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 작가의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가 전해주는 “환상의 세계로 드러난 의지”에 대하여
▲ 한강 작가의 소설 《나는 작별하지 않는다》와 프랑스 번역본 |
내가 어릴 때, 티브이에서 유행하던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전설의 고향’이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부분 원한을 가진 귀신들이었다. 마을에 귀신이 나타나 가축이 죽거나 사람이 죽는 피해가 생겨서 백성들이 무서움에 떨 때 정의로운 인물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가 이 문제를 파고들자,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귀신의 원한은 개인의 욕망이나 부도덕으로 시작해 사회의 부조리로 이어졌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노비 중에서도 여성과 어린이는 함께 사는 가축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대부분 귀신은 사건의 피해자였고 사회적 약자였는데,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양반 혹은 권력을 가진 이들이었기에 여전히 떵떵거리며 살았다. 다행히 이야기의 끝은 주인공이 귀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진실을 폭로한 뒤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권선징악이었다.
시청자들은 더운 날에 귀신 때문에 서늘함을 느꼈고, 나쁜 놈을 처벌하는 것에서 후련함을 느꼈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 시대였는데 당시 사회적 약자는 억울하고 불행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존재는 그들의 억울함을 드러내고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는 망자의 의지로도 느껴졌다.
나중에 커서 알게 된 것이지만, 이런 류의 프로그램은 엄혹한 시대를 반영한다고 한다.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의 권력자를 향한 비판을 그대로 할 수 없을 때, 비유와 상징을 활용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표현했다고 한다. 현실에서 나쁜 놈인 권력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것처럼 전설 속 나쁜 놈이었던 권력자를 처벌하지 못했을 것이고, 정의로운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가족 역시 말 한마디 없이 눈물만 흘렸을 것이다. 그러니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라도 권선징악으로 끝맺으면 전설의 주인공들의 넋을 위로하고,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정의가 실현되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한강 작가는 새로운 이야기의 화자가 되었다. 현실과 환상 세계 사이를 오가며 광주 5월 항쟁 이야기를 마치고 쉽게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 이야기를 쓰며 생생하게 그 실체와 마주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분들처럼 작가 역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로 여겨진다. 아니 어쩌면 시계가 멈춘 채 돌아가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작가는 광주 5월 항쟁의 이야기를 품고 또 다른 이야기의 중심으로 다가가게 된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이전 이야기보다 꿈같은 환상의 세계로 그려진다. 전보다 비유와 환상 같은 설정이 등장한 건 그 사건을 현실 그대로 풀어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명을 단순하게 숫자로 비교할 수 없지만, 몇 배가 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치에, 그 참혹함에 글을 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몸이 성치 않은 상태로 이야기의 화자가 되어 주인공을 만났다.
작가의 친구인 그 주인공은 사건의 피해자 가족이었다. 작가와 비슷한 성향이었지만, 그보다 더 행동력이 좋았던 주인공은 제주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준비 중이었다. 주인공에게 닥친 예기치 않은 사고로 작가는 사건에 더 다가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한 사건의 실체는 너무나 참혹한 현실 중 일부에 불과했다.
작가는 여기서 어떤 것보다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고자 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이었을까. 불가능했다. 생존자가 많지 않았고 있다고 해도 입을 닫아버렸거나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참혹한 사건의 가해자 중 주동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고, 다른 가해자들과 그 후예들은 세대를 아우르며 권력에 기생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진실을 규명하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들의 악행이 정당했다고 윽박질렀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지난 지 너무 오래된 일이라고, 밝힐 만큼 밝히지 않았느냐며 때론 보상도 받지 않았냐는 못된 소리만 되풀이하며 그만하라고 했다. 그래서 작가는 ‘작별하지 못한다’가 아니라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제목을 지은 것 같다.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것은 상대의 안녕을 비는 행위인데 이들은 아직 안녕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이미 진실을 밝혔고 책임자 처벌도 이뤄졌지만, 진정한 사과는커녕 피해자들을 조롱하면서도 떵떵거리며 사는 이들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제 더 이상 수동적 의미로 움츠러들지 말고 진실을 전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주인공의 의지는 작가에게 선명하게 발현되며 작업에 동참하게 만든 것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 둘이 나중에 완전히 같은 길을 가리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이야기에 작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유와 환상이라는 장치로 등장하는 꿈과 새, 눈 등 여러 요소들은 사건과 관계됐다. 강렬한 꿈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며 작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주인이 모이와 물을 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새는 주인공과 작가를 연결시키며 환상으로 안내했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며 작가를 방해하는 눈은 극심한 고통과 시련을 안겼지만, 결국 녹고 사라지고 말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의지만큼 강렬한 것은 없었다. 작가에게 나타난 환상은 주인공 개인의 의지만으로 발현된 것은 아닌 것 같다.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과 억울한 이야기들, 진실을 밝히고자 한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그곳에서 발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그 사건의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전설의 고향’처럼 통쾌하고 시원한 결말은 정말 현실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한 개인의 욕심이나 불의가 아니라 집단의 이념 혹은 욕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기에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을 앗아가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 폭력은 얼마나 악한가. 악함이 선함을 억누르고 그름이 옳음을 뒤덮는 현실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 나타난 환상의 세계로 드러난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의 의지가 작품을 읽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심길 수 있다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허준혁 목사(한남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