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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 최흥종 목사, 호남의 성자이자 나환자의 아버지

기사승인 2021.09.18  16: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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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사이드 선교사, 호남의 선교의 별이 되다 ⑶

▲ 오방 최흥종 목사

최흥종의 개종 및 회심과 목회활동

최흥종 목사의 생애는 크게는 개종 전과 개종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종 후는 입교와 세례 시기, 회심과 목회 활동 시기 그리고 사망 선포와 은둔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세 시기의 활동은 모두 다 목회와 구라활동 및 빈민운동,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의 섬김에는 성과 속이 따로 없었다. 그에게서 신음하는 모든 세계는 목회의 대상이었다. 그는 십자가 사랑으로 일제의 억압과 폭력, 불법 아래 있는 교회와 사회, 나라와 민족을 두루 품었으며 행동하는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그의 본이름은 최명종 이었으나 1907년 세례를 받은 후, 최흥종으로 개명하였다. 최흥종은 1880년 광주읍 불로동에서 최학신과 국씨 부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세에 모친을, 1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장터에 싸움꾼 ‘최망치’로 알려졌고 광주 장날에 장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술값을 뜯기도 하며 20대 초까지 하는 일없이 무외도식 하는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개종 이전에 강명환과 결혼하였다.

1904년 24세 때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유진 벨 선교사의 사택을 방문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그해 12월 25일에 유진 벨 선교사 집에서 거행된 광주선교부의 첫 예배인 성탄예배에 참석하였다. 이 때 그는 광주 선교부의 한국 측 책임자인 김윤수의 권유로 입교하여 광주 선교부의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의 감화를 받고 술과 담배 비롯하여 건들거리는 생활을 청산하였다.

1905년 무뢰배의 생활을 청산한 그는 김윤수의 권유로 순검이 되어 화순지역 의병 토벌작전에 출동하였다가 체포된 의병 12명을 압송하는 과정에 풀어주고 순검 생활을 사직하였다. 1907년 세례를 받았으며 광주농공은행에 다니는 중에 국책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병기와 함께 대동의상회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8년 양림교회 집사로 임직하였고 의사인 윌슨 선교사의 어학 선생 겸 조수로 광주 진료소에서 근무하였다.

실로 최흥종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1905년에서 1909년 3월 사이에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과 결단으로 외적인 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깊이 회심하고 중생한 속사람의 체험은 없었다.(1) 1908년 그는 제중원에 근무하면서 조사로서 박인원, 이경필, 이계수 등과 함께 영광군 염산리교회를 차례로 돌보았다.(2)

마침내 그에게 중생의 때가 이르렀다. 1909년 4월 어느 날에 그는 평생을 묵상하며 사모하게 된 예수로 한국 땅에 성육신 한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난 것이다. 오웬 선교사의 부인은 당시의 상황을 내쉬빌 남장로교 선교 본부의 소식지에 기고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그 자신의 말에 태우고 양림리 선교부에 나타났다.

오웬 의사의 치명적인 질병치료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전보를 받고 광주에 도착하기 전 13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포사이드는 길가에 누워있는 여자 나환자를 보았다. 자신에 대한 위험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서 하신대로 행하려는 마음에서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왔다. 진료소에서 이틀을 보낸 후 윌슨은 옛 벽돌 가마에 임시 숙소를 정하였다. … 벽돌 가마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가 길을 걷고, 힘든 곳에서는 포사이드 의사가 겁 없이 손으로 부축하는 것을 보았다. 포사이드 의사는 모든 점에서 신사이고 또한 신사복을 입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그 나환자의 손을 잡았다. 병으로 일그러지고, 더럽고, 돌보지 않은 그 손을. 그녀의 머리는 수개월, 수년을 빗지 않았으며, 그녀의 옷은 누더기로 더럽고, 손과 발이 부어올랐으며 견딜 수 없는 냄새를 풍겼다. 한발은 짚신이고 다른 한 발은 종이로 감았다. 걸을 때에도 심하게 절었다. … (3)

최흥종도 포사이드 선교사의 나환자에 대한 겸허하고 따스한 인간적인 관심과 돌봄에 녹아진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호남일보」에 ❮구라사업 50년사 개요❯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기고하였다.

그날도 「우월순」 의사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정오쯤 귀가하려고 나오는 도중에 차마 볼 수 없는 극흉한 나환자를 말 위에 태우고 와서 내려놓고 그 환자의 겨드랑이를 부액하고 오는 서양인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보니 역시 잘 아는 선교사 포사이드 의사이어서 한편 놀라면서 「포」 의사 오십니까? 하고 인사한즉 그가 「예, 편안하시오」 다정한 답례를 할 때  나환자가 마침 오른손에 들고 있는 참대 지팡이를 떨어트렸습니다. 포 의사는 날보고 「형님, 저 지팡이 좀 집어주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허지만 나는 집어주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지팡이에는 고름인가 핏물인가 더러운 진물이 묻어 있었고 환자를 살펴본즉 흡사 썩은 송장이요 다 없어지고 두 가락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은 그나마도 헐어서 목불인견이었고 또 한 가지 까닭은 그 때만하여도 나환자의 수효는 희소하였으나 보이는 환자마다 이렇듯이 극으로 흉스러워 나환자에 대한 증오감이 대단한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 (4)

최흥종은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대하고 섬기는 자세에서 성육신의 의미를 깨달았으며 영적인 천지개벽을 하였다. 그는 나환자의 지팡이를 바로 집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보며 ‘이게 무슨 신앙이냐’며 자신을 책망하였다. 두 번째 ‘지팡이를 집어주시오’ 라고 태연하게 요구하는 포사이드의 말에 그는 깊은 양심의 가책으로 회개하며 지팡이를 주우며 예수의 십자가의 요체인 ‘사랑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았으며 동시에 예수의 영, 사랑의 영에 사로잡혔다.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를 통하여 일제의 억압과 망국의 한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한국인들의 예수로 살아야하는 운명을 메시지로, 계시로 받았다. 그 후, 그는 윌슨 선교사의 보조자로서 기꺼이 나환자 치료에 헌신하였으며 1912년에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기증하여 봉선리에 나환자 치료소(광주 나병원의 효시)를 세웠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전문병원이었다.

그는 1912년 8월에 김윤수 집사와 함께 광주 최초의 장로로 임직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에 의하면 양림리교회가 신도가 점차 증가하여 북문 내에 예배당을 기와집을 짓고 김윤수와 최흥종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5)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봉선리에 나환자들의 교회를 우월순 선교사, 이만준 등과 함께 설립하였으며 3년 동안 봉선리 골짜기에 세워진 진료소에서 나환자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복음을 전하였다.(6)

1914년 그는 뜻한 바가 있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여 제때에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1919년을 맞이하였다. 그는 남대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1920년 6월 출옥하여 광주청년회와 광주 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1920년 9월 4일 양동교회에서 회집된 전남노회에서 신학교 계속 수학을 허락받고(7) 같은 해에 학업을 마쳤다. 마침내 그는 1921년 1월에 신학준사를 인허를 받고 광부 북문외교회 노라복(Robert Knox) 선교사의 동사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았으며 남문외예배당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21년 10월, 전남노회 임시노회가 그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추천하여 1922년 9월 10일 11회 장로회 총회에서 김현찬과 함께 시베리아 선교사로 선정되었다.(8)

1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돌아 온 그는 남문밖교회에서 시무하였고 27년에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났으나 소련 정부에 의해 곧 바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 후 그는 제주도 모슬포교회를 거쳐 광주중앙교회에 시무하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와 교단들이 휘청거리는 1935년부터 그는 목회를 접고 은둔과 기행을 일삼았다.

1935년에 거세 수술을 받고 호를 5가지를 놓아 버린다는 뜻의 ‘오방(五放)’으로 짓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가사로부터 방만(放漫), 사회로부터 방일(放逸), 경제로부터 방종(放縱), 정치로부터 방기(放棄), 종교로부터 방랑(放浪) 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리고 오방(五放)으로 해방 된 자로 주께서 사랑하는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였다. 1937년 그는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하였다. 그리고 「성서조선」에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재촉함❯를 기고해 목회자들의 타락을 비난하며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자칭 ‘유산각’이라 부르는 조선의 가마  모양과 같은 한 평 크기의 판잣집을 수레처럼 만들어 끌고 다니며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9)

해방 이후에 나환자들을 위해 무등산 신림교회를, 결핵환자들을 위해 무등원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66년 5월 14일 86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5월 18일, 그가 사랑했던 나환자들, 결핵환자들과 걸인들의 오열 속에서 ‘광주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실로 광주선교부의 최초 개종자, 최초의 세례자, 최초의 집사, 최초의 장로였으며 한국인으로서 북문외교회의 최초의 당회장 목사였으며 전남노회의 최초 시베리아 선교사였다. 그는 우월순의 조수가 되어 나환자를 치료한 한국인 최초의 보조 의사였으며, 한국 최초의 나병원 건립을 위해 부친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바친 자였으며 나환자 교회를 세운 최초의 목회자였다.

그는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구분하지 않고 일체로 파악하였으며 삼위일체를 위한 섬김에 자신을 온전히 관제로 부었다. 다음은 그의 삶을 격동시킨 작은 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살펴보려 한다. 그는 회심 이후, 교회목회와 함께 사회적 약자인 나환자, 결핵환자, 걸인들의 치유와 자립을 위한 활동에 집중하였다.

사회 복지활동가로서 최흥종의 구라치료 및 빈민운동

그는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의 광주 제중원 방문 이후, 나병 진료를 시작한 우월순 (Wilson, Robert Manton) 선교사의 조수가 되어 회심의 모티프가 되어준 나환자들을 섬기며 구라(救癩)활동을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광주 선교부에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병원 설립(1912년)에 참여하였다.

그가 시베리아와 모슬포에서 사역하며 광주에 부재한 사이에 나병원은 광주 시민들의 항의로 여수반도 끝자락에 있는 율촌 마을로 내려가 ‘애양원’이 되었다. 그러나 ‘애양원’에서 치료 받은 환자들이 생활고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이후로는 사회 및 정치 사업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금일로 나환자들과 함께 하겠다.”(10)고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모슬포교회를 사임하였다.

그는 나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즉시로 활동을 시작하여 1932년에는 윤치호, 조병옥, 송진우, 김병로, 안재홍 등과 「나환자 근절협회」를 만들어 서울에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성과가 좋지 않자 서울 환자들을 데리고 여수 애양원으로 내려왔다. 그 후, 나환자들의 병원 증원과 수용 시설 확보를 위해 ‘나환자 행진’이라는 비상의 수단을 강구하여 움직이지 않는 총독부를 압박하였다.

그는 1932년에 광주에서 나환자 150명을 이끌고 총독부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이 열하루 만에 경성에 도착하였을 때 나환자 시위대는 400명에 이르렀다. 그는 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앞마당까지 들어갔고 우가끼 총독을 면담하여 ‘전국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을 요청하여 그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환자 대행진’이다.(11)

그가 나환자 시위대를 이끌고 경성에 가서 총독과 담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광주 양동 주민들의 항의로 양동 장터에 있던 빈민촌 판잣집들이 철거되어 2백여 명의 걸인들이 순식간에 거리로 쫓겨났다. 최흥종은 즉시 경양 방죽가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걸인들을 수용하고 북문밖교회 교인들과 YMCA 회원들을 동원하여 구휼을 시작하였다. 구제 소식이 널리 퍼지자 전남 각지에서 걸인들이 광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광주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졌고 노회와 광주 교인들 또한 그의 ‘빈민 목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난하는 자들이 늘어났다.(12)

가족들은 더 이상 그에게 가장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제도권 교회들도 그를 경원시하게 됨에 따라 그는 그의 호 ‘오방(五放)’대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목포에 머물며 나환자 구호활동에 전력투구하였으며 일제 말기에는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 칩거하며 나환자, 결핵환자, 빈민, 걸인들을 위한 활동에 몰입하였다. 해방이 되는 해, 1945년 9월에 ‘한국나병예방협회’를 창립하였으며 1948년에는 증심사 입구에 빈민자활촌 ‘삼애원‘과 ‘삼애학교’를, 1956년에는 음선나환자정착촌 ‘호혜원’을, 1958년에는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등원’을 설립하였으며 결핵환자 치유를 위한 ‘백십자여명회’를 만들었고 1951년에는 한국사회사업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나환자 치료를 시도한 광주나병원의 우월순 선교사의 최초 보조 의사였다. 그는 나환자의 자립과 재활, 그들의 삶의 질과 복지를 위해 활동한 최초의 사회복지 활동가였으며 최초의 나환자 교회, 결핵환자 교회를 세운 사회 사업가였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치열하게 사회적 약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의 생명과 존재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섬겼다.

그는 장로로 임직 받은 이래로 이십여 년의 섬김과 목회로 방만해진 자신을 성찰하며 ‘오방’ 선언으로 영적혁명을 시도하였으며, 폭력 혁명이나 타도, 이념 학습이나 대립과 충돌이 아닌 자유와 포기를 통해 오는 사랑으로 작은 자들과 함께 사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도모하였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한 세상을 이룩하고자 나환자들 속에 성육신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또 다른 면모인 사회운동가로서 삶을 살펴보자.

사회 운동가로서 최흥종의 독립운동과 정치참여

최흥종의 독립운동과 정치 참여는 신앙고백의 연장이었다. 그는 일본의 부당한 폭력과 수탈에 하나님의 정의로 대항하였으며 때로는 치열한 투쟁으로 때로는 침묵과 은둔의 방식으로 시대를 심판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서병기와 함께 대도의사회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그는 광주의 3.1운동 거사 준비를 북문안 교인들과 YMCA 청년 등에게 모의하도록 주선하고 자신은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석하고자 상경하였다. 그는 3월 2일 전도사인 김필수, 김철과 함께 서울에서 김범수를 만나 광주지역 만세시위를 협의하였으나 광주에 내려가지 않고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에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불렀고 ⌜신조선신문⌟을 나누어 주며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6월, 출옥 후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을 위해 YMCA를 창립하여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실시하였으며 유치원을 설립하고 여성만을 위한 야학을 따로 개설하였다. 1920년대에 그는 고통 속에서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과 인권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1920년 8월, 그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23년에 ‘광주소작인연합회’ 대표와 ‘광산회’ 총무로 그들의 소리를 대변하였다.

광주 지역사회는 매사에 사심 없이 정성을 다하는 그를 1921년 9월에 ‘광주청년회 의사원’으로, 1925년에 광주수해구제회 위원으로, 1926년에 광부여고보창립기성위원으로 선출하였다. 1927년 10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동시에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마약퇴치운동, 금주-금연운동, 공창 폐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에 재만동포옹호동맹위원, 1928년 광주교육보급회 이사와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광주는 물론 멀리 만주동포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중반에 호를 오방(五放)이라 짓고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호세아처럼  뜨거운 눈물로 사랑하던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위한 치열한 섬김과 개혁운동을 돌연히 중단하였다. 그는 나환자, 걸인, 결핵환자들만 옆에 두고 일체를 버린 채 무등산 증심사에서 해방의 날까지 은둔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그는 좌익과 우익 세력의 추대로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미군정청고문회 회장이 되었으나 이내 사임하였다. 1948년에 호남신문사 초대사장에도 취임하였지만 곧 사임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정치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광주 YMCA를 재건하였으며 삼애학교와 축산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작은 자들에게 필요한 일에 마지막 정열을 쏟아 부었다.

1880년에 태어난 최흥종은 시퍼런 청년의 시기에 대한제국이 망하는 과정을 지켜 본 자였다. 그의 내부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망국 청년의 상한 마음, 좌절과 의분이 있었고 한 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사랑이 있었다. 두 마음과 생각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며 그로 하여금 망설임 없이 나라 전체를 교회로, 선교의 장으로 섬기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상한 심령, 열망과 기도로 국채보상운동, 구라(求癩)운동, 3.1만세 운동, 야학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금연과 금주 운동, 공창 폐지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간회,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미군정청고문회, 호남신문을 통하여 정치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하는 목회의 연장선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리나 위치, 명예와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물러섰으며 미련이 없었다. 그가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회심을 한 이래 그는 한국의 예수, 호남의 예수로서 가장 작은 자, 나환자, 결핵환자, 걸인 그리고 빈민들과 함께 살도록 운명 지워 있었던 것이다.

시공을 넘어선 영적 만남, 불꽃 튀는 만남의 이야기는 우주적인 공명을 일으킨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한국에 거주하였으나 백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전율과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지 몇 개월이 안 되어 강도에게 머리와 목의 부상을 입어 죽을 고비를 겪었으나 강도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강도로 인한 부상을 치료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광주행 길에서 만난, 썩어 문드러진 나환자를 서슴없이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데리고 와 병자를 치료한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격의 없는 그의 사랑이 전주 지역에서는 호남의 전설, 전주지역의 문화유산이 된  이보한, 이‘거두리’를 낳았고, 광주에서는 호남의 성자, 오방 최흥종을 낳았다.

이보한과 최흥종에게는 그에게 받은 공통된 영적 유전인자가 있다. 첫째는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회심으로 경험한 것이다. 둘째는 그들은 유교사회의 가부장적 기득권과 가치관을 벗어 버리고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셋째 그들이 골고다 사랑의 아픔으로 작은 자들을 주목한 것이다. 이보한은 걸인과 나무꾼, 품꾼들을 주목하였고 최흥종은 나환자, 걸인, 결핵환자를 주목하였다. 넷째 그들이 사랑을 위하여 제도권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미련 없이 제도권 밖으로 나온 것이다. 다섯째 기도와 끓는 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여섯째 작은 자들을 목적화, 대상화 시키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산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비록 4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낳은 영적인 자녀들이 그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이어받았다. 지금도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이보한처럼, 최흥종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한국 근대사 첫머리에 나오는 포사이드 선교사는 위대하였다.

미주

(미주 1) 차종순, 『양림교회 100년사 (1)』, 215.
(미주 2)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330.
(미주 3) 차종순, 『양림교회 100년사 (1) 』, 215, 216.
(미주 4) 차종순, 『양림교회 100년사 (1) 』, 216, 217.
(미주 5)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175쪽 
(미주 6) 양전백·함태영·김영훈 / 이교남 번역 / 박용규 편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07.
(미주 7) 같은 책, 521.
(미주 8) 같은 책, 75.
(미주 9) 문명호,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양림교회 역사세부설명』, 23.
(미주 10) 인터넷, 나무위키, 「최흥종」
(미주 11) 연규홍, 『양림교회 100년사』, 54
(미주 12) 같은 책, 54.

 

참고서적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2.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송현강, 『미국 남장교의 한국 선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892-1919』, 도설출판 경건, 1998
차종순, 『양림교회 100년사 (1)』, 양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2003
연규홍, 『양림교회 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 2007
차재명 / 이교남 번역 / 박용규 편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양전백·함태영·김영훈 / 이교남 번역 / 박용규 편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문명호,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양림교회 역사세부설명』, 양림교회, 2019(비매품)
인터넷 (둘로스 블로그/ 쏠쏠한 일상 블로그/ 행복한 김PD/ 지식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 「최흥종」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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