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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노예사냥

기사승인 2022.09.19  21: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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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 ⑶

▲ "남부인들을 위한 탈주 노예 포획이 민주당원의 더러운 일이라 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더러운 일을 할 것이다" John A. Logan 1859년 12월 9일, Puck Magazine에 실린 일러스트 ⓒPuck Magazine
이 글은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에서 2006년 10월 17일에 행한 강연이다. - 저자 주

신대륙의 발견은 유럽과 아메리카의 만남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만남이기도 했다. 악조건의 금광과 농장의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유럽인은 아프리카 흑인을 아메리카로 수송하였다.

1518년 스페인 함선이 ‘기니’ 해안에서 흑인노예를 처음으로 수송한 이해 3세기 반 동안 계속된 노예무역은 아프리카 원주민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노예사냥에 항거하다 살해당한 흑인은 2억 명에 이른다고 한다. 약 천 만 명의 흑인노예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들은 이른바 ‘아프로-아메리칸’의 조상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대서양 노예무역은 1441년 젊은 포르투갈인 선장 안탐 곤살베스(Antam Gonclvez)가 자신의 고용주 엔리케 우나베가도르(Henrique ONavegador)왕자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서사하라 연안에서 흑인남녀 한 명씩을 납치하면서 시작되었다. 4년 후, 포르투갈은 모리타니 해안에서 멀지 않은 아르귄(Arguin) 섬에서 노예와 특히 금을 얻기 위해 요새 하나를 건설했다.

남부 유럽에서 노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흑사병 이후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부유럽에는 로마 시대 이후에도 가사노동을 하는 노예가 계속 남아 있었으며, 집약농업지역, 특히 설탕을 생산하는 지역에서 노예제가 유행했다. 유럽인은 십자군 전쟁기에 무슬림으로부터 설탕제조법을 배웠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서쪽으로 지중해를 지나 마데이라 같은 대서양의 섬들로, 심지어 아메리카 대륙으로까지 퍼져나감에 따라, 각 플랜테이션은 점점 노예노동에 의존하게 되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대개 이런 플렌테이션의 수요에 대한 하나의 대응이었다.(1)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의 직접 선적은 1532년에 시작되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질병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아프리카인 노예가 그들을 대신했다. 아프리카 노예만이 필요한 노동력을 충당할 수 있었고, 그들은 도제계약으로 고용된 백인노동자보다 값이 쌌으며, 구세계의 열대지역에 널리 펴져있던 유럽과 아프리카의 질병에 유난히 면역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경 서아프리카에서 수출된 모든 노예의 약 80%가 아메리카 내륙 각지로, 특히 1540년대에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이 뿌리 내린 브라질로 보내졌다.(2)

학자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1450년부터 1600년까지는 약 367,000 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이 대서양으로 수출되었으며, 1601년부터 1700년까지는 1,868,000 명, 1701년부터 1800년까지는 6,133,000 명, 1801년부터 1900년까지는 3,330,000 명이 수출되었다. 커틴의 통계에 따르면 수출된 노예의 42%가 카리브 해 지역으로 갔고, 38%가 브라질로, 5% 미만이 북아메리카로 갔다고 한다.(3)

노예사냥의 시작과정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9세기 중엽 시에라리온의 선교사 지기스문트 쾰레(Sigismund Koelle)가 177명의 해방된 남성노예에게 그들이 어떻게 노예가 되었는지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중 34%는 ‘전쟁 통에’, 즉 정치조직체간 전쟁의 부산물이거나 대규모 노예사냥에서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노예사냥은 1년에 한 번 대대적으로 사바나 지역의 기마대가 농경민족을 상대로 벌였다. 또 30%는 납치에 의해 노예가 되었고, 11%는 재판과정 - 주로 간통죄 처벌로 - 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 그 외에도 고아, 과부, 천덕꾸러기, 개으름뱅이, 무능력자, 저능아 등은 모두 노예 신분으로 전락하기 쉬웠다.(4)

그런데 사로잡혔든 납치되었든 유죄판결을 받았든 다른 어떤 경우 간에 일단 노예가 되면 자유를 빼앗겼다. 이제부터는 노예무역의 기본원리가 작동되었다. 노예는 사멸하기 쉬운 상품이었다. 이익은 노예가 죽기 전에, 또는 아직 자기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신참노예의 경우에는 탈출하기 전에 그들을 파느냐 못 파느냐에 달려 있었다.

노예들의 맨 앞 줄에는 한 줄로 묶인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노래를 했고, 자유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다음에는 늘 하는 식으로 목이 밧줄에 묶인 노예들이 4명 단위로 한 줄에 엮여 있었으며, 줄과 줄 사이에는 창을 든 남자가 한 명씩 있었다. 그 뒤를 가내노예들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신체를 구속받지 않은 여자노예들이 있었다.(5)

일단 배에 승선하면, 노예들은 2인 1조로 족쇄가 채워진다. 노예들의 탈출과 반란을 막기 위해서다. 그들은 갑판에서 하루에 두 끼를 먹는다. 그들이 밥을 다 먹고 갑판들 사이의 개집 같은 숙소로 내려갈 때까지 감시인들은 총알을 장전한 큰 총의 도화선에 불을 붙일 태세를 갖추고 있다.

촛불 하나 없는 갑판과 갑판 사이의 노예숙소, 만연한 선원들의 야만성, 그리고 갈증이 노예들을 괴롭혔다. 1756년 영국인 노예상인에게 팔린 올라우다 에퀴아노는 다음과 같이 그의 경험을 기록에 남겼다:

‘배 안은 발디딜 틈 하나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차 몸을 돌릴 수조차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바람 한 줄기,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공간과 찌는 듯한 더위에 우리는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온갖 악취가 풍겨 숨쉬기가 힘들었을 뿐 아니라, 노예들 사이에 병이 나 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비참한 상황은 견딜 수 없이 거추장스러운 쇠사슬과 없어서는 안될 오물통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아이들은 종종 오물통에 빠졌고, 그럴 때마다 거의 죽을 뻔했다.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든 사람을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6)

미주

(1)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이한규, 강인황 역, 이산 1996, 230-232.
(2)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235.
(3)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237.
(4)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239.
(5)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240.
(6) 존 아일리프, 아프리카의 역사, 246.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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