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자만 박사의 《도마복음》 풀이 (31)
▲ 이분법에 의해 나누어지는 나와 너라는 허상을 벗어버리면 나와 너는 둘이 아니기에 내 몸 같이 사랑할 수 있다. ⓒGetty Images |
예수는 ‘네 형제들을 네 목숨처럼 사랑하고 네 눈동자처럼 보호하라’고 말씀하셨다.(도마복음 25) |
자타(自他), 주객(主客)의 분별이 사라진 하나의 진리(생명)를 깨닫게 될 때 형제들을 목숨처럼 사랑하고 눈동자처럼 보호하게 된다(同體大悲, 마 12:50). 성 요한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깨닫지 못한 어둠에 있는 자요”(요한1서 2:9)라고 하여 우주에 충만한 ‘생명의 빛’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사물의 입자들은 상호 간에 그물망처럼 얽혀져 있는 하나이며(양자물리학), 일체의 생명은 동일률(同一律)의 생명이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형제를 진정한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며, 형제의 불행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惻隱之心, 맹자).
성경은 ‘하나님, 예수 그리고 인간이 모두 하나다’(All is One, 요 17:21)라고, 불경(佛經)은 ‘마음, 부처, 중생이 모두 하나다’(화엄경)고, 엑카르트는 ‘하나님의 근거와 인간 영혼의 근거는 같다’고 하여, 모두가 평등 무차별한 ‘하나의 생명’임을 설명하고 있다(一味平等). 우리는 허상인 ‘개체적 육(肉)’의 ‘나’(ego)를 죽이고, 실상인 보편적 영(靈)의 ‘나’(참나)로 부활하도록 하여야 한다(고전 15:44).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神性)은 전체성이며 사랑이다. 성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1서 4:8)고 한 것은 신을 체험한 그가 본질로서 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고백한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위대한 사랑의 행위(無我)는 ‘나와 너’의 구별(ego)을 멈추게 하며, ‘하나의 생명’으로서 절대 자유와 기쁨을 누리게 한다(無主相布施, 금강경). 신(One)은 다른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전체로서 하나의 생명이며 진리이다. 우주 전체가 바로 신(부처)의 몸이라고 하는 하나의 광대무변한 생명 덩어리이다(十方如來法界身, 갈 3:20). 신유학(新儒學)의 장재(張載)는 ‘모든 인간은 나의 형제요, 자매이며 모든 만물은 나의 동료다’고 하였다. 우리가 모든 영혼을 1인칭 단수(‘나’)로 체험할 때에만 진정한 사랑, 곧 타자가 없는 사랑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본래 모든 곳에 계신 신과 하나 즉, 신(부처)임을 자각하게 되면(本來是佛, 요 10:34) ‘너와 나’가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自他不二), 모든 사람이 본래 불생불멸하는 신(부처)으로서 이미 구원받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는 ‘모두가 다 하나다(All is One)’고 하는 ‘하나의 생명’을 깨닫도록 기도하셨다(요 17:21). 나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고, 나의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다른 누구 아닌 나를 미워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주는 ‘하나의 생명 에너지’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에너지가 집적된 형태가 물질이고, 에너지가 약한 부분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내 버리라”(마 5:29-30)고 말씀하셨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있다고 보는 이원성인 ego의 눈을 빼어버리면 너와 나가 하나인 ‘생명의 눈’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별하는 육적인 ‘나’(거짓 나)의 손을 찍어버리면(無心), 무분별하는 영적인 ‘나’(참나)의 손이 나타난다. 예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고 한 것처럼 모든 사람은 같은 근원에서 나왔으며, 신의 현존 안에서 자신의 카르마(業)에 따라 자신의 길을 간다. 모두는 때가 되면 행위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의 생명‘(참나)으로 돌아와 사랑과 자유를 누릴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라고,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감각으로 보는 것은 거짓이며, 순수한 이성(logos)로 보는 것만 진실이다”라고, 현대 물리학자들은 ‘모든 것은 에너지의 파동(우주의 氣)이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며(諸法空),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실상인 하나의 생명이다’(眞空妙有)라는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참나)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모든 사람을 자기 자신의 참 생명(참나)으로 볼 수 있다면,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大慈大悲, 눅 10:27).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은 ‘모두가 다 하나이며’(요 17:21), ‘오직 생명뿐이다’(生命一元論, 요 10:34)고 하는 하나의 진리이다. 오직 ‘하나의 생명’만 존재하기에 나의 생명(참나)인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의 겉 모습은 서로 다르되 둘이 아니다(而二不二). 형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생명(참나)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깨달아야 할 둘이 아닌 진리이다. 다석 유명모(多夕 柳永模)와 플로티누스는 ‘하나의 생명’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과 합일하며, 또한 모든 인간과 합일하게 된다는 ‘신비적 합일(合一)’을 주장하였다. 깨달음으로 ‘마음의 눈’(靈眼)을 뜨게 되면 그대의 몸은 생명의 빛으로 가득 찰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어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마 6:22-23). 하나인 빛의 자리를 깨달은 자는 육(肉)의 ‘나’(ego)가 죽고, 동시에 불멸인 영(靈)의 ‘나’(참나)가 살아난 것이며(고전 15:44), 가장 높은 영적인 성취이다.
구자만 박사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