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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아편’인가 ‘자유와 해방의 누룩’인가

기사승인 2024.07.02  00: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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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교분리, 정교유착, 정치혐오를 넘어서는 몰트만의 ⟪정치신학⟫

▲ 유르겐 몰트만 교수가 독일 현지 시각으로 지난 6월 3일(월) 향년 98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https://www.tagesschau.de/inland/theologe-juergen-moltmann-tot-100.html

지난 6월 3일 위르겐 몰트만 박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희망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초기 신학적 관심은 중의 하나가 <정치신학>(1969)이었습니다.

몰트만 박사님은 17세의 나이에 히틀러의 정치적 야욕 때문에 발발한 2차대전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쟁 포로라는 ‘이름 없는 민중의 고통’을 겪던 그에게 군목이 전해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하고 ‘희망만이 살 길’이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훗날 그는 “1945년 그 당시에,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포로로서 영혼의 수렁에 빠져 있던 나를 예수는 찾아주었다. …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 그는 나에게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1945년 종전과 함께 3년 간의 포로에서 석방된 몰트만은 신학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1950년대의 미소 냉전 시기를 겪은 몰트만을 비롯한 몇몇 독일의 젊은 신학자들이 1960년대 초 “맑스주의와 기독교 간의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 대화를 통해 몰트만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종교비판을 마주하게 됩니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1843)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현실의 고통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압된 피조물의 탄식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고, 영혼 없는 현실의 영혼이다. 이것은 인민(人民)의 아편(阿片)이다. 인민에게 있어서 환각적(幻覺的) 행복인 종교를 버리라는 것은, 곧 현실의 행복을 지향(志向)하라는 것이다.”

맑스의 종교 아편론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는 “현실적 고통의 표현이며, 현실적 고통에 대한 저항”이라는 맑스의 통찰입니다. 맑스가 말한 ‘현실적 고통과 현실적 고통에 대한 저항’을 몰트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고통이며 이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 이해했습니다. 종교가 현실적 정치적 고난을 은폐하거나, 개인적 숙명으로 체념하게 하거나, 내세로 투사하여 저항을 단념하는 제한적 조건에서는,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정치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1513)일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가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나 상대방보다 더 빨리 선제적 공작을 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심지어 대중은 관용이나 자비보다 강력한 권력 행사를 더 선호한다고 하였습니다.

몰트만은 정치라는 용어를 마키야벨리적인 ‘권모술수’라는 의미를 사용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zoon politikon)’라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세네카(Seneca)의 순화된 라틴어 번역이 후대에 전승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정치(politik)라는 말은 폴리스(Polis)에서 유래한 것으로, 도시국가인 폴리스 안에 사는 사람은 모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정치적 영향을 주고받을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정치적 동물로 규정한 것은 ‘인간들의 삶의 모든 영역이 곧 정치적 영역’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치적 선동을 통해 집권한 히틀러의 정치적 야욕이 불러일으킨 전쟁에 어린 나이의 몰트만이 영문도 모른 체 참여했다가 온갖 고통을 당한 것처럼,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보수 언론의 정치적 선동의 영향으로 당선된 대통령 한 사람의 정치적 난동이 야기한 국가적 혼란과 위기에 모든 국민이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 탄핵 청원한 사람이 10일 만에 70만 명을 넘어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정치는 이처럼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전제로 출발한 것이 정치신학입니다. 기독교인은 물론 교회도 정치적 현실에 영향을 받고 있으므로 몰트만은 “정치적 의식을 갖지 못하는 순박한 신학이 언제나 있지만, 땅 위에 비정치적 신학이란 없다”고 단언 합니다.

실제로 히틀러 치하에 독일의 많은 교회들이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정치적 무관심을 보였고, 일부는 정교유착을 지향하며 히틀러의 정치적 야욕에 편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칼 바르트와 디히트리 본회퍼가 독일고백교회를 중심으로 나치 정권의 무도함을 폭로하고 저항한 정치적 실천은 정치신학의 중요한 전거로 제시됩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정치신학은 정치적 무관심이나 정치적 우상숭배를 극복하려는 기독교 신앙의 특수한 과제”(“복음의 정치적 해석”, 《신학의 미래 II》, 86쪽)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몰트만은 이 주제를 심화하기 위해 루터는 두 왕국론을 통해 정교분리의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였고, 제네바 시정(市政)에 참여한 칼빈은 정교유착을 통해 정치적 우상숭배를 부추겼다는 것을 자세히 분석합니다.

루터는 두 왕국론을 통해 영적 자유를 보호해 줄 정치적인 질서의 효율성을 앞세워 정치적인 이유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항거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이든 아니든 정치적인 이유로 세상 나라에 반역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므로 정부가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한 정치적 저항은 정당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당시의 루터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무관심과 사회변혁에 대한 무책임을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종말론적 긴장을 약화시킨 것으로 후대의 신학자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교회가 정치적인 문제를 건설적으로 책임 있게 다루지 못한 것도 루터의 정교분리의 두 왕국론의 영향이라는 평가에 몰트만은 적극 찬성합니다.

루터와 달리 칼빈(또는 깔뱅)은 정치제도를 이용해 종교를 보호 육성하고 종교가 침해되는 것을 막으려는 동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정치적 자유와 관련시켰습니다. 칼빈은 제네바라는 신흥 도시국가의 정치 세력들과 깊이 유착하여, 일정한 정치적 영향을 행사하면서 교회의 선교의 자유를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이 지향한 ‘어떤 의미에서의 신정정치’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으로 다스리는 ‘성서적 통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앙의 자유와 더불어 범죄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성서적 통치는 현대적 의미의 자유와 인권과 복지를 신장하고 국민의 저항권를 보장하는 민주적 정치 실현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몰트만의 비판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상황도 예외는 아닙니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부류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거나 친미 반공을 부르짖는 대통령이 나와야 공산화를 막고 나라와 교회를 살릴 수 있다면서 정교유착을 부추기며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똑같이 나쁜 놈들이라는 정치혐오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정치신학은 복음을 개인적 차원으로 사사화(私事化)하는 것에서 벗어나, 정교분리나 정교유착이나 정치혐오를 극복하고 복음이 지니는 공공성과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기 위해 ‘복음의 정치적 해석’을 시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는 로마인의 식민지 통치나 유대인의 왕권 통치의 회복과는 전적으로 다른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관심은 고난받고 차별받는 병자나 약자나 가난한 자나 소수자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언행에는 약자를 편드는 정치적 관련성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의 소굴’(마 21:12)로 만든 것을 비판하고,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마10:42)고 비판하였기에 결국 유대의 종교권력자와 빌라도와 같은 식민지 통치자들을 크게 자극한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두 번의 재판을 받고 정치적인 사형 도구인 십자가형으로 죽은 예수의 죽음 자체가 정치적 사건으로서 정치적 우상숭배와 정치적 무관심의 실상을 폭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맑스의 ‘종교비판’의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야말로 ‘현실적 고난의 표현과 고난에의 항거’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비판적인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자체가 총체적 고난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의 부활(anastasis)은 고난과 불의와 죽음의 권세에 저항하여 일어난 일종의 봉기(anastasis)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참다운 항거를 뜻한다”(《정치신학》, 157쪽)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고난의 문제를 진지하게 취급하고 변혁을 실천하는 진정한 기독교야 말로 ‘민중의 아편’이 아니라 ‘자유와 해방의 누룩’(“종교와 맑스주의”, 《신학의 미래 II》, 898-900쪽)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정치신학은 삶의 포괄적 영역, 즉 정치적 억압으로 인한 고난, 경제적 착취로 인한 고난, 문화적 차별로 인한 고난, 생태학적 파괴로 인한 고난, 생의 의미 상실로 인한 고난 등 모든 고난의 악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정치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이처럼 몰트만은 고난의 문제를 개인적이거나 실존론적인 것으로, 초월적이거나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고 사회적 정치적 영역 안에서 생기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존재하는 다차원적 고난의 악순환으로 본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정치적 고난을 폭로하고 정치적 저항과 변혁을 실천하는 ‘정치신학’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분에게 직접 배운 적은 없고 먼발치에서 특강을 한 번 들은 것 뿐이지만, 정치신학에 매료되어 칼빈의 가장 독창적이고 많은 영향을 끼친 ‘그리스도의 삼직무론’를 정치신학적으로 재해석 한 “그리스도의 삼직무의 정치신학적 이해”라는 박사 논문을 썼고 《그리스도의 삼직무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습니다.

허호익(연세신학연구회 종신회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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