에어로빅, 꽃꽂이 등 별의별걸 다 진행했는데, 포스터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거리에 나가 부착하는 일까지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하셨다. 내가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떤 일이든 군말 않고 열성적으로 하는 모습이 참 좋다’고 칭찬해주시던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한 번은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 대상 강좌를 계획한 후 홍보방법을 고민하고 있는데, 황 간사님이 명함만한 크기의 홍보쪽지를 만들어 노동자들 출근 때 나눠주자고 제안하였다. 간사님 말대로 그렇게 해봤더니 순식간에 노동자들에게 홍보지가 전달되어 성공적으로 행사를 알렸다. 포스터를 부착하거나 라디오 홍보만 알고 있던 내게 그 방식은 매우 기발하고 인상적이어서 그때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가 황주석 간사님께 배운 것은 삶의 태도이다. 늘 씩씩한 모습으로 운동에 임했고, 진정성 가득 담긴 쉬운 말로 ‘우리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이들이 그런 황주석에게 마음 문을 열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이해하였고, 달라지는 사회적 환경에 적응하였으며, 그 변화에 맞춰 자신의 이상을 기획하여 실행하고 평가하며 새로운 운동방향과 활동을 고민하였다. 특히 당시 매우 경직되어 접근이 쉽지 않았던 노동운동을 대중운동방식으로 폭넓게 펼치려 했던 시도는 신선하였다. 그런 점에서 YMCA라는 공간이 그에게 유용했던 것이다.
미주 |
(1) YMCA에 진입한 운동권 1세대이다. 한국YMCA전국연맹 시민사업부장 및 성남·목포·안양·부천YMCA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
정혜란(전 창원특례시 부시장)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