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로 부름받은 자들(예레미야 34,11-17; 갈라디아서 5,1)
▲ 하나님의 뜻을 성령으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의 시작은 민주와 평등을 향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Getty Images |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러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에서 불러냈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불러냈습니다. 갈대아와 이집트 모두 제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러냄은 제국으로부터의 분리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국의 생활양식, 이념, 지배체제 모두를 버리라고 불러냄으로써 제국을 부정하고, 억압적인 제국의 존재방식을 거부합니다.
교회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의 모임인 교회는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입니다. 이 말은 ἐκ(ek, 에크, ~부터)와 καλέω(kaléō, 칼레오, 부르다)에서 나온 것으로서 밖으로 불려나온 자들을 뜻합니다. 로마 제국을 포함한 기존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기독교인들은 과연 어디로 무엇을 위해 그리 된 것일까요?
이와 관련하여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줍니다. 성서에서 그 말은 대부분 교회를 가리키지만 사도행전 19,32.39에서는 다른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그 말은 민회 또는 집회로 옮겨지고 있고, 어느 것도 배제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당시 역사적 배경을 놓고 보면 민회 혹은 총회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설명하는 예로 사도행전 19장의 사건이 적절치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사건은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의 선교로 크게는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했을 때 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보여줍니다. 에베소 시민들이 모여 이 문제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민회는 그리스의 직접 민주주의의 운영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민들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내외의 모든 문제들을 이 자리에서 토론하고 결정했습니다. 민주적 총회로서의 민회를 가리키는 말로서 에클레시아가 어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직접 민주주의가 시행되었지만, 그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은 여성이나 노예 등이 제외된 시민이었다는 점에서 민회는 이들 모두를 포함한 전체에서 불려나온 자들의 모임을 가리켰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에클레시아는 참여와 자유와 책임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적 이상을 내포하고 민주적 실천의 장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말로 교회는 자기를 표현했습니다, 교회는 이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말을 차용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 민주적 이상과 실천을 아울러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신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 아닐까요? 그 중심에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둠으로써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민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민회입니다. “민주”를 위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불려나왔습니다.
이를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제국으로부터의 불러냄은 제국에 의한 억압과 배제와 종속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따라서 불러냄은 민주로의 해방이며 해방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참여와 자유와 책임에 근거한 정의와 공의가 그 공체의 강령입니다. 불러냄은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평등과 평화의 세상을 향한 여정의 시작입니다. 그 도상에 교회가 해방공동체로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 여정을 일직선으로 달려갈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위와 같은 꿈을 가지고 세워졌지만, 이스라엘 역사는 그 꿈의 망각 과정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 결과 예레미야 시대에 그 나라는 붕괴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은 대각성일까요, 상황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취하게 된 궁여지책일까요, 어떻든 노예해방을 결정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고 노예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기로 했습니다. 바빌로니아에게 함락되기 직전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맞서 싸우려면 군사들이 있어야 하는데 노예들을 해방시켜 참전시키지 않고는 군사들을 더 이상 확보할 수 없는 단계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해방의 계약을 맺고 시행합니다. 비록 위기 상황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것일지라도 그들의 ‘신앙’이 작동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고, 하나님도 이를 올바른 행동이라고 받아들이셨습니다.
문제는 그 계약이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계약을 파기하고 자유인이 된 노예들에게서 다시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노예들의 자유는 자신들의 부자유와 불편이라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시작될 때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긴 역사를 통해 파기해왔고, 긴 역사의 끝자락에서 파기되었다는 선언을 예레미야에게서 들었습니다(렘 31,32).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끝에서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지만 이내 파기하고 맙니다. 계약에 근거한 자유를 거부해온 역사가 또다시 이렇게 확인됩니다. 시작과 끝에 계약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이스라엘의 그런 행태에 대한 하나님의 실망과 분노가 오늘의 본문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모두 너희의 친척, 너희의 동포에게 자유(드로르)를 선언하라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보아라, 나도 너희에게 자유(드로르)를 선언하여 너희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할 것이니, 세상의 모든 민족이 이것을 보고 무서워 떨 것이다. 나 주가 하는 말이다(17절).
똑같이 자유라는 말이 사용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앞의 것은 명시적이지 않지만 ‘~로부터의 자유’라고 하면, 뒤의 것은 ‘~에로의 자유’입니다. 노예로부터의 자유를 해방에로의 자유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면, 해방에로의 자유와 멸망에로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유를 선택하고 있는지요? 저들이 후자를 택한 것은 무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자유”에 익숙해진 탓입니다. 바꿔 말하면 악에 익숙해진 결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말이 더 크게 들려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를 자유로 포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자유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삼지 말라고 합니다(13절). 욕망의 종이라고 하면 어떨런지요?
자유인으로 자기 편리와 이익을 위해 계약, 그것도 스스로 맺었던 계약을 파기하고 타인의 자유를 빼앗고 그를 노예로 삼았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런 욕망은 자유를 위해 불려나왔을 때 두고 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유를 억압의 자유로 바꾸었고, 그것에 익숙해졌습니다.
이것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욕망을 억제하는 자유이고 타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섬기는 자유입니다. 여기에 억압이 있을 수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하는 부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자유의 장이 하나님 나라의 민회 곧 에클레시아입니다. 세상 속 에클레시아는 그러한 모습으로 세계에 도전하고 세계의 변화를 위해 저항하며 자신의 자유를 지키고 자유로의 해방을 일으킬 것입니다.
자유로 부름받은 우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민회를 구성하기 위해 불려나온 자들입니다. 민주를 실현하는 자들입니다. 그러한 자들로 오늘을 살아가며 희망이 되는 자 되기를 빕니다. 비록 자유를 농단하고 멸망에로의 자유를 신봉하는 자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종의 멍에를 강요한다 해도, “민회”의 한 사람으로 생명과 평화의 자유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응원하시고 인도하시고 기쁨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김상기 목사(백합교회)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