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고한 희생자 애도와 무도한 학살자에 대한 침묵
▲ 한강 작가의 삼촌으로 알려진 한충원 목사가 자신의 SNS에 한 작가에 보내는 공개편지를 게재해 비난을 면치 못했다. ⓒ화면 갈무리 |
“사랑하는 조카”로 시작하는 한강 작가의 삼촌인 한충원 목사(대전 행복이넘치는교회,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공개편지를 읽었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마음으로 고통스럽게 쓴 한강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매도하는 것으로 읽혀졌다. 이 땅의 보수적인 목사들을 대변하는 생각 같아서 따져보기로 했다.
한 목사는 37년 전에 셋째 형님의 장례식에서 ‘알콜 중독으로 죽은 형님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고, 한강 부친인 한승원 작가에게도 “문학은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여 큰 충돌이 일어났다고 한다. 17살이나 어린 동생으로부터 아마도 ‘형님도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고인을 애도하는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모독하고, 면전에서 자신의 문학 일생을 모멸하는 것에 격분한 한강 부친이 동생에게 물리력을 가한 것으로 보인다. 한 목사는 이 일로 큰 형님과 37년간 절연했고, 조카 한강하고도 18년간 소식을 끊었기에 공개편지를 쓴다고 하였다.
인간이 함부로 ‘누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요 절대 은총에 해당하는 것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자를 구원한다는 것’이 예수가 전한 복음이다.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마 7:21)이 아니라는 것도 예수의 가르침이다. 한 목사가 특정인의 구원 여부를 함부로 예단하는 것은 월권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너무나 다양하다. 그래서 조용기 목사와 이영훈 목사까지도 ‘교회는 개인의 영혼 구원을 넘어서 사회 구원과 생태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고 설교한 바 있다. 예수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영혼 구원만을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의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영육이원론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영지주의는 초대교회가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한 목사는 노벨상 자체마저 폄훼하고, 한강 작품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채식주의자가 영혜와 형부의 불륜을 다룬 것에 대해 “근친상간 행위도, 수간(獸姦) 행위도, 심지어는 인육(人肉)을 먹는 범죄 행위도 얼마든지 시적이고 서정적인 문체로 미화시킬 수 있네. 그것은 타락의 극치네”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서에 기록된 가인의 동생 아벨의 살해(창 4장), 유다와 다말의 근친상간(창 38장), 인육을 먹은 이야기(애 2:20, 4:10)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성서의 이런 기록은 범죄의 미화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상을 폭로한 것이 아닌가. 한강의 문학을 그런 식으로 보는 안목이라면, 문학보다 다양하고 심오한 성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채식주의자는 단지 형부와 영혜의 불륜을 미화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동물성이 갖는 폭력, 육식, 성욕의 굴레에서 벗어나 식물이 되기를 망상했지만, 육욕에서 벗어나지 못해 형부와 관계함으로써 언니의 가해자가 되는 자기모순을 묘사한 것이다. 아울러 처제의 망상을 이용하여 온몸에 나무를 그려주고 관계를 유혹하는 예술을 빙자한 폭력을 폭로한다.
제주 4.3을 다룬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서 “당시의 미군정(美軍政)은 대한민국의 헌정 수립을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을 묵과할 수 없었고, 진압 과정에서 남로당으로 몰려 죽은 사람들이 많았네. 정말 가슴 아픈 역사라네.”고 하였다. 한 목사는 제주 4.3의 최초의 원인, 그 과정, 최종 피해자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도하고 무차별적 양민 학살의 책임에 대해서는 끝끝내 언급하지 않았다. 제주평화재단은 진압군은 1,091명이 사망하였으나 민간인 희생자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한다. 전체 피해자 중 33%는 여성, 10세 이하 어린이, 61세 이상 노인이다. ‘남로당의 선동에 휩쓸린’ 시민들이 아니다. 남로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노약자들이었다. 그래서 제주 4.3을 무고한 양민 학살이라 하는 것이다.
소년이 온다에 대해서는 “당시에 ‘김대중 선생’이 한국에 없었다면 5.18이 일어났을까? 아마 5.18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한 목사는 정적 제거를 위해 김대중을 감금하고 계엄군이 먼저 의도적으로 광주에서만 발포하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정당방위 차원에서 항쟁했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작품에 나오는 소년은 친구의 주검을 확인하기 위해 도청에 갔다가 그곳 일손을 돕게 되었다. 계엄군이 진입하던 날 밤 대학생 형이 소년에게 ‘케비넷에 숨어 있다가 이튿날 총소리가 그치면 두 손을 들고나오면 너희들은 어린 학생이니까 살려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믿고 항복하고 나오는 무고한 어린 학생들을 계엄군이 쏘아 버렸다.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어가는 소년들을 보면서 말했다. “영화 같지 않냐”라고. 끔찍하고 잔인하지 아니한가.
한강은 어린 나이에 우연히 5.18 관련 사진을 보고 트라우마를 겪다가 소설가가 된 후 5.18 관련 증언 800쪽을 읽었다. 어린 소년이 끝까지 도청을 지키며 희생한 인간의 고귀함과 계엄군 보여 준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을 문학적으로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5.18 광주의 가해자들이나 피해자들이 지속적으로 겪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모두 묘사했다.
편지 끝부분에서 한 목사는 뜬금없이 ‘광주시민과 호남인들은 영적 분별력을 갖춰서 (동성애를 합법화하려는) 그런 불의한 세력을 비판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 실현에 협조해야 할 것이네. 그래야 우리의 후손들이 건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5.18의 광주시민의 영분별과 동성애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한 목사는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목사의 이념적 신념의 전형을 보여 준다. 영혼 구원만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신념, 예수밖에는 다른 구원이 없다는 신념, 불륜을 다룬 문학은 사탄적이라는 신념, 제주 4.3은 공산당의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 일어난 불가피한 비극이라는 신념, 광주 5.18 김대중 체포에 분노한 민중들이 일으킨 폭동이라는 신념, 교회와 목사를 비판하는 예수를 부정하는 반기독교적이라는 신념, 동성애는 창조 질서를 거역하는 죄라는 신념이다.
남편이 공개편지로 인해 비판받는 것을 보고 한 목사의 아내가 쓴 글에는 한 목사가 거지 할아버지를 데려다 씻기고, 고아 청년을 집에 데려와 돌 보아주고, 장애인들을 씻겨주는 목욕 봉사하고, 40여 년 번 돈을 빼앗아 간 사기꾼을 용서해 준 신실한 목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남편을 비판하는 것은 ‘악한 영의 공격’이라며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호소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왜 제주와 광주에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과 평생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한강과 같은 진한 공감을 하지 못했는지 자못 궁금하다. 한강은 그들의 고통에 감전되어,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울면서 관련 소설을 썼다고 하지 않았는가. 번역자도 울면서 번역했다고 한다. 일부 독자들도 울면서 읽었다고 한다. 한강은 노벨상을 수상을 축하하는 마을 잔치도 거부했다. ‘세계가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아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기뻐하며 잔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서북청년단과 계엄군을 파견하여 수많은 양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도록 명령한 ‘권력자들의 무도한 살상 행위’에는 침묵하면서, ‘무고한 희생자를 애도하는 문학’을 비난하는 것은 기득권자들의 반공 논리에 편승한 이념적 신앙이 아닌가.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가치는 지금 여기에서 ‘우는 자와 함께 울며 애도하는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허호익(김찬국기념사업회 회장)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