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setNet1_2

전쟁을 보는 미술의 눈

기사승인 2025.01.11  03:46:17

공유
default_news_ad1

- 전쟁터로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시대가 묻고 미술이 답한다》 2

▲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 캔버스에 유채, 268x347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내가 군대에 갈 때 아버지는 훈련소까지 따라오셨다. 혼자 갈 수 있다고 만류하는데도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전쟁을 극도로 싫어하신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 가는 것에 대하여 몹시 억울해하셨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3년씩이나 청년들을 묶어두는 세상 질서에 대하여 분해하셨다. ‘그래도 군대에서 배울 것이 많다’며 아버지를 위로하였지만, ‘세상 물정 모른다’며 핀잔만 들었다.

아버지는 손자가 군대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며 달라지지 않는 세상을 슬퍼했다. 아들이 군대 가는 날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나는 동네 햄버거 가게에서 아들을 배웅하였다. 아들은 고속버스를 타고 여행 가는 것처럼 그렇게 훈련소로 떠났다. 뭔가 인생에 중요한 단서를 말해주었을 법도 한데 ‘건강히 다녀오라’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아버지처럼 모질지를 못했던 것일까!

전쟁을 주제로 그린 예술 작품들이 많다. 예술도 시공간에 존재하는 만큼 인류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인 전쟁을 비켜 갈 수는 없다. 화가들은 총 대신 붓을 쥔 애국자이거나 불의한 전쟁을 비판한 평화주의자들이 대부분이다. 고야(1746~1828)는 <1808년 5월 3일>(1814)과 <1808년 5월 2일>, 그리고 82점의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1810~1820)를 통해 프랑스 군대의 무자비한 학살을 숨김없이 보여준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는 <키오스섬의 학살>(1824)을 그려 오스만튀르크의 야만성을 폭로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들을 잃은 케테 콜비츠(1867~1945)는 조각 <피에타>(1937)와 판화 <어머니들>(1923)을 통해 반전운동의 기치를 들었다. 피카소(1881~1973)의 <게르니카>(1937)는 독일군의 폭격에 의한 참상을 파리 만국박람회를 통해 고발하였고, <한국에서의 학살>(1951)을 그려 한국전쟁의 참혹을 세상에 알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장 참혹한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에서도 김환기의 <피난열차>(1951),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1954) 등이 있다. 전쟁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은 무모하다.

화가 이동표(1932~)는 황해도 해주미술학교에서 소련 유학을 준비하다가 인민군에 징집되었다. 전쟁은 한 예술학도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전쟁 때 미군의 포로가 되어 이번에는 국군이 되었다. 지금은 고향을 닮은 경기도 양평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통일에 대한 목마름으로 평화를 그리고 있다. 그는 캔버스에 자신을 실향민이라고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케테 콜비츠, 「어머니들」 (목판화, 28.6x33.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6.25 50주년을 맞아 그린 <일인이역, 골육상잔>(2000)에는 38선에 총을 든 국군과 인민군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인상은 다르지만 한 인물이다. 인민군과 국군의 이력을 가질 수밖에 없던 시대의 아픔이 캔버스에 가득하다. 자신이 인민군이었고, 자신이 국군이었다는 화가의 자기 경험에서 나온 이 그림이 평화와 통일을 추구하는 시대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라도 그 시대에는 인민군이 되어야 했고, 국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굴레였다. 지금도 그렇다. 국군은 내 자식이고 인민군도 내 골육이다. 다소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러시아 화가 미하일 쿠가츠(1939~ )의 그림이 갤러리 <까르찌나>에서 전시(2025. 1. 8~2025. 3. 2)되고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쿠가츠는 수리코프 미술대학을 졸업하였다(1962). 이 대학의 본래 이름은 모스크바 미술학교(1843)였는데 1948년에 이동파 화가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의 예술정신과 사실주의 화풍을 잇고자 이름을 바꾸었다. 1870년에 변방의 민중들에게 사회 변혁 의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결성된 이동파 미술은 주제가 선명하다. 캔버스에는 이야기가 채워있다. 그래서 쿠가츠의 그림에서 19세기 말 이동파를 읽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그의 작품 <전쟁터로>(2020)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를 그렸다. 아내와 어린 아들은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를 배웅한다. 비가 오는 흐린 날이었지만 누구도 우산을 쓰지 않았다. 전쟁은 우산 하나로 가릴 수 있는 작은 불행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전쟁터로 향해가는 남자의 발걸음이 무겁다.

아버지는 창가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식탁에는 두 개의 빈 유리잔이 놓여있다. 방금 전 아버지와 남자는 그 잔에 담긴 독주를 마셨다. 러시아인들은 헤어질 때 독주를 마시고 그 잔을 깬다. 불운을 깨트린다는 일종의 미신이다. 하지만 식탁의 유리잔은 깨지지 않았다. 미신으로 털어낼 수 없는 현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전쟁은 한갓 미신으로 극복할 수 없는 큰 불행이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1707~1778)는 현존하는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이름 붙였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하는 사람’이다. 2022년 2월에 시작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벌써 3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애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다. 번성하던 도시는 파괴되었고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사회기반시설은 무너졌고 사람들은 정신적 외상으로 괴로워하며 생태계는 몸살을 앓고 있다. 먼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남한과 북한은 저마다의 이익을 위해 전쟁에 직간접으로 관여하고 있어 민족 갈등이 한층 깊어졌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그의 부하들이 북한을 자극하여 국지전을 유도하여 비상계엄 명분을 만들려고 하였다’는 뉴스를 들으며 아연실색하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였던가. 어찌 이런 무모한 일을 획책할 수 있을까? 전쟁에서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쟁을 하지 않는 일이다.

최광열(기독교미술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4
default_side_ad1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etNet2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