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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문화유산 ‘거두리’ 전도인 이보한

기사승인 2021.09.11  17: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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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사이드 선교사, 호남의 선교의 별이 되다 ⑵

▲ 거두리 이보한의 묘 ⓒGetty Image

이보한은 이경호의 서자지만 장남으로 1872년에 익산 목천포 당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서 왼쪽 눈이 실명하였고 후처의 아들로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며 외롭게 자랐으나 성격이 호방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후, 복음 전도인,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 겸 보호자, 불의에 저항하는 자, 독립운동가로서 예수 닮은 삶을 사는데 영향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 이보한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었는가

그 첫째는 테이트 선교사이다. 어느 날 테이트(Tate, Rev. Lewis Boyd) 선교사는 전주 유지로 잘 알려진 이보한의 아버지 이경호에게 복음을 전하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경호에게 다짜고짜 “아버지”라고 부르며 한국식으로 넙죽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의 소중화 의식에 빠져있는 그의 부친은 서양 오량캐가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내심 못마땅해 하였다. 그런 이경호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테이트 선교사는 이경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귀볼을 만지며 잘 생겼다고 칭찬을 하였다. 이미 심기가 불편해진 이경호는 모욕감으로 떨며 종들을 시켜 무례한 서양 오랑캐 테이트 선교사에게 몰매를 가하였다.

그러나 이경호가 외국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이 전주 감영에 보고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 전주 이 씨 문중의 기둥인 그가 옥에 갇히자 문중이 발칵 뒤집혀졌고 그의 석방을 위한 일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테이트 선교사는 단 하나의 용서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예수를 믿으면 방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경호로서는 양반의 위신과 체통을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감옥에서 속히 나오고 싶었다.

그런데 서양 오랑캐 피해자가 거는 조건이 고작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라’는 것이니 너무 맥 빠졌다. 양반이 덥석 대답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였지만 그는 우선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테이트 선교사에게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피일차일 미루었다.

서자인 이보한은 테이트 선교사 폭력사건을 통해서 부친의 행패와 위선, 선교사의 겸손과 사랑을 지켜보며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적이며 허세가 심한 양반의 정신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테이트 선교사의 정신과 신앙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이보한은 테이트 선교사를 전주 교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가 포사이드 선교사 상해사건의 영향으로 이 씨 문중의 대표로 전주교회에 등록하였을 때 테이트 선교사가 그의 성경공부와 영어 공부의 교사가 된 것이다. 그는 테이트 선교사의 지도와 격려를 힘입어 1년 만에 전주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로 거듭 났다.

둘째는  포사이드 선교사이다. 앞에서 소개하였던 대로 1905년 3월 이보한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그의 부친이 난자를 당하여 사경에 이르자 이보한은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왕진을 부탁하였다.(1) 당시 포사이드는 전주 선교부에 도착한지 겨우 4개월 지난 풋내기 선교사였다. 그러나 전킨 선교사와 복음의 열정이 통하였던 그는 의사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틈나는 대로 시장이나 여관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복음의 사람’이었고 그 복음을 전하려는 불타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다.(2)

그 날 포사이드 선교사는 이미 많은 일과로 지쳐있었으나 그의 절박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시골 길을 따라나섰다. 이경호의 치료 작업은 한 밤중에야 끝이 났다. 그는 밤길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선교부로 돌아가지 않고 이보한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운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밤사이에 일어났다. 그 강도들이 다시 몰려와서 포사이드 선교사를 자기들을 수색하러 온 경찰로 오인하고  칼로 마구 찔러 그의 머리와 귀, 목에 여러 군데 깊은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지만 이 씨 가족의 극진한 간호와 마을 한의사의 응급조치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사건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군산선교부의 다니엘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은 그는 군산 궁멀 예수병원을 거쳐 전주로 다시 돌아왔으나 쾌차하지 않아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결국 1906년 초 남장로회 선교부는 치료와 회복을 위해 그를 미국으로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서울과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이에 전라 관찰사가 강도상해사건의 주범들을 잡고 그에게 사건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며 처벌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전후 사정과 모든 것을 거두절미하고 ‘아무 조건 없이 용서 한다’고 하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강도 만난 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시골로 왕진을 떠난 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강도들에게 상해를 당하여 그토록 열망했던 선교 사역을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3년에 이르는 투병 중에 많은 좌절과 회의, 고난과 고독에 직면하며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분노나 증오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였다.

포사이드의 ‘용서’는 완고한 전주 양반들의 가슴에서 수상한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과 적개심의 응어리를 녹였다. 또한 그의 조건 없는 ‘용서’는 얼치기 양반 이보한의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주었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부친 이경호가 자신을 대신해서 교회에 나갈 사람을 찾았을 때 그가 바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파도처럼 자신을 덮쳐오는 포사이드의 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그 사랑에 자신을 의탁하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셋째 전킨 선교사이다.(3) 이보한이 전주 교회에 등록하였을 때 전킨(Junkin, Rev. William McCleery) 선교사가 담임 목회자였다. 그는 테이트 선교사로 하여금 성경공부와 영어공부를 지도하게 하였다. 그는 이보한의 복음에 대한 열망과 강렬한 변화에의 욕구를 감지하였으며 그가 1년의 과정을 마치고 교회의 대표적인 전도자가 되었을 때 그를 더욱 격려하며 지지하였다. 그가 전주 교회에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사실 확인을 위하여 교회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실로 그가 일으킨 파격적인 전도행각은 걸인들이 주요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제도권 안에 있는 교회의 암초가 될 수도 있었으나 전킨 선교사는 그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전도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받아들였다.

넷째는 그보다 먼저 크리스천이 된 백부의 둘째 부인인 큰 어머니였다. 서자로서 문중에서 천대를 받는 이보한은 억울하고 분하여도 하소연하며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전주 북문 안에 사는 큰 아버지 이건호의 집을 찾아가곤 하였다.(4) 사랑에 굶주린 그는 둘째 백모의 격의 없는 따스한 대접과 위로를 받으며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백모에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백모를 따라 곧잘 무릎을 꿇었다. 백모는 그에게 어머니를 대신하는 사랑이었다.

그는 백모가 잘 부르는 찬송을 따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새 찬송가 496장인 ‘새벽부터 우리‘로 시작되어 ’거두리로다‘로 끝이 나는 곡이다. 백모에게 이 찬송가를 배운 그는 어디서나 이 노래를 불렀다. 특별히 전주 남문 밖 장터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찬송을 부르면 장터에 온 사람들이 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였다. 그의 찬송은 영감이 있었고 감염성이 뛰어나 사람들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사람들은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로 반복되는 후렴 귀를 따라서 어느 덧 그를 ‘이 거두리’ ‘거두리 참봉’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자로는 거두리(巨杜裡)로 썼는데 “큰 뱃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5) 거두리는 전주뿐만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 다른 지역에 까지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보한이 ‘거두리’가 되어 산 삶은 문자 그대로 파격이었다. 예수를 만난 그는 비록 반쪽짜리 양반이었지만 알량한 양반의 기득권과 명예, 자존심과 권위를 포기하고 밑바닥으로 내려갔으며 사회적 약자가 되어 그들과 어울려 함께 살았다. 예수의 사랑에 미친 그는 예수의 마음으로 예수를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수도회와 거대한 종단에 속한 성 프랜시스나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보다 더 낮고 천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걸인과 나무꾼, 사회적 약자들과 동고동락하였다.

이보한의 삶은 누가 봐도 확 달라졌다. 한 마디로 예수 사랑에 미쳐버린 것이다. 예수에 미친 그의 삶, 그의 히스토리가 너무 기이하고 거룩하고 충격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은 비록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를 기억하며 그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를 전주의 정신으로 기록하고자 하였다.

2019년 12월, 전주시가 미래 유산 지정을 위한 시민제안 공모를 통해 “전주천 매곡교 및 싸전다리 뚝방길, 이거두리 이야기”와 “전주 최초의 고아원 터” 등 2건을 전주 미래유산으로 추가 지정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6) 그의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에 매곡교와 싸전다리를 잇는 뚝방길 주변에서 있었던 그의 걸인과 동고동락한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와 걸인들이 민족적 자존심으로 1919년 3‧13 만세 시위를 벌인 나라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보한의 변화된 삶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한 삶, 가난하고 초라한 삶이므로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굳이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하는 반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그의 삶을 빈민들에 대한 ‘동정’, ‘자비’, ‘선행’의 틀에 가두어 그의 성육신적인 삶을 착하게 살았다는 옛날이야기로 전락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고 실로 땅에서 하늘나라를 산 자유인이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이보한의 삶

치열하게 임박한 종말론적인 삶을 산 그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전도에 몰입한 삶의 이야기다. 개종 이후, 전도는 그의 삶이었고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는 날마다 남문 밖 장터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두리로다’라는 찬송을 부르며 복음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과 부자들의 집에 가서 ‘거두리로다’와 판소리를 열창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끈덕지게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의 복음 전파는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단호함이 있었다. 종리에 사는 부친의 친구 이돈수 진사를 전도할 때 화암사로 도망친 그를 교회로 모시기 위해 화암사에서 종리교회까지 수 십리 눈길을 청소한 그의 일화는 그의 치열하고 진지한 전도의식을 잘 말해 준다.

그의 전도는 하나님 나라에의 초청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방향 전환을 요구하였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라고, 살길이 여기 있으니 헤매지 말고 믿으라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는 예수의 도를 받아서 지긋지긋한 양반의 권위와 체통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우월감과 교만, 거짓과 위선, 음모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진실로 가문의 전통과 유교의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이 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된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신을 해방시켜준 복음의 자유와 평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에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대로 찬양과 판소리와 온갖 수고와 헌신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둘째는 걸인들과 빈민들과 동고동락한 삶의 이야기다. 그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구호한 이야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존중하였다. 그들을 열등한 자나, 낙오자, 언젠가 부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 천국의 백성들로 이해하였다. 그가 그들과 나누는 것은 우월감과 동정심으로 나누는 빵이 아이요, 사랑으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성찬이며, 하나님 나라 잔치를 배설하는 일로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 나는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잔치 집에서 판소리를 부른 삯과 소금을 판 이익금과 부자들에게 강제로 추렴한 구호금과 식량과 의복으로 싸전다리와 매곡교 주변에 사는 걸인들과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인색하여 죽을 때까지 찢어진 모자와 초라한 한복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사용하였다.

가끔 상관의 나무꾼들이 땔감을 다 팔지 못하면 그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면 그는 나무꾼들을 집합시켜 구령에 맞추어 전주 부중을 한 바퀴 돌며 시위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무꾼들을 데리고 부잣집에 들어가 강매를 하여 나무꾼들이 나무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7)

셋째는 걸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이야기다. 그는 걸인들을 데리고 만 다닌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을 동원하여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는 전주 3‧13 만세 시위 때 걸인들을 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전라도 지역 태극기 운반책을 맡아 거지대장을 앞세우고 전라도 지방 곳곳에 장날에 맞추어, 골목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다. 거지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 들면 그가 장터 한복판에 나타나 만세를 외치면 걸인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8) 그는 걸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그들의 긍지와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또한 그는 부자들과 기생들에게 돈과 금붙이를 거두어 독립운동자금으로 상해에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는 비밀리에 독립자금으로 모은 귀금속을 책보로 싸서 어린 손자 이중환을 데리고 지경역(대야역)으로 가서 전달하는 일을 자주하였다. 대개 한 번 전달할 때 2만 원 정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당시 쌀 한말이 70-80전이었고 남자 어른 하루 품삯이 1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모금이 독립을 열망하는 그의 초인적인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9)

예수를 믿고 전도를 본업으로 삼고, 걸인과 빈민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살아 온 그는 영생을 누리며 에녹처럼 하나님 동행하였지만 1931년 음력 8월 16일에 육신의 장막을 벗고 소천하였다. 그의 소천 소식이 전해지자 전주의 거지들과 상관 골짜기 나무꾼들 2백여 명이 그의 집에 모여 영결식을 자기들 부담으로 ‘걸인장’으로 장례를 치루겠다고 하였다.(10)

전병호의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5에 배윤숙이 정리한 당시의 장례식 광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리의 지게꾼들은 생업을 전폐하였고 걸인들은 상여 채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전주의 신작로는 조문객들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걸인들은 다투어 상여를 매었고, 수백 장의 만장 깃대는 좁은 목에서 상관 색장리 까지 장장 십리나 뻗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걸인들은 장지에서도 삽을 쓰기를 거절하고 손으로 흙을 파서 봉분을 만들고 자갈 하나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온 정성을 다해 안장을 하였습니다.

그 후, 나무꾼들과 걸인들은 1전씩 모아 120cm 높이의 비석을 만들었다. 비명은 ❮李公거두리 愛人碑❯라 하였고 비문은 “平生性質 溫厚且慈 見人飢寒  解衣給食” (한 평생 자비로운 성품,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먹여 주었네.) 으로 적었다.

전주 이 씨 문중에서 추방당한 그는 문중의 선산으로 묻히지 못하고 죽림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는 땅에 묻힌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걸인들과 나무꾼들과 그를 지지하며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과 교우들의 가슴에 묻혔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강도 상해 사건의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과 시련을 겪었으나 반쪽 양반 이보한의 가슴에 떨어진 씨앗이 되어 그를 성 프랜시스나 마더 테레사보다 더 겸허하게 걸인 속에 성육신 한  이‘거두리’ 로 만들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포사이드 선교사에 의하여 문둥병자와 걸인 속에 성육신한 최흥종의 히스토리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는 86 세로 장수하여 이보한보다 27년을 더 오래 살았으며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일에 몰입하였다.

미주

(미주 1) 블로그 ‘행복한 김PD’가 2014년 1월 23일에 올린 “이 거두리를 아시나요?”에는 북문 안에 살고 있는 이보한의 큰 아버지인 이건호가 포사이드에게 왕진을 요청한 것으로 나온다.
(미주 2)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 한인수 옮김,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892-1919』, 68.
(미주 3)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8.
(미주 4)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2.
(미주 5)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2
(미주 6) 블로그, ‘쏠쏠한 일상’에서 인용.
(미주 7)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3.
(미주 8)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4.
(미주 9) 전병호,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4.
(미주 10) 전북일보 2019년 12월 4일, ❮전주 최초 고아원 터, 이 거두리 이야기, 미래유산 지정❯ 기사에 나오는 동아일보 1931년 10월 3일자 신문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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