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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대작이 아니다”

기사승인 2024.06.19  03:3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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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경제윤리론』(강원돈, 동연, 2024)의 의의와 쟁점

▲ 『기독교경제윤리론』 출판기념회에서 서평을 맡은 정용택 박사(사진 가운데) ⓒ장성호
이 토론문은 지난 6월 5일(수) 오후 5시부터 새길기독사회문화에서 에큐메니안과 한국민중신학회,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공동으로 주최한 강원돈 교수 『기독교경제윤리론』 출판기념회에서 정용택 박사(한국민중신학회)가 발표한 것이다.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저자에게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231쪽에 이르는 거대한 책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론문이라고 생각해 소개한다. - 편집자 주

학술적 의의: 규모와 범위, 체계적 완성도와 방법론적 일관성, 그리고 동시대적 타당성

『기독교경제윤리론』의 학술적 의의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우선 규모(scale)의 측면에서 보자. 본서는 근래에 출간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저술 전체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작(大作)이다. 작년에 출간되어 민중신학자들에게 신선한 자극과 충격을 준 강인철의 민중학(民衆學) 2부작 『민중, 저항하는 주체』와 『민중, 시대와 역사 속에서』가 합쳐서 1,232쪽이고, 본서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의 신작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1,300쪽이다. 본서 역시 총 11부 49장으로 구성되며, 페이지 수는 참고문헌을 포함하여 1,231쪽에 달한다. 규모만으로도 이미 강인철과 피케티의 명작(名作)에 육박하는 역작(力作)이다.

물론 같은 분야인 기독교경제윤리로 좁히면 본서의 진가가 더욱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 규모에서 본서와 비교할 수 있는 저작이 국내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이 번역 소개했던 스위스 경제윤리학자 아르투르 리히(Arthur Rich)의 『경제윤리』(Wirtschaftsethik)가 한글판 기준 1~2권 합쳐서 826페이지에 불과(!)하니, 이미 양적으로 본서는 그동안 기독교사회윤리학 및 경제윤리학 분야에서 교과서 역할을 수행했던 리히의 책을 가뿐히 넘어섰다고 하겠다. 이 정도 규모의 대작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성실한 연구, 그리고 결정적으로 학자적 열정이 없다면 결코 집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마땅히 높은 찬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경제윤리의 거대한 성취”라는 표현은 그래서 너무나 적절하다.

하지만 단순히 규모만으로 본서를 대작이라 칭하는 것은 아니다. 다루고 있는 주제의 범위(scope)로 보더라도, 이 책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작이다. 리히의 『경제윤리』와 본서를 다시 한번 비교해 보자. 전자는 (기독교)경제윤리를 구체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신학적 관점에서 그 이론적 토대를 놓기 위해 우선 제1권에서 윤리의 연구방향과 주요형태, 윤리의 관계영역, 사회윤리의 원리, 사회정의의 신학적 규준, 사회윤리의 실천적 준칙 설정 등에 전력한다. 그러고 나서 5년의 시차를 두고 출간된 제2권에 이르러 비로소 앞서 확립된 신학적 사회윤리학의 관점에서 경제제도와 경제체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한다.

결국 분석의 범위만 놓고 보면 『경제윤리』는 경제윤리의 원리-경제제도의 주요 문제-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서의 현대 산업경제-중앙집중적 계획경제-사회적‧민주적‧사회주의적‧개혁된‧생태학적 시장경제-전지구적 차원의 세계경제라는 여섯 가지 영역으로 정리된다. 그마저도 분량상으로는 원리적 탐구에 상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할애하여, 정작 후반부의 경제제도와 경제체제 분석에서는 개론적 수준의 고찰에 머무르고 말았다.

반면에 『기독교경제윤리론』은 총론적 설명이나 개론적 기술의 반복이 아닌 말 그대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라는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서술방법을 충실히 계승한다. 그래서 “경제제도의 규율을 위해 사회과학적 현실 분석과 신학적 성찰을 매개하는 관점과 방법”을 제시하는 제1부의 이론적 서술이 시장경제체제와 경제민주주의(제2~5부)에서 출발하여 지대공유경제와 기본소득(제6~7부), 금융자본주의와 세계통화체제(제8~10부)를 거쳐 마지막 제11부 세계무역체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구체적 결정태들, 정확히는 더욱 강력한 결정력을 지닌 상위의 심급으로 확대되는 ‘연속접근’(successive approximation)을 통해, 가장 추상적인 탐구 수준에서 가장 구체적인 분석 수준을 향하여 논의가 점점 심화‧확장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둘째, 체계적 완성도와 방법론적 일관성의 측면에서도 본서의 학술적 의의는 두드러진다. 본서는 경제민주주의의 재고 조사라는 측면에서 코뮌주의와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지만, “시장경제를 경제체제로 선택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확고한 입장을 전제하고, “시장경제를 경제체제로 선택한 이상, 시장경제체제를 어떻게 규율해서 사회적 가난, 생태계 위기, 금융 수탈에서 해방하는 사회를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에 집중한다(13쪽). 물론 저자는 그 문제 해결의 방법을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 곧 “자본의 축적과 팽창 메커니즘의 밑바닥에 깔린 자본의 독재를 해체하여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민주화하고, 생태계의 수탈과 파괴에 맞서 생태계와 경제계의 권익 균형을 추구하고, 화폐자본이 실물경제를 지배하는 제도적 기반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제시한다(같은 쪽).

그리하여 가장 기본적인 개별 작업장에서 시작하여 공장과 기업의 단위를 거쳐, 거시적인 산업 부문과 국민경제를 포괄하면서, 궁극적으로 세계경제 차원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조건으로서의) 시장경제(라는 경제체제)를 구성하는 모든 경제제도들에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를 경제윤리 실현의 실질적 형식이자 구체적 내용으로 적용하는 방법론적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 부제인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제안하는 시장경제의 규율 방안”이 함축하고 있듯이, 본서는 윤리적 판단과 평가의 대상이자 문제 해결의 대상으로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를 구성하는 경제제도들의 모든 현실적 수준에서, 특히 문제의 핵심을 이루는 자본과 노동의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착취적 지배 관계를 민주적으로 형성하여 시장경제체제 전반을 인간적이고 사회적으로 운영하려는 기획, 곧 ‘경제민주주의’에 집중하는 저작으로 요약될 수 있다.(1)

마지막으로, 본서의 학술적 의의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동시대성’(또는 ‘당대성’, contemporaneity)이다. 여기서 동시대성이란 단순히 동시대 혹은 당대의 특성을 포착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민중신학적 의미에서 본서가 동시대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여러 민중신학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와 같이, 민중신학을 다른 신학 담론과 구별짓는 종차(種差)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중신학이 한국 근대화에 대한 일반적인 시대구분(periodization)의 논리에 대응하여 세대론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이때의 세대론은 연령이나 사제 관계에 따른 구분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는 “시대상황의 차이에 따른 문제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며,(2) 보다 구체적으로는 “동시대 비판 담론의 당대 읽기와 대화하면서 신학하기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당대(contemporary)의 위기를 읽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시대마다 주요한 위기 구조를 변별하는 가운데 민중신학의 차별화된 세대 구성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3) 이러한 민중신학의 세대론적 전개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위기에 대한 진단과 위기 구조에 대한 분석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데, 민중신학의 역사에서 누구보다 저자 스스로가 이를 선구적으로 수행한 바 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체제변혁에 대한 열망이 폭발했던 1980년대 후반에 이른바 2세대 민중신학이라 불리는 보다 급진적인 경향을 출현시킨 장본인으로서, 저자는 당시 민중이 주체적으로 전개하는 사회변혁을 뒷받침하는 ‘운동의 신학’을 자임하며 그 방법으로서의 ‘신학적 해석학의 일반이론’을 정립할 뿐만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비판 이후의 기독교 세계관을 구축하는 일을 당대 민중신학의 주된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이제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저자는 ‘기독교경제윤리’와 ‘경제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인공지능과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257쪽), “금융화와 경제의 지구화 과정 한복판에서”(11쪽), “알고리즘과 빅데이터 기술, 플랫폼 자본주의, 공유부와 공유화, 기본소득, 마이너스 소득세, 주권화폐 이론, 탄소세, 금융자본주의와 금융개혁, 도시개발과 인클로저, 기업가 국가와 산업정책, 정의론 등”(17-18쪽)의 다양한 주제들과 얽혀 있는 윤리적 문제들의 해결을 “민중의 자리에서 민중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실천할 것을 촉구”(74쪽)하는 ‘민중신학-하기’(Doing-Minjung Theology)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비록 저자가 최근에 논문으로 발표했던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세를 여는 종합적인 학문의 모색”이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사회적인 그린뉴딜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구상” 같은 주제들이 본서에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지만,(4) “기술과 자본주의의 결합에 바탕을 둔 인류세 문명”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생태계 보전을 위한 국민소득의 우선 할당”(787쪽)이나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여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도”인 “탄소국경조정”(1141쪽)과 같은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인류세’(anthropocene)나 ‘자본세’(capitalocene) 등으로 명명되는 작금의 전지구적 “생태계 위기와 기후 위기”의 시대에 기독교경제윤리가 “사회정의와 생태학적 정의의 동시적 실현”을 위해 어떤 문제들에 집중해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론적 개입을 통해 일찍이 저자에 의해 ‘물(物)의 신학’으로 정식화되었던 민중신학이 ‘지금 여기’의 세계가 겪고 있는 위기에 개입하는 신학적 비판이론으로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입증하고 있다. 

남아 있는 쟁점들: 신학적-사회과학적-윤리학적 측면에서의 질문들

우선, 신학적 측면에서 질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경제영역에 적용되는 기독교윤리의 한 특수한 형태이자 “제도들을 매개로 해서 인간의 행위를 간접적으로” 다루는 사회윤리의 한 특수한 형태로서 기독교경제윤리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긴장 관계 속에서 사람이 삶을 꾸리는 방식으로서 경제제도의 문제들을 판단하는 규범적 원칙과 경제제도를 규율하고 형성하는 규범적 지침을 정교하게 제시”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35, 42쪽). 따라서 저자는 “제도 형성을 긍정하고 제도 형성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신학적 관점”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고(67쪽 이하), 이 가운데서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구분하면서도 그 둘을 서로 연결하는 창조적인 사유를 전개”했던 본회퍼의 ‘형성 신학적 모델’(70쪽)과 혁명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으로 대변되는 ‘변혁 신학 모델’(72-74쪽)을 “인간의 세계 형성을 긍정하고 그 형성 방식의 다양성을 개방하는 신학적 사유의 틀”로 인정한다(75쪽).

그런데 이처럼 “경제 활동을 통하여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맺는 관계들의 제도적 측면을 어떻게 다루어야 더 많은 선과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35-36쪽)고 하는 경제윤리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경제윤리가 “신학적 관점에서 더 많은 선과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현실의 경제를 제도적 차원에서 규율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학문”(33쪽)이라고 했을 때, ‘신학적 관점’의 추가가 ‘경제윤리’를 어떻게 ‘기독교경제윤리’로 혹은 ‘사회윤리’를 기독교‘사회’윤리로 변화시키는지가 여전히 모호하다.

저자에게 ‘신학적 관점’이란 결국 “구원의 역사 안에서 제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텐데(67쪽), 문제는 굳이 ‘구원사관’이나 ‘구원의 빛’에서 제도를 형성하려 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사회적 세계에서 “제도는 이미 확립되어 내부에서 작용하는 사회적 규칙이나 관습으로 이루어진, 지속성을 지닌 시스템”이라는 점이다.(5) 더욱이 호네트의 인정 이론적 관점에서 그러한 제도는 규범적 도식(normative schemes)을 구현하기 때문에 인정의 효과를 산출한다. 즉 제도는 기능화의 규범적 가정에 따라 개인들을 차별 대우한다.(6) 이처럼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제도가 구성하며 제도를 통해 표현되는 ‘인정’(recognition)의 경험 속에서 자기 자신 및 타자와의 관계를 맺어나가기 때문에, 제도가 더 많은 선과 더 많은 정의를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굳이 기독교윤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모든 사회과학적 이론과 실천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개인 도덕에 바탕을 둔 일반적인 기독교윤리와 달리 기독교사회윤리는 “개인의 도덕적 능력을 직접 다루지 않고, 사람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의 제도적인 측면을 다루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35쪽), ‘제도적인 것’(das Institutionelle)은 기독교사회윤리를 기독교개인윤리와 대별되는 사회윤리의 한 형태로 특징짓는 결정적 요소이다.(7) 하지만 사회윤리 일반이나 경제윤리 일반과 대조했을 때, ‘기독교’사회윤리 혹은 ‘기독교’경제윤리의 특수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구원사의 빛에서 제도 형성의 책임”?). 기독교사회윤리가 ‘제도적인 것’ 이상의 그 무엇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확보하지 않는 이상, 실질적으로 ‘신학적 관점’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사회윤리의 한 형태로 존재 의의를 획득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둘째, 사회과학적 측면에서의 쟁점이다. 워낙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논의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일단 토론자의 관심사이기도 한 금융화에 대해서만 간단히 말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와 포스트-브레턴우즈체제의 연결고리”로 ‘금융화’(financialization)를 지목하고, 그것이 “경제의 지구화를 이끄는 핵심 기제”라고 주장한다(148쪽). 실제로 금융화는 세계화,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198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개념으로서 오늘날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히 금융화란 무엇인가? 현재 학계에서 금융화에 대한 개념적 규정은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8) 첫째, 금융화는 새로운 축적체제의 출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금융적 채널과 화폐의 흐름을 통한 잉여가치의 생산 및 이윤 창출, 특히 미래의 이윤 흐름에 대한 청구권에 기초한 ‘수익 창출 능력의 자본화’ 과정이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축적 체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둘째, 금융화는 주주가치 지향성의 우위를 나타낸다. 이때 금융화는 자본축적 및 기업지배구조의 목적과 방식을 이른바 ‘주주가치 극대화’라 불리는 금융적 원리로 재편함으로써 고용 형태와 노동 조건의 안정성을 파괴하는 거대한 변화를 야기하고 있는 현상으로 설명된다.

마지막으로, 금융화는 ‘일상생활’(everyday life)의 금융화를 포괄한다. 일상생활의 금융화에 관한 연구들은 연금계획, 주택담보대출과 기타 대량 판매된 금융상품에 대한 참여를 통해 금융시장에 저소득층 및 중산층 가계를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자본주의적 ‘통치성’(governmentality)을 주목한다. 여기서 금융은 개인들 자신의 새로운 금융기술 및 금융적 지식의 체계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행사되는 탈중심화된 형태의 권력으로 묘사된다. 말 그대로 금융시장에 일상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개인들은 리스크(risk, 위험) 감수의 새로운 규범을 내면화하고 투자자 또는 금융자산 소유자로서의 새로운 주체성을 계발하도록 장려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경제윤리론』에서 금융화 분석은 거의 전적으로 앞의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일상생활의 금융화와 그 결과 대중들의 일상생활이 전개되는 재생산 영역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소비지출과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일체의 사회적 재생산 활동이 바로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른바 ‘가계의 금융화’(financialization of the household)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분석을 생략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개인들과 가계가 금융에 포섭되는 실제적인 경로와 양상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경험적‧실증적 연구가 인문‧사회과학 전반에서 풍부하게 제출되고 있는데, 본서에서는 거의 참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저자가 가계를 기업 및 국가와 더불어 시장경제의 주요 행위자로 정당하게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75쪽 이하), 그리고 금융화를 “비금융기업, 금융기업, 가계 등이 금융시장에 포섭되는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988쪽), 정작 금융을 필두로 자본이 주도하는 시장력이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대중을 사회력을 형성할 시민-주체가 아닌 시장력을 확대하는 금융적 주체로 변형시키는 메커니즘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은 본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적어도 대중이 단순히 자본에 의한 노동 포섭의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주체성(agency)을 드러내는 일상생활의 경제적 행위자이기도 하다면, 그들이 평범한 일상의 삶을 통해 재생산하고 있는 금융적 관행이나 제도, 주체성, 생활양식 등에 대해서도 ‘이데올로기 비판’의 측면에서 충분한 관심이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9)

단순하지만 끝내 잘 풀리지 않는 질문이 남아 있다. 저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듯이, “기독교경제윤리는 신학적 근거를 갖는 윤리적 규범들에 따라 경제제도를 규율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을 그 과제로 삼는다”고 했을 때(35쪽), 그러한 규율을 실천하는 주체가 도대체 누구이며(국가? 시민사회? 아니면 민중?), 다시 그러한 주체는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형성할 수 있으며, 주체의 형성 및 규율과 제도의 형성 및 규율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만일 정치적 주체가 제도처럼 의도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event)의 발생 이후에 혹은 사건의 발생과 동시에 출현하는 것이라면 기독교경제윤리와 경제민주주의의 세계에서 민중신학이 강조해 온 ‘민중사건’의 자리는 어디일까?

미주

(1) 단적인 예로 본문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약 650회 등장한다. 본문 전체 페이지 수가 1,176쪽이니 2페이지에 한 번꼴로 등장하는 셈이다. 제목의 일부인 ‘경제윤리’가 고작(?) 300회 정도 사용되었음을 감안할 때, 저자가 얼마나 ‘경제민주주의’라는 문제의식에 집중하여 본서를 집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 최형묵, 「그리스도교 민중운동에서 본 민중신학」, 『신학사상』 69(1990): 327.
(3) 김진호, 「‘한국의 근대’와 민중 신학, 회고와 전망」, 『반신학의 미소』 (삼인, 2001), 273.
(4) 강원돈, 「통전·융합적 생명신학 구상—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하고 생명세를 여는 종합적인 학문의 모색」, 『신학과철학』 40(2022): 3-38; 같은 저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사회적인 그린뉴딜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구상: 생태학적 지향을 갖는 기본소득 구상을 중심으로」, 『신학과 교회』 14(2020): 289-320.
(5) Geoffrey M. Hodgson, “The hidden persuaders: institutions and individuals in economic theory,”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27/2(2003), 163.
(6) Emmanuel Renault, “The Theory of Recognition and Critique of Institutions,” Axel Honneth: Critical Essays (Leiden: Brill, 2011), 223.
(7) 리히에 따르면, 제도적인 것은 “인간의 형성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들로서 “인간의 계획에 근거한 모든 질서, 제도, 기구”를 포괄한다. 당연히 그러한 제도적인 것은 사회과학 일반의 연구 대상이다. 아르투르 리히/강원돈 옮김, 『경제윤리 1』 (한국신학연구소, 1993), 54.
(8) Natascha Van der Zwan, “Making Sense of Financialization,” Socio-Economic Review 12/1(2014), 99-129.
(9) 물론 이때 토론자가 이해하는 이데올로기란 저자가 이해하듯이, “특권적 지위를 갖는 계급이나 계층”이 “그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은폐하고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견해가 마치 보편적 이해관계를 구현하는 것인 양 위장”하는 그런 거짓된 담론체계(60쪽), 즉 지배계급에 의한 조작과 기만 또는 주입과 강제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피지배계급의 허위의식을 가리키지 않는다. 토론자가 보기에,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를 왜곡된 관념이나 거짓된 환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문제적이다. 한편으로는 순진하고 무지한 대중이 이러한 왜곡 내지 거짓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며(‘피지배계급의 무능함’), 다른 한편으로는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 외부에서 이데올로기를 자의적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지배계급의 전능함’). 오히려 이데올로기는 “경제 현실”, 즉 저자의 말대로 “소득, 지위, 기회, 복지 등과 같은 사회적 재화의 분배”를 둘러싼 왜곡된 표상이나 허위적 관념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개인들과 대중들이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 조건들과 맺는 상상적 관계의 상상적 ‘표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재규정되어야 한다. 루이 알튀세르/김웅권 옮김,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재생산에 대하여』 (동문선, 2007), 277-278. 고전적 이데올로기 개념의 현대적 개조에 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에티엔 발리바르/배세진 옮김, “이데올로기 또는 물신숭배: 권력과 주체화/복종,” 『마르크스의 철학』 (오월의봄, 2018), 139-204 참조.

정용택(한국민중신학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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