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43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의 《교회의 바빌론 유수》 그 세 번째 시간입니다.
참회의 성사(고해 성사)
루터는 이미 여러 논문과 논쟁서들을 통해 참회의 성사를 상세하기 비판했지만, 여기서 짧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러 성사들 가운데 특히 성찬식보다 결코 덜하지 않게 만연한 고해성사의 폭압을 루터는 여기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성사는 이익과 혜택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목자들의 탐욕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상대로 믿을 수 없는 열성으로 이들 성사 안에서 맹위를 떨친다고 합니다.(1)
사제들이 참회의 성사의 성서적 전거로 악용한 것은 마태복음서 16장과 18장의 말씀,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과 요한복음서 마지막 장에서 하신 말씀,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제들은 이 말씀을 강압과 폭력을 통해서 자신들의 폭압을 멀고 넓고 깊게 확장하는 데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어떤 이들은 하늘의 천사들 위에 서서 명령하며, 믿을 수 없이 터무니없는 사악함으로 큰소리치기 시작했으며, 자신들이 하늘과 땅을 다스릴 권한을 얻어 하늘에서도 맬 수 있는 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했습니다.(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명하셨던 것은 권한이나 권력이나 지배력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서 섬기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고 루터는 상기시킵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는 권세에 대한 언급이라고는 전혀 없고, 오직 죄를 사해주는 사람의 봉사 직분이 있을 뿐입니다.(3)
그런데 사제들은 그들이 전복시켜온 언약과 믿음의 자리에 다른 것을 두었는데, 예컨대 그들은 참회를 세 부분, 곧 뉘우침, 고백, 보속으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그들은 약속에 대한 신앙보다 뉘우침이 선행하고 훨씬 더 우월하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통회가 신앙의 행위가 아니고 공로인 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행위에 집착하고 또한 성경 구절에 있어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뉘우침과 마음의 겸손함 때문에 용서를 얻었던가를 보여주는 구절들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뉘우침과 애통하는 마음을 낳는 신앙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4)
물론 깊이 뉘우치는 마음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약속과 벌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이 있는 곳에서만 오직 발견된다고 루터는 생각합니다. 믿음을 갖게 되면, 통회와 위로는 스스로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지요.(5)
그런데 탐욕과 권력의 주요한 작업장이 되었던 것은 고백과 보속이라고 루터는 말합니다. 고백이 필요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1장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현행 개별적 고백이 성서에 의해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루터는 진심으로 그것을 지지합니다. 그런 제도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괴로운 양심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치료제이기 때문입니다.(6)
고백에 있어서 루터가 증오하는 것은 한 가지인데, 이런 종류의 고백이 교황들의 독재와 착취에 시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밀스러운 죄들까지도 자신들에게 독점적으로 남겨 두기도 하고, 또는 그것들이 자신들에 의해 지명된 고해신부들에게 알려지도록 명합니다. 이런 것의 결과는 오직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힐 뿐이기 때문입니다.(7)
끝으로 루터는 교황과 사제들이 얼마나 적절하지 않게 보속을 다루는지 이미 면벌부에 관한 논쟁에서 충분히 보여주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다만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몸과 영혼이 파멸에 이를 정도로 보속을 지독히 남용해 왔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보속에 대해 계속해서 지겹도록 지껄이고, 그 필요성을 너무나 강조해서,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8)
심지어 그들은 칙령을 발표하여, 참회자가 부과된 보속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모든 죄를 다시 반복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고 루터는 비판합니다.(9) 그들은 뉘우침보다는, 그들 앞에 놓여 있는 보속을 완수하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지요.(10)
견진 성사
루터는 안수함으로써 견진 성사를 베푸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온 것이 놀랍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셨고(막 10:16), 사도들도 그것에 의해 성령을 나누어 주었으며, 또한 교회 일꾼들을 임명하고(행 6:6), 병자들을 치유하였음을(막 16:18)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딤전 5:22)고 했다는 것을 루터는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이 7가지 성사를 문제 삼는 것은 그것들 가운데 성서에 의해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11)
성사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인데, 이 안에 견진 성사가 들어갈 어떤 이유도 우리는 발견할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견진 성상에 관한 언약을 주셨다는 것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에 루터는 이런 것들을 믿음의 성사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과 연결된 신적 약속이 없기 때문입니다.(12)
혼인 성사
결혼은 성서의 최소한의 뒷받침도 없이 성사로서 간주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성사로서 찬양하는 전통 자체가 그것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루터는 지적합니다. 우리가 읽는 성서 어디에서도 혼인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혼인 안에는 신적으로 제정된 어떤 표지도 없고, 또한 결혼이 어떤 것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내용을 성서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습니다.(13)
더욱이 혼인은 세상이 생긴 이래 존재해 왔고,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서도 행해지기 때문에, 왜 그것이 신약의 성사요, 교회만의 성사로 불려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결혼한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사악한 사람들이 있고, 어떤 이교도보다도 더 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왜 그들의 경우에 혼인이 성사로 불리어야 되고, 이교도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하는지 루터는 의문을 제기합니다.(14)
혼인을 성사로 주장하는 사람이 흔히 내세우는 성서적 전거는 에베소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헵 5:31)라고 한 말입니다. 루터는 이런 주장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천박함과 성경에 대한 부주의하고 생각 없는 이해를 드러낸다고 합니다. 성경 전체 어느 곳에서도 이 성사라는 단어는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의미에서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15)
성사라는 단어가 성서 어디에서 쓰이든지, 그것은 신성한 것을 가리키는 표지를 뜻하지 않고, 다만 신성하고 은밀하며 감추어진 것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라고 말할 때,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mysteries of God)은 곧 성사(sacraments of God)입니다. 우리가 불가타 성서에서 보는 ‘사크라멘툼’이라는 단어는 성서의 그리스어 원어로는 ‘미스테리온’인데, 그 말을 번역자는 때로는 자신의 버전으로 번역하고, 때로는 그리스어 형태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앞서의 구절,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1-32)는 그리스어를 따른 것입니다.(16)
따라서 바울의 글 안에서 성사 곧 비밀은 성령의 지혜이며, 고린도전서 2장에서 말하듯이 은밀한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데(고전 2:7),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분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17)
그런 의미에서 루터는 혼인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이나 신적으로 제정된 성사는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혼인 성사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단어와 그와 관련되는 것들에 대한 무지에 의해 적용되고 고안했을 뿐입니다. 이런 무지는 그것이 신앙과 충돌하는 것이 아닌 한 관대하게 교회 안에서 품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들은 교회의 사람들에 의해 고안되어 온 것들과 정확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고 루터는 주장합니다.(18)
루터는 당시 고해사제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된 책, 《숨마 안젤리카(Summa Angelica)》(이 책의 원제는 《양심의 모든 경우들에 관한 총론서》)(19)가 천사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마보다 더 악한 총론서라고 비난합니다.(20) 이 책에는 결혼에 대한 18가지의 장애물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 장애물들은 결국 사람들이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올가미를 놓는 것, 또는 결혼을 무효화하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21)
루터는 이런 규범들을 통해서 로마의 학자들이 장사꾼이 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이 파는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은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이고, 이 장사는 탐욕과 신앙 없음을 통하여 더럽고 음란하게 자라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물신의 중재를 통해 합법화되지 못하는 장애물은 없기 때문입니다.(22)
루터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는 말씀에 근거하여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 주는 것은 하나님의 법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것이 인간의 법과 충돌할지라도 구속력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황이나 주교, 교회 법률가가 결혼을 무효화시킨다면 그런 사람은 적그리스도라고 합니다.(23)
그러나 성서에도 혼인이 금지되는 경우가 있는데, 2촌의 혈족관계만 금지됩니다. 레위기 18장에 의하면, 사람이 혼인할 수 없도록 금지된 열 두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곧, 그의 어머니, 의붓어머니, 친누이, 이복 자매, 손녀, 고모, 이모, 며느리, 형제의 아내, 처제, 의붓딸, 숙모가 그들입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일촌의 친척 관계와 이촌의 혈족 관계만이 혼인 관계에서 금지되어 있습니다.(24)
그러나 이것도 예외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면밀한 검토에서 보여지듯이, 형제자매의 딸, 곧 여자 조카는 비록 2촌의 관계이지만 금지에서 제외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혼인이 이 범위 넘어서 약속되었다면, 인간이 만든 법 때문에 그것이 취소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혼인이라는 것 자체는 어떤 다른 규범보다도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합니다. 그러므로 혼인이 법 때문에 무효화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법이 혼인 때문에 파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입니다.(25)
그런데 《숨마 안젤리카》는 결혼 제한에 대한 터무니없는 규정을 제시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씩 그 규정들을 논박합니다. 첫째는 어떤 남자가 그가 세례를 베풀거나 영적 후견인(대부)으로 섰던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규정을 논박합니다.(26)
둘째, 세례받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장애물에도 루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상대방이 결혼 후 그리스도인으로 전향하겠다는 조건에서도 그들은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루터는 강하게 논박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이교도인 파트리키우스와 결혼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말입니다.(27)
셋째, 약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게 되면 그의 이전 약혼은 무효화된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한 여인과 약혼을 했던 그 남자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속하지 않으며, 이런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법의 규정에 따라, 그는 그 약혼녀에 속한다고 주장합니다.
넷째, 그들은 성직 서품이 이미 약속이 이루어진 혼인도 파기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들이 자신의 조항들을 하나님의 명령 위로 끊임없이 드높이는 것을 비난하면서, 부제나 사제, 또는 주교나 다른 어떤 성직자의 결혼은 무효화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사제와 그의 부인 사이에는 하나님의 계명에 의해 공인된, 참되고 깨질 수 없는 혼인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28)
다섯째, 그들은 허구적인 고안물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공적인 품위’라는 장애물이 그것입니다. 그런 조항에 의해 약속된 혼인이 파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은 공적인 품위에 관한 판단이 아니라 공적인 판단에 대한 무지라고 루터는 비난합니다.(29)
루터는 몇 가지만을 제외하고는 공적으로 약속된 혼인을 정당하게 파기할 수 있는 어떤 장애물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루터가 생각하는 정당한 장애물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요? 루터가 생각하는 정당한 장애물은 성적인 불능과 이전에 공적으로 약속된 혼인에 대한 무시, 그리고 순결 서약이라고 합니다.
성적인 불능의 경우, 한 여자가 성적으로 불능한 남자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법정에서 남편의 성적인 불능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할 경우, 그러나 그녀가 자녀를 갖기를 갈망하고 또는 계속 절제하면서 살 수 없다고 할 경우, 루터는 그녀에게 남편과 이혼할 것을 요구하라고 충고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 이를테면 남편의 형제와 성관계를 가지고 이 관계는 비밀로 지키되, 아이들은 그 아이들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에게로 돌리라고 충고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런 여인은 구원된 상태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그것입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그 남자의 성적 불능과 관련된 실수와 무지가 그 결혼에서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법의 폭압은 이혼을 결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남자는 그녀의 권리를 인정해야만 하고, 겉보기에만 그에게 속한 그 부인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30) 루터의 놀라울 정도의 개방성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남편이 그녀가 간통을 저지르도록 허락하기보다 오히려 이런 이혼에 동의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루터는 그녀에게 다른 이와 혼인을 약속하도록 충고하고 알려지지 않은 먼 곳으로 달아나라고도 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31)
그 외에 이혼에 대해서 루터는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루터는 이혼을 몹시 싫어하기에 차라리 이혼보다는 중혼을 선호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2)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혼을 허락하시되 오직 부정의 경우에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이 말씀을 근거로 교황이 다른 어떤 경우에 이혼을 허락할 때마다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큰 의문을 제기하는데, 왜 어떤 남자가 이혼에 의해서 부인과 갈라진 후에도 결혼하지 않은 채 살라고 강제하는지, 왜 그들은 그가 재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그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잘못도 없이 재혼하지 않고 살도록 강요되는 사람들, 다시 말해 부인이나 남편이 그들을 버리고 달아나서 10년 후나 돌아올 수 있고 또는 아마도 결코 돌아오지 않을 그런 사람들에게 재혼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루터는 고민합니다.(32)
미주 |
(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전경미 역 (서울: 키아츠, 2021), 164. (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65. (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66. (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69. (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70. (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74. (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75. (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81. (9)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82. (10)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83. (1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87. (1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89. (1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1. (1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2. (1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3. (1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3. (1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5. (1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8. (19) 저자인 안젤로 카르레티 디 치바소(Angelo Carletti di Chivasso, 1411-1495)의 이름을 따서 ‘안젤루스 전집’이라고 불린다. (20)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99. (2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0. (2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1. (2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3. (2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4. (2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5. (2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5. (2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07. (2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11. (29)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12. (30)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15. (3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16. (3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219. |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