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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장애인과 장애신학을 어떻게 재발견했나

기사승인 2023.06.11  00: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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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명과 포섭을 넘어선 장애신학 (2)

▲ Mathieu Ignace van Bree, 「Christ Healing a Patient」 ⓒGetty Images

장애인에 대해 성서의 긍정적 시선의 발견

지난 글에서 서술한 장애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취급은 장애에 관한 신학적 연구들이 비판적으로 짚고 가는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상당수의 연구들이 그러한 비판에서 출발하면서도 그러한 부정적 취급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의 본질은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의 연구들은 대체로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 내에도 장애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발견할 여지가 많다는 입장을 수반한다.

이런 입장의 근거로 많이 활용되는 것 중의 하나가 예수의 장애인 관련 사역이다. 김성원은 종교의식에서 배제당하던 나병환자를 예수가 차별적 언급없이 적극적으로 치유해 준 것을 성서의 전반적인 흐름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담겨 있지 않다는 근거로 든다.(1) 한승진은 예수의 장애인 치유가 단순한 육체적 치료에 그치지 않고 그들에게 붙어 있던 부정하다는 꼬리표를 무효화하여 그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사역이었다고 지적한다.(2) 박태식은 예수의 장애 치유 행위가 육체적 악조건에도 절대 훼손되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하게 드러낸 행위라고 이해한다.(3)

특히 이런 경향의 해석들에서 많이 언급되는 성서 본문이 요한복음 9장의 예수의 시각장애인 치유사건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성서구절에서는 시각장애인의 장애를 두고 제자들이 그의 장애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예수에게 묻는다. 이때 예수는 이 시각장애인의 장애가 자신의 죄 때문도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이 예수의 답을 장애가 죄와 연관되는 것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4) 바로 앞 각주에 인용된 최대열의 논문의 경우 이 성서본문에 “예수의 장애해방선언”이란 말까지 붙일 정도이다.(5)

나아가서 성서에 등장하는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언명조차도 장애 우호적인 입장에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어 김홍덕은 앞에서 언급된 제사장이 장애를 가졌을 경우 제의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규정에 대하여 그 규정이 동시에 장애를 가진 제사장이 제사장 신분 자체는 유지가 가능하며 또한 제물 배분도 받을 수 있음을 규정한다는 점을 들어 이 규정이 장애 자체에 대한 배제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6)

특히 이런 장애 우호적인 재해석에서 많이 시도되는 해석이 앞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성서의 장애은유들에 대한 재해석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구약성서, 특히 예언서에서는 이스라엘의 부정적 모습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 부정적 모습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묘사하는데 장애은유가 상당히 많이 사용되며, 이런 장애은유들을 문자적으로 수용한다면 하느님 나라에서는 장애가 제거 대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35장 4-6절에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시각, 청각, 지체장애인의 장애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7)

그러나 채은하가 드는 예에 따르면, 이사야서 33장 23절, 미가서 4장 6-7절 등에서 수난을 겪는 이스라엘에 발을 저는 자라는 장애은유가 사용될 때, 그 발을 저는 자도 하느님 나라를 향유하게 될 것이라고만 언급될 뿐이지 발의 장애를 고침받을 것이라는 언급이 없다.(8) 채은하는 이런 예들에서 하느님 나라에서 장애가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장애를 가진 채로 비장애인과 공존할 수 있다고 해석할 여지를 발견한다.(9)

김홍덕은 앞에서 언급한 미가서 4장 6-7절의 발을 저는 자 장애은유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해당 구절은 발을 저는 자를 남은 백성이 되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발을 저는 자로 대유되는 장애인이 이스라엘의 재건과 하느님 나라의 출현의 씨앗이 된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홍덕은 이 구절을 장애인이 하느님 나라에서 변두리가 아니라 주역이 된다는 말이라고 이해한다.(10)

성서의 장애은유, 특히 예언서 등에서 심판의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장애은유에 대해서는 위와 같이 장애은유를 사용한 언술의 틈새를 찾는 해석만이 아니라 장애은유는 어디까지나 은유일 뿐이며 그 은유가 동원된 심판의 결과가 하느님의 구원이므로 장애은유를 사용했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해석을 내세우기도 한다. 이런 해석과 비슷한 경향에서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성서의 결정적인 예언 중 하나로 이해되어 온 이사야서 53장의 고난의 종 이야기를 장애은유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11)

장애은유의 확장

한편 성서의 장애은유에 대한 재해석과는 별도로 신학적 지평에서 장애은유를 신과 인간의 속성과 그 두 주체와의 관계를 장애신학적 입장에서 해명하는데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낸시 아이슬랜드는 예수의 고난에 근거하여 예수를 “장애 하느님”(the disabled God)(12)으로 규정했다.

아이슬랜드는 종교적 상징이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거나 재생산하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경우도 있음을 주목하며, 주변부 집단으로의 장애인이 그들을 주변화시키는 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장애인들의 경험, 특히 하느님 경험을 인지하는 장애인 자신들의 틀과 비장애인 중심의 일상적인 실천/사고/이미지 체계를 변혁시켜야 하는데 이 변혁을 위해서는 장애인들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상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13)

그는 복음서의 부활한 예수가 손과 발에 못박힌 상처를 갖고 있고 옆구리에도 창에 찔린 상처를 갖고 있는 채로 나타난 점에 주목하여 이 예수의 모습을 “장애 하느님”으로 서술한다.(14) 성육신한 하느님이며 부활한 하느님인 예수의 이런 “장애 하느님”의 모습은 장애인이 장애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를 입은 채로 하느님의 형상을 갖고 있음을 이야기할 수 있게 해 준다.(15)

아이슬랜드에 의하면, “장애 하느님”인 예수는 고난받는 종으로 그치지도 않고 정복의 힘을 가진 군주도 아니며 낭만적인 극복자도 아니다. 이에 어울리는 가장 적당한 단어는 생존자이다. 생존자는 장애를 가진 삶의 슬픔과 기쁨의 얽힘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상호의존의 삶이 삶의 필수조건임을 받아들인다.(17)

아이슬랜드처럼 “장애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헨리 나웬의 저서로 유명해진 “상처 입은 치유자” 은유를 장애신학에서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김홍덕은 이 “상처 입은 치유자” 은유를 전통적으로 예수와 연결되어 해석되는 이사야서 53장과 연결시켜 장애에 수반되는 물리적인 무능력이 십자가의 은혜로 하느님의 능력으로 바뀐다는 신학적 견해를 피력한다.(17) 또한 아이슬랜드와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의 성육신을 장애신학의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최대열은 예수의 성육신을 전능한 존재인 신이 스스로 일반 사람들과 같은 제약을 경험하는 삶을 산 것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하느님의 장애 입으심’이라는 용어로 묘사한다.(18)

최대열의 경우처럼 신이 일반 사람들과 같은 제약을 경험하는 삶을 산 것을 ‘하느님의 장애 입으심’이라는 용어로 지칭할 경우 인간의 존재 조건 자체가 장애로 규정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런 경우의 한 가지 예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죄론에서 죄를 인간과 신의 관계 단절로 해석하는데 이 관계 단절이라는 속성을 장애은유와 연결시키는 경우를 들 수 있다.(19)

이런 관점을 더 확장하면 장애는 인간이 맺는 모든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을 지칭할 수 있게 되며 예수를 장애의 화해자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20) 이런 견해를 더 확장하면, 장애는 인간의 무능이 드러나는 지점이므로 오히려 하느님의 은총의 발현이 더 확실하게 식별될 수 있는 지점이라는 이해도 가능하다.(21)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서의 장애신학의 위상

한편 직접적으로 장애에 대한 부정적 취급의 이슈를 다루기보다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적인 범주와 용어들을 장애 이슈에 적용하는 장애신학 시도들도 있다. 이런 시도들에서는 주로 하느님의 속성 중 사랑과 같은 속성을 적용하여 담론을 전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성원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로고스의 근본은 정의라기보다는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사랑에 근거해야 장애인의 복지가 근본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22)

유경동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의에서 삼위일체 신격간의 상호 관계에서 나타나는 개방적 결합, 그 상호 관계의 속성으로서의 사랑, 그 상호 관계로 구성되어 자기실현이 가능한 공동체 등의 특징을 읽어낸다.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삼위일체 교의가 성육신하여 인간의 약함과 고난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그 인간의 약함과 고난을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방적 결합을 통해 극복할 길을 열고 그 극복의 전망으로 제시한 공동체가 장애인의 구원의 길이 된다는 장애신학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23)

그런데 여기서 흥미롭게 짚어 볼 지점은 장애신학을 특히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전개하고자 하는 문헌들에서 다음과 같은 서술이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다. “장애신학은 지금까지 전개되었던 신학들과 신학을 구성하는 요소에 있어서 별반 다르지 않다”(24) “원래는 장애신학이 따로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어 그들 각자에게 인생의 목적을 따로 두신 것이 아니므로 장애신학이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다.”(25)

이런 서술들에서는 장애신학이 그 전개 방식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학의 범주를 벗어날 위험성이 있으며 그래서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는 장애신학이 가능하다고 확인을 시켜 두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앞에서 논한 아이슬랜드의 “장애 하느님” 용어를 김홍덕과 최대열은 탐탁찮게 여기는데 이 역시 이 용어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학의 범주를 벗어날 수 있다는 의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논한 성서와 그리스도교 내의 장애에 대한 부정적 전통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장애신학의 위험성에 대한 저러한 의식은 쉽게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인지한다면 앞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복음주의 신학의 경우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글에서 논한 장애에 관한 신학적 접근 전반에 대해서도 위험성 의식의 관점에서 다루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김성원의 장애인의 복지의 궁극적 실현은 정의보다는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장애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논의가 정의의 관점에 입각할 때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부정적 전통에 대한 추궁과 이에 따르는 전통적 신학에서의 벗어남으로 갈 경향을 경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서 장애신학이 이러한 위험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지된다면 장애신학은 그리스도교 신학 내에서 언제든지 동요를 일으킬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것이며 지금까지 논해 온 장애신학의 모든 논의들은 저 동요를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입장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 동요를 오히려 확산시키는 입장에서 장애신학을 전개하는 시도는 가능한가? 필자는 장애신학에 장애학의 관점을 수용하는 시도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색하고자 한다.

미주

(1) 김성원, “장애인의 존재론적 정체성에 관한 기독교 철학의 인간론적 해석”, 『철학논총』 64호(2013), 새한철학회, 88.
(2) 한승진, “한국 교회의 장애와 장애인관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성서윤리적 관점”, 170.
(3) 박태식, “신약의 관점으로 바라본 장애인신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장애인소위원회 엮음, 『장애 너머 계신 하느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2), 79.
(4) 대표적인 경우로 김홍덕, 『장애신학』, 310-312; 김성원, “장애인의 존재론적 정체성에 관한 기독교 철학의 인간론적 해석”, 88; 최대열, “예수의 장애해방 선언: 요한복음 9장을 토대한 장애(인)신학의 시도”, 『한국조직신학논총』 17집(2006), 한국조직신학회, 149-174.
(5) 최대열, “예수의 장애해방 선언: 요한복음 9장을 토대한 장애(인)신학의 시도”, 149-174.
(6) 김홍덕, 『장애신학』, 98-99.
(7) 채은하, “장애(인)와 치유 - 온(Ohn) 신학으로서의 장애인 신학 시도”, 158.
(8) Ibid., 158-161.
(9) Ibid., 162.
(10) 김홍덕, 『장애신학』, 193-194.
(11) 김홍덕, 『장애신학』, 158.
(12) the disabled God이 “장애 하느님”으로 번역되는 경로는 장애인의 ‘인’ 자리에 ‘신’을 넣은 후 그것을 장애 하느님이라고 다시 쓰는 것으로 보인다.
(13) Nancy Eiesland, The Disabled God: Toward a Liberational Theology of Disablity, 91.
(14) Ibid., 99-100.
(15) Ibid., 101.
(16) Ibid., 102-103.
(17) 김홍덕, 『장애신학』, 374.
(18) 최대열, 『장애조직신학을 향하여』, 66.
(19) 최대열, 『장애조직신학을 향하여』, 69.
(20) 최대열, 『장애조직신학을 향하여』, 73.

(21) 김홍덕, 『장애신학』, 151.
(22) 김성원, “장애인의 존재론적 정체성에 관한 기독교 철학의 인간론적 해석”, 96.
(23) 유경동, “장애인 신학과 삼위일체”, 『신학과 세계』 72, (2011), 감신대학교, 195-200.
(24) 최대열, 『장애조직신학을 향하여』, 26.
(25) 김홍덕, 『장애신학』, 43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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