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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련의 근간, 산업선교회와 노동교회

기사승인 2020.12.28  16: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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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⑴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첫 번째 주자는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던 유동우 소장이었다. 그는 기노련 이전의 치열했던 노동 운동의 역사, 기노련의 활동 등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줬다.(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두 번째 기사)

이번 기사의 두 번째 인물은 신철영 선생이다. 그는 기노련의 탄생에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충북 괴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충북 괴산은 수도권에서 차를 몰고 2시간 반쯤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도심의 번잡함을 지나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어느새 깨끗한 자연의 공기가 마음을 시원케 한다. 괴산에 도착한 23일 코로나19 전파 위험으로 텅 빈 괴산군 소수면 복지회관 1층에서 신철영 선생을 만났다. 과연 그는 우리에게 기노련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게 될까?

▲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출범의 산파역할을 했던 신철영 선생. 그는 5년 전에 충북 괴산으로 이사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권이민수

▲ 독자님들께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저는 ‘신철영’입니다. 저는 1950년생이고요.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기계 쪽을 전공했습니다. 당시 서울대 공과대학에 ‘산업사회연구회’라는 학생운동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동아리는 기독교 쪽과 연관돼 있었습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인천산업선교회와 연결돼 있었죠. 그래서 동아리가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전반적인 민주화운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 특히 노동운동에 열심이었죠. 그래서 산업선교회나 노동운동단체와 교류를 많이 했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인천산업선교회와 KSCF에서 운영하던 학사단 활동에 참여했었습니다. ‘후지카’라는 석유난로를 주로 제작하는 회사에 들어가 여름방학 1달 정도 공장실습을 했습니다.

그 인연으로 78년 7월부터 88년까지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실무자로 일했었어요. 그 뒤에는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라고 해서 ‘민주노총’이 생기기전까지 각종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일하다 이후에 공동대표도 했었습니다. 민중당에도 잠깐 참여했다가 91년 선거에서 민중당이 패배해 해체당하며 그만뒀죠. 93년부터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참여해서 사무총장을 했고, 지금은 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제가 활동했던 일을 이야기하자면, 현재 ‘아이쿱’이라는 생활협동조합이 있는데 당시에는 ‘21세기생협연대’였습니다. 98년도에 그 생활협동조합을 만드는데 참여했었습니다. 93년에는 부천지역에 ‘부천생협’을 만들고 거기에 회원단체로 참여했었고요. 노무현 대통령 정부 때는 3년 정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들어가서 사무총장, 위원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여기 괴산군에는 5년 전 이주했습니다. 지금 이곳에 집을 짓고 살고 있어요.

영등포산업선교회 일을 하면서 노동운동에 깊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고, 기독교계의 민주화 운동에 같이 쭉 일을 해왔었습니다.

▲ 기노련은 포털사이트에 제대로 검색되지 않을 만큼 독자들에게는 낯선 이름입니다. 기노련을 소개하신다면?

기독교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해서 당시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던 부조리함, 어려움, 불법적인 대우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단체였다고 소개하고 싶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기노련의 설립과정에 초반부터 함께하셨는데요. 기노련이 설립되게 된 시대적인 배경이나 기독교 내의 어떤 흐름들이 있었을까요?

산업선교회가 7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는 활발하게 활동했었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 말기부터 산업선교회를 향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자료를 찾아보면 있을 텐데, 당시 언론에서 산업선교회를 향한 악선전을 했었어요. 뉴스 보도는 말할 것도 없고 특집 프로그램까지 만들어서 방영했어요. 국민들에게 이런 단체는 대단히 위험하고 나쁜 단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한 거였어요. 사실상 정부가 뒤에서 조종했던 거였죠. 예전에 산업선교회에서 활동했었지만 불만을 품고 그만 둔 사람들을 동원해서 ‘내가 산업선교회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는 내용을 담은 강연을 각 공장마다 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 말기에 산업선교회가 참 힘들었죠.

박정희 정권은 여러 노동운동계를 친유신적, 친정부적으로 재편했어요. 그 당시 한국노총 하나 밖에 없었는데 한국노총은 72년도 10월 유신을 두고 지지 선언을 합니다. 노동운동계를 정권 입장에서 정리를 했는데 그 와중에 문제가 되는 몇 개의 민주노조가 있었어요. 이런 민주노조들은 산업선교회랑 깊숙이 관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권은 민주노조를 하나하나 깨부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은 78년도 인천에 있는 동일방직 민주노조를 깨부순 사건인데요.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인천산업선교회랑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 민주노조를 남자 노동자를 동원해 똥물을 뿌리면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깨부쉈죠.

이후 정권에서는 ‘YH사건’ 이후 ‘합동조사본부’를 만듭니다. 경찰, 검찰 등 다양한 수사기관들이 합동으로 조사하게 만든 거죠. 당시에 ‘도산계’라고 했는데요. 산업현장과 관련이 있거나 민주 노동조직과 관련 있던 사람들을 말하는데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죠. 목적 중 하나가 이들이 좌익 세력과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몇 달 조사 후에 ‘좌익 세력과 관계가 없다’는 발표가 있었죠. 그런데 그 조사 과정에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했던 겁니다.

그러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 과정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 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어도 탄압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됐죠. 노동법도 개정하면서요. 그 중 하나가 ‘제3자개입금지법’인데요. 그게 고약한 법이었어요. 노동조합의 노동자가 아니면 노동문제에 개입하지 못하게 한 것인데요. 산업선교회 같은 단체의 발을 묶는 법이었어요. 그 후에 또 합동조사본부가 구성돼요. 합동조사본부는 검찰, 경찰, 보안사, 중앙정보부 등 다양한 조직을 모아 노동계 정화 운동을 했습니다. 민주 노조와 관계된 사람을 붙잡아 조사하고 해고시키고 그랬었죠.

대표적인 사람들이 청계피복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상당히 강력히 저항했지만 결국 구속도 되고 하며 정리가 됐습니다. 콘트롤데이타 노조, 원풍 노조 등도 이후에 차례로 정리됐습니다. 이 여파가 오래갔었어요. 공장 내에 뿌리를 박고 있는 민주노동조합들은 정리돼 버렸습니다. 이후 사실상 공장 내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어려웠고 노동조합을 민주적으로 바꾸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때가 83년부터 85년 정도인데요. ‘민주노동조합의 암흑기’였죠.

기노련의 필요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에는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배경이 있는데요. 당시 젊은 목회자들이 작은 교회를 설립하고 노동 목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교회를 당시 노동교회라고 불렀어요. 이런 노동교회가 구로공단이나 인천 공장지대 등에 많이 생겨났습니다. 노동교회가 늘어나게 되면서 기독교 노동운동에 대해 고민도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 기노련 설립 이전, 이미 산업선교회 같은 기독교 노동운동단체가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기노련을 설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교계 내에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중심으로 ‘산업전도회’ 같은 부서를 가진 교회가 몇 군데 있었습니다. 또 당시 구로공단 가까이에 있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했었고요. 어떤 보수적인 교회는 공단 내에 지부도 만들었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보수적인 교회들의 메시지 때문이었어요. 이들은 ‘노동운동에 참여하면 절대 안 된다’, ‘노동운동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공장 관리자에게 순종해야 한다’와 같은 메시지를 노동자들에게 전달했죠. 그러니 공단은 교회 지부를 환영하는 분위기였어요.

노동자들은 당시 너무 힘들었습니다. 너무 힘드니깐 어떻게 신앙에라도 기대서 그 힘든 것을 벗어나려고 했던 거죠. 이런 노동자들의 심정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당시 유명했던 보수 교회들에는 노동자가 몇 백에서 몇 천씩 모였었습니다 그러나 87년 노동자 대파업이 있었는데요. 그 이후에 그런 교회들의 교인이 굉장히 많이 줄었어요. 더 이상 교회를 통해 힘든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런 현상을 보면서 저는 ‘노동자들이 정말 힘들었구나. 사회 내에서 다른 희망이 없던 거구나’ 했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에 기대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으나 실패한 거죠.

교회 내에는 노동운동 관련 조직이 있든 없든, 교회가 보수적이든 아니든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많은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더라도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현실을 개척해나갈 수 있게 한다면 교회가 굉장히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그래서 교회 내 노동자를 조직해낼 필요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또 당시 기독교 노동계는 산업선교회와 노동교회가 중심이었어요. 기본적으로 목회자 중심이었던 거죠. 저는 이 구조를 탈피하기 위해 노동자 주체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단시일에 목회자 중심의 구조를 탈피하기 어렵겠지만,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노동자를 조직해내면 노동계에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기노련을 설립하는데 힘을 보태게 됐습니다.

▲ 기노련 설립 과정에 유동우 선생님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는데요. 설립 과정에 함께한 멤버가 아닌 외부 인사가 초대회장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동우 씨는 인천 쪽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그 역할을 감당했던 분이었는데요. 무엇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인천산업선교회에서 추천이 들어왔습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는 한명희 씨를 추천했었죠. 그렇게 두 분을 추천을 받았었는데 최종적으로 유동우 씨가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선출되게 됐습니다.

신철영 선생은 차분히 기노련이 탄생하기까지의 시대적 배경과 교계의 흐름을 풀어줬다. 특히 정권의 탄압과 보수적인 교회의 노동운동을 죄악시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노동자들을 향한 비전을 품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 기노련 탄생의 주역이 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다음 기사를 통해서는 신철영 선생이 기노련의 탄생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왜 기독교 신앙을 놓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예정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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