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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할 수 없는 교역자가 집례하는 성례전을 거부할 수 있는가?

기사승인 2024.07.01  03: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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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21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여러분은 인격적으로 도저히 존경할 수 없는 교역자가 베푸는 세례나 성찬예전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성찬예전은 물론 교회마다 다르지만, 일 년에 몇 차례씩 거행되기 때문에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평생에 단 한 번 받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게다가 하필이면 도저히 인간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존경할 수 없는 교역자가 집례 할 경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나요?

이 문제는 사실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4세기 서방교회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파 사이의 논쟁에서 이미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발단은 로마 제국의 박해와 배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박해에 대한 교회의 대응은 세 가지 형태로 전개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감독 제도를 거부하고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기, 두 번째는 숨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기, 세 번째는 국가와 타협하면서 세력을 유지하기였습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취한 입장은 두 번째, 숨거나 외국으로 망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1)

문제는 박해가 종식되자 도망간 사람들이 돌아오고,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이 밝혀지는 등 공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타협을 거부한 사람들과 타협한 사람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논쟁이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밀라노 칙령 이후 카르타고 지역민들은 반-로마 전통을 이어받아 로마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했고,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

그리고 2세기에 세워진 카르타고 교회는 로마에 대항하는 북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저항의 온상지였고, 세속적인 제도나 이교사상과는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던 엄격하고 순결한 공동체로 정통 유대교적인 성향을 보였습니다. 물론 국가가 강요하는 부역도 거부했지요. 이들은 세례를 집행하는 사람은 오염되거나 정부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대부분의 카르타고 교인들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 교회 직책을 맡았을 때에 그 직책은 무효화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사제들을 안수하는 감독은 가능한 한 모든 비난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독이 베푸는 세례나 성직 안수에 대한 효력은 사라질 것이고, 좀 더 심하게 표현해서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는 마귀에 의해 인도된 적-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주장한 것이지요.(3)

카르타고 교회의 이런 입장을 견지한 인물은 4세기에 활동한 주교이자 신학자였던 도나투스(Donatus)였습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근처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도나투스는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여주었는데, 300년대 초 카르타고 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고, 311년 카르타고 주교 선거에서 분쟁이 발생하자 도나투스파를 이끌게 됩니다. 도나투스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끊임없이 탄압을 받았는데요, 자기 자신도 313년에 열린 아를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고, 347년 콘스탄티노플로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362년 15년 동안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지만, 다시 탄압을 받아 사망할 때까지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도나투스파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대표로 하는 정통교회와의 격론은 311년에 누미디아에 있던 약 80여 명의 감독들이 카르타고의 감독으로 부임한 케킬리아누스(Caecilianus)의 성직임직을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현실화되었습니다. 도나투스파들이 그를 거부한 이유는 그를 안수했던 감독이 박해시절에 성경책을 불태우도록 넘겨주었던 배반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케킬리아누스를 거부한 카르타고의 감독들은 그 대신에 도나투스를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러자 케킬리아누스는 자기를 비판한 80여 명의 감독들 중에도 상당수의 배반자들이 있기에 그들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이제 논쟁에 정통 가톨릭주의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끼어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도나투스파의 논쟁은 크게 ‘교회론’과 ‘성례론’, 두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벌어졌는데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이 표현되고 있는 작품은 393년경에 쓴 ‘분열자들에 대한 경고’(Admonito Donatistarum), 411년에 열린 공개토론을 기록한 ‘도나투스파와의 토론 초록’(Breviculus conlationis cum Donatistis)입니다. 그 외에 그의 ‘고백록’, ‘삼위일체론’(De Trinitate), ‘신국론’(De Civitate Dei) 등에도 도나투스파에 대한 비판이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교회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은 무엇보다 박해기에 배교했던 성직자들이 베푸는 성례, 즉 세례와 성찬례가 유효하지 않다고 도나투스파들이 주장한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도나투스파들은 소위 ‘오염된 성례’를 통해서는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믿은 것이지요. 그리고 참된 교회는 오직 거룩한 성도들로만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가 죄인을 교회에서 추방함으로써 교회를 지나치게 엄격하고 폐쇄적인 공동체로 만들려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두 개의 교회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회는 죄인과 의인이 함께 존재하는 가시적인 교회가 있고, 동시에 성도들로 구성된 보이지 않는 본질을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모든 죄인에게 회개와 용서의 기회가 열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례전’의 유효성은 그것을 집례하는 성직자의 거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고, 그런 점에서 죄를 지은 성직자에 의해 행해진 성례도 유효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례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은혜를 전달하고, 성례의 유효성은 그것을 집례하는 사제와 받는 자의 믿음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 도나투스 ⓒGetty Images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의 극단적인 주장들과 금욕주의를 비판하면서, 보다 포용적이고 온건한 교회론과 성례론을 제시했는데, 그의 입장은 서방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지금도 정통 교회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은 도나투스파와 정통 교회 사이의 격렬했던 논쟁의 원인이 성례전의 유효성에 대한 신학적 판단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신학적인 논쟁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는 온갖 지역주의와 계급현실로 분열된 타락한 권력투쟁의 추악함이 작동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4세기 중엽 북아프리카의 정통 가톨릭교회는 일부 부유층과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았던 부유한 가문 출신의 여성들, 그리고 과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반면, 도나투스파 운동은 순결을 자처한 성직자들이 주도했던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이었습니다.(4)

정통 가톨릭교회는 세속정치를 신뢰하고 수용하며 협력한 부유한 토지소유자들, 해안과 소도시에 주로 살고 있던 로마화된 도시 부유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반면, 도나투스파 교회는 내륙지방의 평원과 구릉지대에 살고 있던 가난한 원주민들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신학논쟁, 교회정치는 언제나 지정학적 상황과 인종, 그리고 경제상황 등과 맞물려 있기 마련이지요.(5)

수세에 몰린 정통 교회는 정부에 무력개입을 호소했고, 로마 제국은 무력으로 도나투스파들을 진압했지만, 오히려 도나투스파들의 힘을 더욱 키워주었습니다. 그러자 정통 교회는 도나투스파를 결국 이단으로 낙인찍었습니다. 도나투스파 박해와 이단 규정 사건은 단지 교회 내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보편성의 이름 아래 타민족을 통치하던 로마 제국과 교회의 보편성을 주장했던 가톨릭교회가 제휴한, 폭력적인 사건이었습니다.(6)

도나투스파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았지요. 그들도 지역과 민족을 배반한 친-로마적인 사제들에 대항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곤봉으로 무장하여 지역을 순찰하기도 했고, 교회를 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교회당 벽면을 흰색으로 칠했습니다. 주로 계절노동자들, 거칠고 투박한 베르베르인들로 구성된 도나투스파들은 농작물과 집을 불태우거나 노비문서들을 탈취하여 폐기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도나투스파들의 행동에 격분한 기독교 제국의 이론가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들이 무정부상태를 조장하고 공포를 야기하는 ‘버림받은 사람들의 미친 무리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7)

자, 그러면 다시 처음 문제 제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한국교회도 일제 강점기 강요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참배한 지도자들과, 해방 후,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유로 순교하거나 투옥된 지도자들, 이른바 ‘출옥 성도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일입니다. 출옥 성도들은 과거 잘못에 대한 사과와 회개, 신앙적 정화와 징계(파면, 봉직, 감봉 등의 처벌을 요구), 교단 역할 재정립, 진정한 신앙 회복, 사회정의 실현, 남북분단 극복 등을 요구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일부 사과와 회개의 필요성이 수용되고,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교직자들에 대한 징계가 있기도 했지만, 강력한 처벌을 요구한 출옥성도들과 사과와 용서를 호소한 신사참배 교역자들 사이의 갈등, 해방 직후의 사회적 혼란, 냉전의 시작과 함께 반공주의를 강조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 반민족특위의 해체 등도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사 참배를 한 교역자가 베푸는 성례를 거부한 사례는 있었을까요? 조선신궁이 1928년에 완공되고, 1932년부터 각급학교에서 동방요배가 강요되었으니, 그 당시에도 신사를 참배한 교역자는 있었을 것이고, 그런 교역자가 집례하는 성례를 거부하는 일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신사 참배 자체를 거부하여 체포, 고문, 투옥, 순교를 당한 교역자들과 교인들은 있었지만, 참배한 교역자의 성례를 공개적으로 거부한 사건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사학자에게 문의해봐야 하겠습니다.

어쨌든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 아니라, 공적으로 존경할 수 없는 교역자가 베푸는 성례를 거부할 수 있느냐는 문제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선택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례는 집례자의 인격이나 인품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유효하며, 오직 믿음과 은혜로만 수용되는 것이라는 정통 교회의 주장은 교회의 일치와 위계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채택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주

(1)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김주한 역 (서울: 살림, 2005), 223.
(2)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224.
(3)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226.
(4)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230-231.
(5)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228.
(6)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229.
(7) 폴 존슨, ⟪2천년 동안의 정신 I⟫, 231.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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