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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를 혐오하지만 사랑한다는 모순

기사승인 2021.04.02  16: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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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혐오가 정당하다는 사람들의 민낯을 확인했던 일들을 생각한다

▲ 2017년 10월, ‘[동성애: 현장이 답하다] 목회 현장에서 만난 성소수자들의 신앙과 삶 이야기’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진행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문자가 쏟아졌다. ⓒ서총명

2학기 복학을 준비하며 몇 명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다른 친구들의 생각이 궁금해서였다. 믿을만한 친구들에게 나는 물었다. “너 동성애 어떻게 생각해?” 이런 질문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지만 그때 당시 나는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단순했으며 굉장히 마초적이었다. 나는 ‘동성애’ 이 세 글자에 담긴 함의들을 알지 못했으며 그저 한국교회의 숨겨진 억압을 공론화 시켜야하는 신학생의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었다. ‘문제를 해결하자! 해결방법이 뭘까?’ 하고 말이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이 배제와 혐오는 쉽게 해결되리라 생각했다. ‘누가 누구를 혐오할 수 있다는 말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과잉대표하고 있으며 지각 있는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예상했다. 왜냐면 나는 교회, 신학교를 다니면서 존재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난적 없기 때문이다.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 교회와 신학교였다. 그런 끈끈함이 우리에게는 존재했다. “너 동성애 어떻게 생각해?” 라는 내 질문에 친구들은 “이성애와 다를 게 없지”라고 답했고 나는 그들에게 학교에서 이 문제를 공론화 시켜보자고 이야기했다.

2017년 9월, 복학을 했고 복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 총회가 있었다. (장신대는 신학대학이고 신학대학은 ‘교단’이라는 종교기관에 속해 있는데 학교가 속해 있는 예장 통합 교단은 1년에 한번 총회를 열어서 교단의 현안들을 다뤘다. 이 총회의 구성은 목사*장로 1500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90% 이상이 남성이고 50대 이상이다.) 2017년 9월 총회는 “동성애 쓰나미를 막겠다.”며 동성애 혐오 조치를 결의했다.

“성경에 위배되는 동성애자나 동성애 옹호자는 (교단 소속) 7개 신학대 입학을 불허한다.”
“총회는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자들을 배척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사랑으로 포용한다.”

‘동성애자와 동성애 옹호자가 성경에 위배되는 건가?’ 그렇다면 동성애 옹호자의 정의는 무엇이며, 어디까지가 옹호이며, 왜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삶이 있을까? 성경이 기록된 몇 천 년 전과 지금의 삶에 양식이 달라졌는데 어떻게 다 지킬 수 있냐는 말이다. 목사들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성경을 근거로 남을 판단하다? 성경은 법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목사와 장로들이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세상사람 모두를 성경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 있다. 너무나 쉽게 말이다. 목회자라는 사람들이 성경을 이렇게 정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동성애는 죄이지만 동성애자들을 배척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사랑으로 표용한다’라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학교도 입학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들이 너무 황당했다. 전형적인 목사들의 언어이다. 종교인의 양심상 존재를 대놓고 혐오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그들도 부담이 된다. 그러니 실컷 혐오와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고 마지막에 ‘사랑’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와 동성애 옹호자들이 성경에 위배되었다는 판단과 그들의 신학교 입학을 불허하는 결정이 어떻게 이리 쉬울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왜냐면 이 결의를 통해 상처받을 이들이 떠올라서였다. 혐오와 배제의 맞서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그들의 행태에 화가 났다. 없는 게 아니라 지워지고 있는 건데 말이다.

총대들 중 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번이라도 퀴어 크리스천들을 만나본 적 있을까? 그들을 만나 진지하게 대화를 해본 적이 있을까? ‘나는 아니니까’ 이 결의에 대상이 자신과 무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교회에 이들이 있다는 걸 한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런 결의에 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한번이라도 존재와 만남을 가졌다면 이런 낙인찍기를 할 수 없었을 거라 확신했다. 그저 총대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내린 이 결정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해야하는 상처로 남게 되는 것이다. 너무나 비겁하고 무책임했다.

총회의 결의를 보고 다른 이야기를 듣는 ‘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동성애는 죄다’라는 일방적인 메시지를 계속해서 들어왔는데 과연 이러한 주장이 신학적으로 어느 정도 연구가 되었는지, 목회 현장에서는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논의 과정 없이 이루어진 이번 결의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이야기 해보는 ‘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장을 여는 역할은 학생인 우리만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학교는 연구와 토론의 장,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동성애: 현장이 답하다] 목회 현장에서 만난 성소수자들의 신앙과 삶 이야기’라는 제목의 강연회를 친구들과 준비했다.

▲ 준비했던 강연회가 무산되어 파티를 준비하는 초대장을 만들었다. ⓒ서총명

학교에 정식 절차를 밟아서 강연 신청서를 냈고 강연 승인과 동시에 홍보문과 포스터를 SNS와 학교 곳곳에 게시했다. SNS와 포스터를 본 사람들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은 학교 내/외부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공론장 형성의 희망에 부풀어있던 그때, 행사 3일을 앞두고 학교가 일방적으로 강연을 취소시켰다. 학교 내부에서는 ‘강연’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이다. 정상절차를 밟아서 승인받은 강연을 학생과 아무 상의 없이 취소시키는 학교의 행정은 우리를 당황케 했다. 학생은 절차를 따랐고 학교는 절차를 무시했다.

사실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행사 문의를 받기위해 포스터에 개인 전화번호를 올렸는데, 전화랑 메시지가 하루에 몇 십 통씩 왔기 때문이다. ‘목사 될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 ‘동성애 사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이런 협박을 받게 되었고 이분들이 학교에도 전화해서 우리가 주최하는 행사를 진행할 경우에 학교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 뭐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학교가 부담을 느껴 행사를 취소시킨 것이다. 이때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학생들이 기획한 강연을 일방적으로 취소시키는 것은 학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학교가 교육의 장으로서의 최소한의 보장마저 내어주는 것이었다.

신학생인 내게 쏟아지는 비난과 협박을 보며 전투력이 상승했다. 반동성애 진영에서 내 이름을 ‘서종명’으로 잘못 알아서 매번 ‘서종명’을 찾는 전화와 문자에 웃음이 나기도 했고, 지금까지 소수자를 이렇게 협박하며 숨죽이게 했구나 하는 현실도 알게 되었다. 불의가 정의로 왜곡되어 폭력으로 표출되는 상황에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서 하는 강연은 취소되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고 어떻게 하면 현실을 전복시킬까 고민하다가 ‘강연 취소 파티’를 기획했다. “학교에서 못하게 하면 학교 밖에서 하면 되지 뭐” 판을 더 키워보자 마음먹었다. 카페 지하1층을 예쁘게 꾸미고, 포토존도 만들고, 행사 중간 노래를 불러줄 가수도 섭외하고 쫓겨남의 현장을 전복의 계기로 삼아 행사를 그대로 진행했다.

물론 마냥 즐거웠던 것은 아니다. ‘신변 보호’라는 낯선 상황이 우리를 당황케 했다. 혐오세력이 우리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행사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큰 위험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참석자들의 신변을 보호 하기위해 신청자에게만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었고 당일에도 신청자만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이런 안전장치를 만들면서도 이 상황이 웃겼다. 독립 운동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말이다.

우려했던 일이 생기기도 했는데 학교 내에서 동성애를 강하게 반대했던 학생이 행사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치밀하게 다른 사람의 이름, 다른 사람의 핸드폰 번호를 빌려 행사를 신청한 것이다. 왜 그는 다른 사람인척하면서까지 우리 행사에 와아만 했을까? 그 학생이 행사장에 나타났을 때 숨이 콱 막혔다. ‘아...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말이다. 학생들이 무언가를 공부하고 논의해보자는 장을 만드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지... 예상치 못했던 위기 상황에 노출되자 ‘퀴어’를 둘러싼 위협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광기어린 교계의 민낯을 마주한 것이다. 늘 따뜻하고 인자했던 얼굴이 한순간에 바뀌어버렸다.

이 강연회를 열고나서 우리는 반동성애 진영에 타겟으로 찍혀버렸다. 어른들이, 목사들이 ‘동성애는 죄야!’라고 말하면 고개 끄덕이면서 ‘아 그렇구나! 동성애는 죄구나’ 순응해야 하는데 ‘왜요?’라고 반문하는 학생들이 생긴 것이다. 어른들은 이것을 굉장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어? 이것들 봐라?’ 하면서 우리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교내의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학교 게시판을 이용해 우리를 공격하고, 언론에 기사화 되었다. 이른바, ‘종북’ ‘빨갱이’ ‘동성애’ 이 세 가지를 엮어서 우리를 학교에 있으면 안 되는, 한국교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위험한 학생들로 만들려고 했다. 학교를 계속해서 흔들면서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너희에 미래는 우리가 쥐고 있으니 가만히 있어라!’고 말이다.

처음 마주한 상황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학교라는 보호막 안에서 학생으로서 목소리를 내려고 한 것인데, 학교는 학교를 보호하고자 학생을 밖으로 내쫓은 것이다. ‘남성-신학생’ 경계에서 가장 멀리, 내부에 있었던 내가 경계 바깥으로 내몰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부에 있기에 안전하고 그렇기에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생각했던 나의 ‘안전’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믿었던 울타리는 무엇이었을까? 경계 밖으로 내쫓긴 나는 경계 안으로도 경계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내 꿈은 경계 안에, 현실은 경계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서총명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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