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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련 집회는 마치 부흥회 같았어요”

기사승인 2021.01.04  15: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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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⑵

▲ 충남 괴산에서 만난 기노련 탄생의 산파역할을 했던 신철영 선생.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라 시종일관 마스크를 착용한채 인터뷰가 진행되었지만 그의 답변 속에서 기노련과 기독노동운동에 대한 자부심은 숨길 수 없었다.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첫 번째 주자는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던 유동우 소장이었다. 그는 기노련 이전의 치열했던 노동 운동의 역사, 기노련의 활동 등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줬다.(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두 번째 기사)

두 번째 인물인 신철영 선생은 지난 기사 (「기노련의 근간, 산업선교회와 노동교회」)에서 기노련 설립 이전에 있었던 민주화 운동 전반의 흐름에 대해 나눠줬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이 합동조사본부를 구성해 민주화 운동세력과 여러 노조를 탄압한 이야기, 어려운 암흑기 속에서 노동운동의 불꽃을 지켜온 산업선교회와 노동교회의 노력이 그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났다.

특히 신 선생은 힘겹고 어려운 삶을 위로해줄 누군가를 찾아 보수 교회에 발을 들이게 된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독자들로 하여금 종교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다양한 기독교 운동단체 안에서의 합의를 통해 기노련이 설립된 이야기, 이후 기노련이 해체를 고민하게 된 시대상황과 대화들이 담겼다. 기독교와 노동운동은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신철영 선생의 솔직한 생각도 들어볼 수 있을 예정이다. 특히 “기노련을 통해 활동했던 이들의 삶이 바뀌었다”는 그의 증언을 통해 신 선생의 기노련에 대한 자부심과 뿌듯한 마음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기노련의 설립 과정과 선생님이 하신 역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기독교계 안에서 제가 한 일은 ‘기노련을 만들자’는 합의를 교계의 노동운동 관련된 단체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룬 것입니다.

당시 산업선교회는 영등포, 인천, 성수 등에 있었습니다. 인천은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성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영등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이 맡았죠. 우선 경인지역에서 시작해 이 세 개의 산업선교회 지도자들이 기노련의 설립을 합의했습니다. 경인지역의 노동교회 지도자들도 모아서 합의를 이뤄냈고요.

또 기독교 내에는 청년, 농민, 빈민 등 여러 다양한 인권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독교 운동권 내에서도 기독교 노동자 조직인 기노련을 만들자는 합의를 이뤄냈죠. 이런 합의들은 기노련 설립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대략적으로 그렇게 기독교 노동자 조직을 만들면 모두 그 조직을 환영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합의를 마무리하고 정비작업을 했습니다. 한명희 씨를 만나 조직에 대한 그림도 그렸고요. 이후에 유동우 씨가 합류해 세 사람이 대략적인 방향도 만들었습니다. 제 역할은 거기까지였죠.

이후에 기노련이 해체될 때도 관여했습니다. 87년 이후는 기노련 탄생 전과 조건이 많이 달라진 상태였습니다. 1987년 전국에서 대파업투쟁이 일어나면서 노동조합 조직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88년에는 민주노조들이 모여 지역별·업종별 협의체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88년 11월 13일 일요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날을 기억하며 지역별 협의회와 업종별 협의회 등이 모여 전국 노동자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했었습니다. 그 때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 모여 집회를 하고 여의도 국회까지 행진했었죠.

그때는 민주화 운동이 상당히 열기가 올라왔던 시기입니다. 그래서인지 경찰에서도 그냥 막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 당시 만장을 준비했었어요. 큰 대나무에 구호가 적힌 천을 매달았죠. 한 50개정도 준비했었는데요. 당시 연세대가 서대문 경찰서 관할이어서 서대문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저 만장만 내려달라. 그럼 행진을 막지 않겠다”는 거죠. 내부에서 회의를 했어요. 일부 강경파는 “우리가 왜 경찰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하냐? 만장은 우리의 요구를 담은 것이니 절대로 내리면 안 된다”라고 하기도 했는데 결국 논의 끝에 만장을 포기하기로 했죠. 만장을 거뒀어요. 그래서 행진을 무사히 할 수 있었습니다.

한 3만 명이 참석했었어요. 연세대학교에서 국회의사당까지 대로를 다라 쭉 행진했었죠. 특히 여의도를 넘어가려고 다리를 지나가는데 사람이 많으니 다리가 휘청휘청 했었어요.(웃음) 이 집회와 행진의 경험이 참 컸어요. 그 전에는 노동자들이 집회만 하면 최루탄이 날아오고, 두들겨 맞고, 잡혀가고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는데 서울 거리에서 3만명 이상의 노동자와 시민이 평화적으로 무사히 행진했으니까요. 그런 경험이 모여서 전국노동자협의회가 되고 이후 민주노총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그런 와중에 ‘기노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기노련을 싸안고 있으면 좁아진다. 그러지 말고 그동안 기노련에서 훈련한 사람들이 일반 노동운동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기노련에 연연하지 말고 해체하자’고 강력히 이야기했었죠. 지난 2015년에 기노련 창립 30주년 행사를 하는데 “그때 왜 해체하자고 그래가지고 우리가 지금 실체도 없어지고 그랬다”고 일부 노동자가 볼 멘 소리를 하기도 하더라고요.(웃음)

▲ 기노련 설립 이후에는 어떻게 활동하셨나요?

저는 기노련 설립 과정에만 관여하고 그 이후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제 일이 바빴던 것도 있었고, 제가 관여를 하면 노동자가 주체적으로 하는 일에 방해가 될 거 같았어요. 제가 자꾸 개입을 하면 기노련의 활동이 저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 거죠. 아마 제가 끼면 일은 빨리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조금 어렵더라도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 처음부터 있어야 이 단체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초기 유동우 씨, 한명희 씨 등과 대체적인 협의에만 참여하고 그 후 구체적인 조직화 과정에서는 빠졌습니다.

이후에 이분들이 힘든 과정을 겪었던 것으로 알아요. 그렇지만 일일이 저나 밖의 사람이 나서서 돕기 시작하면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고 여겼어요. 그 이후로 저는 역할을 멈췄습니다. 저는 이후 산업선교회에서 활동하다 일반 노동운동을 했습니다.

기노련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운동계 일부에서는 기노련을 알고 있었지만 일반인은 잘 모르죠. 어떤 면에서 그 이유는 기노련이 조직되고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 안돼서 87년 민주화 과정이 진행돼서가 아닌가 싶어요. 당시 전국적인 투쟁이 있고 노동조합이 여기저기 조직됐습니다. 역설적으로 이렇게 민주화가 빨리 진행되면서 기노련의 자기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 노동운동계에서 오랫동안 활동도 하시고 기노련 탄생에도 큰 역할을 하셨는데 원래 기독교 신자셨던 것인가요?

저는 77년쯤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님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전에 기독학생운동계에서 활동을 하면서 교회와 관계는 맺고 있었죠. 교인이 되기 이전에 노동운동을 먼저 시작했고 그 계기로 기독교인이 됐습니다.

▲ 기독교와 노동운동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기독교가 노동운동 하는 것을 두고 정치적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노동운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냐고 묻고 싶어요. 역설적이게도 그 또한 정치적이죠. 보수적으로 정치적인 것이거든요. 그런데 보수적인 사람들은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는 정치적이라고 하고 본인들은 신앙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건데 이는 예수시대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려서 십자가에 달린 것이지 단순히 순수 신앙만을 말하다 잡힌 것은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가지고 굳이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히브리’라고 하는 그 곳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 막연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됐던지 간에 자기가 현실적으로 당하고 있는 어려움, 물론 개인적인 어려움도 있겠지만요. 그 어려움이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나 부당한 문제라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본인 자신도 해방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도 같이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미 구로공단의 유명한 교회들에 대해 말했지만, 정말 깜짝 놀랐었어요. 어느 날 산업선교회 회원들이 그러더라고요. 자기 공장 내에 어느 교회 지부가 생겼는데 거기서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가지고 사탄이라고 취급하더라고요. 그 때는 참 문제로구나 어렵구나 생각했었죠.

87년 민주화운동과 노동조합 생기고 난 이후에 우연히 그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됐는데 그런 교회의 교인들이 현저하게 줄었다는 겁니다. 저는 그 사실을 듣고 노동자들이 보수적이어서가 아니라 현실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런 보수 교회로 갔던 것을 알게 됐어요. 현실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잘못된 신앙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는 사실도 깨닫게 됐고요.

▲ 노동운동가 신철영에게 기독교 신앙이란?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주변의 같은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도 그런 노력을 하다가 정치범으로 몰려 십자가에 사형을 당한 것이니까요. 이런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더 열심히 참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오늘날에도 여러 현장에서 기독인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이 많은데요. 기독교 운동의 선배님으로써 이런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격려나 위로의 한 마디가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뿐만 아니라 남들도 위하며 살아가는 것인데 단순히 복을 내려달라는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스스로 노력하면서 자기와 남을 해방시키는 분들을 마음으로나마 지지하고 격려하고 싶습니다.

▲ 혹시 더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기노련은 기독교 노동자를 하나로 엮고, 80년대 초중반 모이기 어려웠던 시기에 교회라는 공간을 활용해 집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집회를 열면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노동자들도 왔어요. 개별 공장의 노동자들은 작고 약해보였는데 저희가 모여 보니 우리는 작지도 않고 힘도 있더라고요. 집회는 마치 부흥회 같았어요. 집회를 통해 다시 힘을 얻고 가고 그러다 맥이 빠지면 다시 집회로 힘을 얻고 가고요.(웃음)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2015년 기노련 창립 30주년 행사에서 만났었습니다. 그 분들의 삶이 기노련을 통해 바뀌었더라고요. 그 분들이 당시 잠깐 기노련을 통해 노동운동에 참여해본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삶의 방향성이 변화됐습니다.

기노련에서 활동하면서 잘못된 일들을 보게 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나서서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기노련 이후에도 삶의 현장에서 지속됐던 거죠.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분들이 기노련의 정신을 가지고 삶을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 분들이 원래는 보수적인 신앙인이었는데요. 고백하길 “자기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갈 사람들이었는데 여기(기노련) 들어와서 삶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기노련 활동 자체는 짧은 시간동안 이뤄졌고 기노련이라는 이름으로써 사회에 미친 영향이 엄청 크지 않을 수 있지만, 삶이 바뀐 이들을 통해 기노련의 정신은 이어졌다는 사실이 내심 감사하고 뿌듯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러 기독 운동진영에서 열심히 현장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 과거에 비해 그 규모도 활동 영역도 많이 줄어들었을 지 모르지만, 예수를 따르겠다는 그 열정만은 여전하다. 이런 열정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철영 선생과의 대화는 먼저 그 삶을 고민하고 개척해 나간 무수히 많은 선배들에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비록 기노련은 사라졌지만, 신 선생의 말처럼 기노련의 정신은 여전히 현장에 머물고 있는 이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중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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