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42
▲ 교황권에 바탕을 둔 교회가 세례를 오염시켰다고 루터는 강하게 비판했다. ⓒGetty Images |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마틴 루터의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 대해 계속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례 성사
루터는 유아 세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세례 성사가 만일 오직 성인들과 노인들에게만 주기로 되어 있었다면, 아마도 욕심과 미신이라는 폭군 앞에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세례 성사가 간직하기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2)
왜냐하면 사제들이 세례 성사를 위한 준비라든지 품위라든지 거리낌과 제한들을 고안해서 돈을 끌어모으기 위한 올가미로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당시 양피지 값이 비싸듯이 그렇게 높은 가격으로 세례의 물을 사제들이 팔아먹었을지도 모른다고 야유합니다.(2)
교황과 사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참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그런 일을 해야 하는데(3), 오히려 교황에게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그런 것을 행하지도 않으며, 이사야서 56장의 말씀처럼, ‘주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한다.’(사 56:10-11)고 루터는 날카롭게 비판합니다.(4)
그렇다면 세례 성사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막 16:16)라는 신적인 약속입니다. 바로 ‘이 약속이 모든 화려한 행위들, 서약들, 수도회들, 인간이 도입한 다른 모든 것들보다 단연코 앞서서 세워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약속에 우리의 모든 구원이 달려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5)
그리고 ‘한 번 우리에게 선포되었던 이 신적 약속의 진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계속되듯이, 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그침이 있어서는 안 되며, 세례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약속을 계속하여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죽을 때까지 키워지고 강화되어야 한다.’고 합니다.(6)
루터는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성사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행위가 따라오고, 믿음이야말로 사실 모든 행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고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7)
루터는 또 성사를 집전하는 인간과 성사를 만드신 하나님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분명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세례를 행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실 세례를 베푸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그 자신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하기 때문에 그가 세례를 베푼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의 손을 통해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마치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그분 자신의 손으로 우리에게 세례를 베풀고 계시는 듯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8)
성만찬에서 제기되었던 것과 같은 질문이 있는데, 악한 성직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경우, 그것도 참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세례가 사람의 이름으로 집전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집전되는 한, 어떤 방식으로 행해지든지 참으로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9) 왜냐하면 세례의 능력은 그것을 주는 사람의 신앙이나 사용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받는 사람의 신앙과 사용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10)
세례 성사에서 고려되어야 할 두 번째 부분은 표지, 즉 성사입니다. 세례라는 명칭이 유래한 그리스어 ‘baptizo’는 ‘나는 잠기게 하다’(나는 침례를 베풀다)는 뜻이고, ‘baptisma’는 ‘잠금(침수, 침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사’는 ‘효과적으로 나타낸다.’라고 말해집니다.(11)
그런데 다수의 사람들이 말씀과 물에는 어떤 감추어진 영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해 왔고, 그런 것들이 세례를 받는 사람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일하시도록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를 부인하여 성사들 안에는 어떤 능력도 없고, 다만 은혜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이 동의하는 바는 성사들이 은총의 ‘효과적인 표지’라는 것입니다.(12)
그러나 루터는 이런 견해들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약속과 믿음을 떼어놓고 성사의 효력을 추구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고, 정죄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13) 그리스도는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믿음이란 성사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믿음은 성사가 없어도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4)
루터는 세례의 의미를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그러나 죽음과 부활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죄에 대한 죽음과 은혜의 삶을 가리키는 비유적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실제적인 죽음과 부활로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15) 세례는 무엇보다도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16) 세례는 우리가 완전히 죽고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는 것이, 세례가 죄로부터 깨끗하게 씻겨지는 우리의 존재를 뜻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비록 세례의 집전은 곧 끝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아니, 우리가 마지막 날 부활할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입니다.(17)
세례의 유효성은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자포자기하거나 세례가 지닌 구원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세례는 결코 소용없게 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잠시 세례의 표지로부터 벗어나 방황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표지가 무력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 성사를 통해 세례를 받았지만, 계속하여 신앙을 통해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루터는 지적합니다. 계속해서 세례를 완성해 갈 필요가 있고, 마지막 날 우리가 그 표지를 완벽하게 성취할 때까지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8)
교황권 비판
그런데 문제는 로마의 교황이 그리스도인이 가진 영광스러운 자유와 세례에 대한 이해를 포로로 삼았다는데 있습니다. 교황은 자신의 칙령과 법으로 그리스도인을 억누르고, 자신의 폭군적 힘으로 억류하면서 올가미를 씌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도대체 교황이 무슨 권리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법을 부과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교회는 이미 행위와 의식과 관련된 끝없는 규례들로 질식 상태에 있고, 세례의 힘과 세례의 올바른 이해가 무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19)
루터는 교황도 주교도 또한 어떤 다른 사람도 그리스도인에게 그의 동의 없이는 규례의 한 음절도 부과할 권리가 없다고 천명합니다. 만약 누가 그렇게 한다면 폭압의 영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20) 교황이 칙령들을 통해 기도, 단신, 기부금 등 수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악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자유를 거슬러 죄는 짓는 것인데, 당대의 성직자들은 재목과 돌, 땅과 수익을 맹렬하게 수호함으로써 이슬람교도들보다 더 악한 짓을 한다고 루터는 비난합니다.(21)
교황과 성직자들은 마태복음서 16장의 말씀, “네가 무엇이든지 매면…”(마 16:19)에 근거해서, 오만하게도 교황에게 규례를 만드는 권한을 돌립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본 뜻은 온 교회를 억류하여 법으로 그것을 억압시키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죄를 매고 푸는 것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폭력적으로 왜곡하고 전도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22)
루터에게 교황권은 바빌론 왕국이요 적그리스도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인 듯이 교회의 권좌에 앉아 있으면서(살후 2:4) 자기의 가르침과 규율로 교회 내 영혼들의 죄와 멸망을 증가시키고 있으니, 교황이야말로 불법의 사람이고 멸망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살후 2:3). 교황의 횡포는 수많은 세월에 걸쳐서 이 모든 것을 참고 넘치게 이루었는데, 그것은 신앙을 소멸시켰고, 성사들을 모호하게 했으며, 복음을 억압하여 왔습니다. 교황의 폭압은 불경하고 신성모독적일 뿐만 아니라 야만적이고 어리석기조차 한 그 자신의 규율들을 끝도 없이 명하며 증가시켜 왔다고 루터는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유아 세례에 대하여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세례에 대한 믿음을 지닐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필수적이지 않거나 아니면 유아 세례가 효력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이에 대해 유아들은, 다른 사람들, 곧 세례를 받도록 유아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의 신앙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해질 때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앙심이 없는 마음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23) 하나님의 말씀을 선사하는 믿음의 교회가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 믿음이 부어짐으로써 그 유아는 변화되고, 씻겨지고, 새로워집니다. 기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막 9:23).(24)
그래서 루터는 어떤 성사를 통해서든지, 신앙심이 없는 성인조차 변화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루터는 복음서에서 다른 이들의 신앙을 통하여 치유되었던 중풍 병자 이야기(막 2:3-12)를 근거로, 만약 믿음의 교회가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그분께 바친다면, 그런 변화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믿음과 믿음의 기도에 의해 제거되지 못할 장애물은 없으며, 스테반이 바울을 회심시켰던 것도 바로 그런 능력에 의해서였다(행 7:58-8:1)고 합니다.(25)
끝으로 루터는 모든 형태의 서약을 완전히 철폐하거나 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서약이 수도회에 들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든, 순례를 하는 것이든, 어떤 다른 행위에 관한 것이든 철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세례로부터 주어진 자유 안에 머물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종교적이고 또 그것이 가장 큰 행위라는 것입니다.(26)
그런데 교회는 많은 개종자들을 얻기 위해 육지와 바다로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사제와 수도자, 수녀로 넘쳐나게 만들고서는 그들 모두를 평생의 서약으로 가두어 둡니다. 그들은 그런 서약과 서약의 이행으로 되어진 행위가 천국에서 커다란 보상으로 갚아진다고 주장합니다.(27)
이들이 이렇게 서약과 서약의 이행을 부추기고 강조하는 것은 생각 없는 대중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중은 행위의 광휘에 끌려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난파선으로 만들고, 그리스도교적 자유를 훼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8)
그렇다고 루터가 모든 서약을 경멸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루터는 다만 공적인 삶의 양식으로서 서약을 하는 것을 제정하고 허가하는 것을 금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책임에서 서약을 하는 개인적 권리를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적인 삶의 양식으로서 이루어지는 서약을 권한다는 것은 교회와 단순한 영혼들에게 몹시 해로운 것이라고 루터는 생각합니다.(29)
그러나 무엇보다 서약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성서에 그런 서약에 관해서, 특히 평생의 정결이나 순명, 가난에 관한 서약에 관해 아무런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근거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위험하며, 결코 누구에게나 권고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루터의 입장입니다.(30)
그러나 루터는 성 베르나르, 프랜시스, 도미니크 등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발전시킨 인물들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가 한 서약과 종교적 생활(수도원 생활)을 통해 구원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된 것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입니다. 모든 사람은 믿음을 통해서 구원되고, 서약이라는 화려한 노예 상태는 믿음과 가장 대립하는 것입니다.(31)
그래서 루터는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이런 서약들과 수도회들을 폐지할 것을, 아니면 적어도 그런 것들을 승인하지 말고 칭송하지 말 것을 충고합니다. 그리고 자라나는 소년들과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구원에 확신을 갖고자 하면, 모든 서약을, 무엇보다 중요하고 평생을 가는 서약을 삼가라고 충고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런 삶의 방식이 성서 안에서 어떤 증거나 근거를 갖고 있지 않고, 다만 교황의 교서들에 의해서만 부풀려진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 그런 것들이 드러내는, 밖으로 드러나는 색다른 쇼와 같은 성격으로 보아 그것은 위선적 경향이 크고, 그런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교적 삶에 대한 멸시와 자만심을 낳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2) 그 외에도 그것들을 통해 믿음과 세례가 경시되고 행위가 추앙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아무도 수도회에 입회하지 말 것을, 또는 사제가 되지 말 것을 권합니다. 수도사들과 사제들의 행위들이 비록 거룩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들판에서 일하는 시골사람들의 행위 또는 집안일을 하는 여인의 행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사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 측량됨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33) ‘참으로 수도사나 사제가 행하는 단식이나 다른 행위보다도 남종과 여종이 행하는 보잘것없는 집안일이 종종 하나님께는 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수도사나 사제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들이야말로 사실상 이교도들이며 위선자들이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입니다.(34)
로마 교황의 명백한 두 가지 오류
루터는 교황의 명백한 첫 번째 오류는 ‘그가 서약으로부터 특별 사면을 부여하여 마치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그 자신만이 그런 권한을 소유한 듯이 그것을 행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미주 35) 이는 사악한 사람들이 갖는 만용이며 뻔뻔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권한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의 힘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루터는 그 열쇠는 모두에게 속하고 또한 오직 죄의 경우에만 소용이 있다(마 18:15-18 참조)고 함으로써 논박합니다.(36)
교황의 두 번째 오류는 결혼에 관한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어느 한쪽이 수도회에 들어가면, 다른 한쪽의 동의가 없더라도 부부관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결혼이 끝난다고 교황이 선포했는데, 루터는 그런 괴상한 생각을 교황의 마음속에 집어넣은 것은 악마가 그런 것인지 묻습니다.
루터는 혼인계약에 의해 배우자 한 쪽은 다른 한쪽에게 신의를 지키기로 되어 있고, 그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떤 권리에 의해서도 그가 지켜야 할 신의를 저버릴 수 없고, 만약 다른 한 쪽 배우자의 동의 없이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강도질이라고 합니다.(37)
루터는 교황과 사제들이 자신들의 서약을 결혼보다 더 나은 것으로 치장해 온 것을 비판하면서, 어떤 인간도, 어떤 천사도 서약으로 인해서, 그 서약들이 적절한 것인 한, 특별 사면을 부여할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38)
미주 |
(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전경미 역 (서울: 키아츠, 2021), 109. (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10. (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11. (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12. (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12. (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13. (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20. (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20. (9)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23. (10)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24. (1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24. (1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25. (1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1. (1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2. (1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2. (1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3. (1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4. (1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6. (19)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8. (20)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8. (2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39. (2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1. (2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5. (2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6. (2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6. (2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7. (2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9. (2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49. (29)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1. (30)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2. (31)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3. (32)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4. (33)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5. (34)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6. (35)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6. (36)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7. (37)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8. (38) 마틴 루터, 《교회의 바빌론 유수》, 159. |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