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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지만 영원히 한국에 남은 선교사

기사승인 2021.09.04  16:2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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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사이드 선교사, 호남의 선교의 별이 되다 ⑴

▲ 윌리 헤밀턴 포사이드 선교사

선교사는 순례자다. 땅에 속했으면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을 찾아서 나그네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떠남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인생을 모험하는 자들이다.

선교사들이 자기 고향과 본토와 친척과 친구들을 떠나 선교지로 가는 일은 일단 문화와 풍습이 다른 곳으로, 도시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 사용이 열악하고 낮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자기 포기와 비움 없이는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선교사가 초월적인 성자의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니다. 보다 풍요롭고 편안한 세계를 포기하고 떠나온 자로서 가난하고 불편한 세계에 적응하며 두 세계에 사이의 미디어로서 양쪽 세계에 희망과 구원이 되도록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고독과 끊임없는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이다. 땅에 속했으나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야 하는 운명, 본국보다 이방의 선교지를 더 사랑해야 하는 당위성, 본국에 의존되어 있으며 일은 이국에서 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 그리고 일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으로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며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한국 근대사에서 선교사는 위대하였다

갑오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을사늑약과 러일전쟁, 일본의 조선 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였다. 주자가례에 의존되었던 반상의 신분사회, 조선사대부들의 관료사회, 수탈적인 조세 사회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조선 양반 관료들은 물론이고 상민과 천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선교사들은 복음으로 조선의 망국민들을 품고 바닥으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근대 교육과 의료 봉사와 복음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살만한 세상을 위해 수고하며 독립에의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모든 선교사들이 강제로 철수를 당할 때, 각 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한 선교스테이션은 만주를 포함하여 37개가 있었으며 모든 선교부에는 남녀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 시설과 직업훈련원 등이 있었다. 이 말은 기독교와 선교사가 한반도 곳곳에서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근대화와 새로운 문명에로의 전환과 의식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가 독립운동과 여성 운동은 물론이고 짐승으로 취급되었던 백정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는 기독교의 영향을 폄하하고 왜곡하고 공로를 다른 집단에 돌린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타락한 서구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매도, 비판을 하면서 기독교를 아편으로 정의한 것을 한국의 운동가들과 사회주의 지식인들, 극 보수민족주의 사가들이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다.

왜 우리는 우리 역사의 팩트와 지금도 진행 중인 엄청난 영향을 무시하고 사회주의가 비판하는 대로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가 마치 그런 것처럼 선교사들의 헌신과 공로를 같이 싸잡아 무시하며 외면하는가?

기독교를 마치 비정상적인 범죄자처럼 취급하며 우롱하는 유튜브들과 네거티브 언론인들, 교회를 자신들의 정적으로 취급하며 음해하는 정치언론인들과 정치인들에게 포사이드 (Forsythe, Wiley Hamilton 1904~ 1911) 선교사의 짧은 사역의 고난과 사랑의 수고를 증정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거듭난 이보한과 최흥종의 스토리를 덤으로 주고 싶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짧은 선교(1904년 9월-1911년)

포사이드 (Willy H. Forsythe)선교사는 1904년 9월에 남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다니엘, 조셉 놀란 의사와 함께 내한하여 전주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일하는 중에 괴한에게 칼침을 맞은 사건으로 1906년 봄에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7년 치료를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부터 목포 선교부에서 의사로서 전도와 의료봉사를 겸하였다.

1909년 4월, 그는 급성 폐렴에 걸린 광주 선교부의 오웬 의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가는  길목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병환자를 만나 자신의 말에 태워서 광주기독 병원인 제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었다. 그 후 그는 스프루 라는 열대 풍토병에 걸려 1911년 치료차 다시 미국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1918년에 소천하였다.

포사이드의 한국 사역은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사건으로 호남 선교의 별이 되었으며 조선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 되었다. 그는 1873년 미국 켄터키주 해로스버그에서 태어나 1894년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군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1904년 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여 그해 9월에 내한하였다. 그는 안식년으로 출국한 잉골드 선교사를 대신하여 전주 예수병원을 의료사역을 담당하며 한 편으로는 전킨 선교사와 함께 거리에서 걸식하는 아동들을 데려다 보호하였다. 그는 전주 선교부의 교우들 가정에 고아들을 위탁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선교부 산하의 논을 경작하여 자립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905년 3월 그는 익산 목천포 당뫼(1)에 사는 양반 가문의 강도당한(미주 2) 환자를 치료해달라는 부름을 받았다. 강도당한 자는 전주 이 씨 양반에 속하는 ‘이경호’라는 자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를 치료하고 시간이 너무 늦어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강도들이 다시 몰려와서 벽에 걸린 그의 옷을 보고 경찰로 오인을 하여 그를 칼로 마구 찔러 그의 머리와 귀, 목 등 여러 군데 깊은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포사이드는 밤새 이 씨 가족의 돌봄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고 곧 이어 군산선교부의 다니엘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았다. 그 후,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만 회복이 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갔다.(3) 그러는 사이에 전라 관찰사가 사건의 범인을 잡고 그에게 범인 처벌에 물었을 때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한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전주지역의 양반들이 앞을 다투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조지 톰슨 브라운의 『한국 선교 이야기』 97쪽은 이를 증명해 준다.

그해의 도시선교는 앞선 해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05년 2월까지 교회에 모인 남자들은 완전히 중산층 상이이거나 농부가 아니면 하층 짐꾼들이었다. …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었다. … 포사이드 박사가 상처를 입은 한 달 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의 이 씨 문중 사람들과 집안의 가장들이 큰 길에서 가마를 내려서 예배드리는 외국사람 집에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 도시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 이 사건이 본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체면이 깍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에 더하여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 왕진을 와서 강도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치료받는 과정을 지켜 본 ‘이경호’의 서자인 ‘이보한’이 자원해서 교회에 나온 것이다. 그는 부친이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진 마음의 빚과 테이트 선교사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에 나갈 사람을 찾을 때 자신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선뜻 자원 하였다.(4) 포사이드 선교사의 감화를 받은 그는 전주교회에 나와 전킨 선교사의 지도 아래 성경과 영어를 배웠으며 예수를 믿은 지 1년 만에 전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거듭난 이보한 이‘거두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포사이드는 선교사는 치료 차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치료를 마친 후, 전주 선교부로 돌아왔으나 1909년 목포 선교부의 프렌치병원의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조지 톰슨 브라운의 『한국 선교 이야기』, 147쪽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목포사역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목포의 포사이드 의사는 멀리까지 넓게 알려졌는데 병자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강렬한 복음의 열심 때문이었다. 강도를 만나 받은 상처는 치유되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 혼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뛰어들었다. 목포의 길거리를 오르내리며 한 손으로는 복음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다른 손으로는 약을 나누어 주었다. 그의 이름은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전설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그의 신앙을 위한 열심과 죄인들을 위한 측은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된다. 그러나 그의 사역을 찬란했지만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911년 장흡수부전증으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여 1918년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본가에서 사망했다.

포사이드는 그렇게 죽었지만 그는 선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예화를 한국 선교사에 길이 남겼다. 1909년 4월, 장흥지역에서 순회활동을 하던 오웬(Owen, Dr. Clement Carrinton) 박사가 급성 폐렴으로 광주 제중원으로 이송 중일 때 윌슨( Wilson, Dr. Robert Manton) 박사가 목포에 있는 포사이드를 광주로 불렀다. 그는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배를 타고 올라와 영산포에서 내려 광주로 오는 길에 노상에서 다 죽어가고 있는 나환자 여인을 만났다. 그는 나환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자기가 말의 고삐를 쥐었다. 그는 환자를 태우고 천천히 걸어오느라 사랑하는 친구 오웬의 진료는커녕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삼키며 환자를 제중원 의무실에 입원시키고 친히 치료를 하였다. 나병을 겁내는 제중원의 입원 환자들의 항의로 윌슨 박사는 병원 건축을 위해 만들었던 버려진 벽돌 가마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두 주 동안 환자를 지켜보고 그에게 서투른 한국말로 자기가 누구 때문에 그를 도와주었는지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목포로 돌아갔다.

당시 유진 벨(Bell, Rev. Eugene)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포사이드 선교사를 영산포에서 광주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효천까지 마중 가서 영접해온 두 사람의 조사가 있었다. 그들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나환자를 대하는 격의 없는 행동과 두려움 모르는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인 최흥종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근저로부터 흔들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환자를 돌보는 윌슨 박사의 조수를 자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광주 선교부에 기증하여 봉선리에 나환자 치료소(광주 나병원)을 세우게 하였으며 평생을 지극히 작은 자들인 나환자들과 걸인들, 결핵환자의 벗으로 살았다.

45세로 소천한 포사이드 선교사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30년을 준비하였으나 선교 현장에서 활동한 기간은 겨우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한국 선교사에 주는 의미는 자못 크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그의 사랑이 별이 되어 십자가의 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칼침을 당하고 용서한 사건’과 ‘나환자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말고삐를 잡고 오십 리 길을 걸어간 사건’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새로운 차원의 삶, 타인을 위한 존재로 살도록 우리를 강권한다.

포사이드 선교사에 의해 변화된 특별한 두 사람, 전북의 레전드, ‘거두리’ 이보한과 전남의 성자, 오방 최흥종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미주

(미주 1)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79.
(미주 2)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72.
(미주 3) 조지 톰슨 브라운, 『한국 선교 이야기』, 96.
(미주 4)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0, 381.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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