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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그리스도인들을 마주함

기사승인 2021.03.26  16: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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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바꾸었던 거룩한 만남을 생각한다

▲ 지난 2019년 9월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한 다양한 단체들이 깃발을 들고 퍼레이드에 나섰다. ⓒ권이민수

나는 ‘퀴어’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관심이 없었다라고 표현하기도 좀 애매한데,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 정도? 그런 존재가 있다라는 인식만 있을 뿐이었다. 주변에 퀴어 친구들도 없었고, 퀴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기에 퀴어는 머릿 속 어딘가, 이론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나에게 퀴어는 실재가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퀴어 크리스천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만남이 내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사실 호기심으로 나간 자리였는데 2시간 정도 이어진 대화에서 호기심을 넘어선 감동을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 느끼게 되었다. 당시, 신학생이었던 나는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휴학을 했는데 휴학을 한 이유는 졸업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학부 졸업과 신학대학원 진학을 앞두고 많은 고민에 빠졌다. ‘목회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왜 그 길을 가려는 걸까?’ 교회가 좋아서 신학교에 입학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 목회자를 꿈꿨던 나는, 새로운 결정을 앞에 두고 수없이 흔들렸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끊임없이 그 길을 찾고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애썼다. 그런 방황 가운데 퀴어 크리스천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혐오와 배제를 이겨나가는 그들의 삶의 여정을 들으며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 했다.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렇게 애쓰며 그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것일까?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려는 그들의 모습과 대비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교회, 내 미래를 맡기고자 했던 교회는 왜 그들을 예배의 자리에서 i아내려 하는 것일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공동체에 있었다. 교회공동체는 언제나 내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를 환대하는 곳 그런데 그곳에서 누군가 쫓겨나고 있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던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폭력과 희생을 강요하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계속해서 누군가를 쫓아내어 자신의 안정을 꾀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자라왔고, 교육받고 있는 나도 똑같이 되는 것인가? 하는 섬뜩함이 내게 찾아왔다. 그렇지만 내 편안함을 위해 그들을 외면해야 했다. 몰랐어도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아왔던 것처럼 내가 눈을 감고 그들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나와 무슨 상관일까? 나는 당할 일 없는 폭력이다. 나는 남성이며 신학생이기 때문이다.

“이건 아닌데...” 나는 이 현실을 굉장히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그건 내게 오늘 이 만남이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는 이 만남에 어떤 식으로든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내게 오늘 이런 만남이 찾아왔을까?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만남에 충실한 응답을 하는 것이 그 삶의 모습이 어떻게 되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쉽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만났고, 들었고, 보았기 때문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한 체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혐오와 베제의 현실은 그들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 되었다.

모든 만남이 삶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나는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불이 붙어있는데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발견하게 되고 “저 떨기가 어째서 타지 않을까? 가까이 가서 보아야겠다” 하며 떨기나무를 보았을 때,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그곳을 거룩한 땅으로 선포하셨다. 양을 치던 모세에게 호렙산은 굉장히 익숙한 장소였는데 그 익숙했던 장소가 거룩한 장소로 변한 것이다.

거룩한 장소란 어디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원래부터 거룩했던 곳이 아니라 우리 삶, 내가 익숙하게 다녔던 그곳, 늘 만나던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사람을 발견하고, 새로운 운동 장소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늘 거기에 있었고, 내 삶에 이미 와있던 그 곳을 이제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 마주함 속에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퀴어는 내 삶 속에 없었던 것이 아니다. 늘 가까이 함께하고 있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내 눈을 다시 들 때 나는 비로소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존재를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살 수 없었다. 이곳이 더 이상 나에게 안정감이나 행복을 전해주지 못했다. 살아가려면 이곳을 떠나든 변화시키든 어떤 선택을 해야만 했다. 교회에서 누군가를 쫓아내어 교회가 유지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누군가를 예배의 자리에서 배제한 체 예배가 드려진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모두 함께할 수 없다면 아무도 있을 수 없다. 그 폭력에서 안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만남 이후 복학을 기다렸다. 복학하면 학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왜냐면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수님들 그리고 학생들은 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이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도 마주하지 못했을 뿐 이런 현실을 알게 된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아주 순진하게도 말이다.

서총명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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