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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치열한 사상 싸움에서도 기독교정신을 놓치지 않았다”

기사승인 2020.12.25  16: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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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⑵

▲ 기노련 초대회장을 역임한 유동우 소장은 기노련이 한국노동운동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이야기 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아갔다. 민주화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 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첫 번째 주자는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약했던 유동우 씨다. 현재 유동우 씨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기념관추진단’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보안관리소장을 맡고 있다.

지난 기사(「기노련, 노동자들의 울타리가 되고자 했다」)에서 유동우 소장은 기노련에 합류하기까지, 70~80년대 치열했던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반인권적인 독재 정권의 탄압 속에서 민주화의 불씨를 지켜내기 위해 애써 온 민주화 운동 열사들의 희생과 노고에 대해 자세히 풀어주었다. 특히 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노동운동을 공안문제로 둔갑시켜 폭력을 휘둘렸는지 증언해 주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본격적으로 기노련의 활동 그리고 사회운동 진영과의 갈등도 소개한다. 유 소장은 기노련의 성공적인 활동을 이야기할 때면 자부심으로 눈이 빛나기도 하고 활동이 어려웠던 이야기를 나눌 때는 다시금 수심에 가득차기도 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이 유 소장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위로와 격려가 됐는지 풀어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유 소장은 “지금 기독교 정체성을 가지고 열심히 투쟁하는 이들에게 잘하고 있으니 위축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라며 격려의 말도 잊지 않았다.

▲ 선생님께서 초대 회장을 하시면서 기노련은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기노련의 활동’하면 전 대중 집회가 가장 기억에 납니다. 그 당시에 다른 조직은 대중 집회를 열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기노련은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조직을 지향하니까 교회에서 예배의 형태로 대중 집회를 열 수 있었거든요. 한번 열면 대중이 1천 명~ 2천 명씩 모이고 그랬어요. 당시 다른 조직에서 여는 집회는 훈련되지 않은 대중들이 참여할 수 없었어요. 집회가 어떤 형식이냐면, 불시에 어느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화염병도 던지고 강하게 투쟁하는 모양새였거든요. 그러니 대중이 많이 모이면서 힘을 얻는 것이 불가했죠. 집회가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진행한 대중 집회는 많은 이들이 모일 수 있었어요. 미리 예고도 하고 홍보도 하니까. 사람들이 집단으로 몰려왔어요. 설사 경찰이 집회를 막아도 이미 모인 인원이 많아서 다 뚫고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래서 다른 단체에서 대중 집회 좀 열어달라고 요청이 오기도 했어요. 집회만 열어주면 자기들이 500명 이상 동원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죠.(큰 웃음) 아니, 대중이 제 재산도 아니고 그런 약속을 하나 싶었어요. 그냥 같이 하는 거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죠.(웃음) 아무튼 당시 대중 집회는 기노련이 다 했어요. 이건 다른 단체도 인정하는 부분이에요.

그밖에 (기노련이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조직이라) 선전 전단지도 많이 뿌렸어요. 임금인상 투쟁 같은 경우도 기노련 이름을 넣어서 전국적으로 선전 전단지를 수백만 장 뿌리고 그랬죠.

저는 기노련 의장 신분으로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서 노동계를 대표해 상임공동대표로 참여하기도 했어요. 법조계, 교육계, 정치계 등 각 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씩 총 13명 정도 상임공동대표가 임명됐거든요. 복잡다단한 노동계를 대표해서 제가 참여한 거죠. 그 정도로 기노련은 운동의 중심을 잡았어요.

결론적으로 합법적인 틀 안에서 기노련은 대중을 상대로 대중 집회와 같은 다양한 활동을 했고요. 여러 다른 단체들 사이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 기노련에서 활동하시면서 힘들었던 기억도 있나요?

당시는 사상싸움이 치열했던 시기였어요. 그 사상싸움으로 인해 고생하기도 많이 했었죠. 서울노동운동연합(이하 서노련)을 비롯한 일부 노동 운동계에서 70년대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어요. 70년대 당시 산업선교회가 지도했던 민주노조 운동이 기독교적 온정주의로 가득 찼다는 주장이었는데요. 기독교는 불쌍한 사람을 시혜적으로 돕는 형태의 운동을 하니깐 기독교계의 노동운동은 정치의식이 결여됐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정치적 변혁을 이룰 수 없고 한계가 있다는 거죠.

반미운동도 영향이 있었던 거 같아요. 기독교는 어쨌든 서구의 종교였으니까요. 개인적으로 그들의 주장이 어느 정도는 맞는 부분이고 들을 만한 이야기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죠. 그렇게 기독교 노동운동을 비판하던 이들에게 노동운동의 근본 목표는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었어요.

서노련에 속한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혁명가라는 뜻을 담아 ‘알다’라고 부르곤 했어요. 본인들 조직을 두고는 전위 조직이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문제는 전위 조직으로 파악되지 않는 다른 조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에요.

저는 노동운동은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중조직을 지향했어요. 기노련도 그런 단체였고요. 제 생각에 전위조직은 지하화될 수밖에 없고 비밀 유지가 엄격해질 수밖에 없어요. 비합법적이고 위험한 활동과 주장을 하니까요. 강철 같은 사상 무장과 규율이 중시되고 멤버들은 고도로 훈련되죠. 그러다보니 일반 대중이 전위조직의 활동에 낄 여지가 전혀 없어요.

어떤 전위조직 멤버는 어느 날 저한테 ‘지도 받으라’며 오기도 했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그 사람한테 “나를 가르쳐주고 지도해주겠다니 고맙다. 내가 학교도 제대로 못 나와서 어린 사람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내가 당신의 지도를 받아야 하냐?”라고 그랬더니 “선배님은 대중조직, 우리는 전위조직입니다. 대중조직은 전위조직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라더라고요.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인데 (큰 웃음) 그래도 화가 나서 그에게 고함을 질렀어요. “당신은 내가 대중조직이니깐 전위조직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데, 훈련도 되지 않은 대중조직을 맡고 있는 사람한테 내가 전위조직이라고 자기 정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전위조직이 도대체 어디 있냐? 나니깐 이해하고 넘어가지 우리 기노련에 있는 조직원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빨갱이라고 생각해서 당장 고발한다. 전위라고 하는 것은 대중 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다. 대중은 전위라고 알지도 못한 채 전위조직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라고 답했었어요.

또 “당신은 스스로 혁명가라고 자처하면서 혁명에 대해 너무 모르고 너무 쉽게 아무한테나 지도받으라고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우리는 대중조직이다. 대중조직은 합법적이면 합법적일수록, 공개적이면 공개적일수록 좋다. 합법적이고 공개적이어야 아무나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다. 비합법적이면 엄청난 결단이 필요한데 일반 대중에게 그런 결단을 하라면 훈련도 안 받은 상태에서 가능하겠냐?”라고 했었죠.

이처럼 전위조직과의 사상적 갈등이 참 컸어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86년으로 기억하는데 서울 독산동의 신흥정밀이라는 기업에서 ‘박영진’이라는 분이 분신자살을 했어요. 그 죽음을 두고 정권에서 대림병원에서 최루탄도 쏘고 하면서 시신을 탈취했었죠. 열심히 막았지만 결국 빼앗겼어요. 그렇게 정권이 시신을 빼앗아 완전 가루로 만들어서 다시 부모에게 줬었죠. 박영진 열사의 부모님과 친구들이 재를 받아서 산의 한 나무 밑에 그 재를 그냥 소복이 쏟아 놓고 갔어요. 그랬다가 후에 다시 그 재를 가지고 와서 장례식을 치룬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서노련과 참 많이 싸웠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기여서 지독한 탄압이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저는 가급적이면 모든 민주화 세력이 다 같이 모여 분노할 수 있는 큰 대중 집회가 있으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문익환 목사님이 계셨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부터 종로 5가의 에큐메니컬 단체들, 가톨릭 단체, 노동운동 단체 등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은 다 모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죠. 장례위원을 그렇게 꾸리자고 주장했던 거예요.

그랬더니 서노련에서 난리였어요. 그들 말로는 ‘일천 만 노동자의 순결한 피를 어떻게 그런 쁘띠 부르주아와 함께 해서 더럽히려고 그러느냐’는 거였는데요. 정말 크게 반대했었어요. 그래서 제가 참다 참다 그냥 서노련을 馨 진행하자고 이야기했었죠. 그렇게 서노련을 제외하게 됐어요. 문익환 목사님을 장례위원장으로 모시고 전 간사로 장례식을 준비했었죠. 나중에 장례를 며칠 앞두고 서노련에서 왔더라고요. 이름을 넣어달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함께 하게 됐죠. 그만큼 사상적 갈등이 치열했어요. 개인적으로 저는 분노가 컸었죠.

앞서 말씀드린 임금인상 관련 투쟁도 80년대 중반에 기노련만 하기 어려워서 가능한 공동투쟁으로 하자고 했었어요. 기노련이 다 모았죠. 서노련, 인천노동운동연합 등 여러 노동운동 단체가 다 모였어요.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서 간첩처럼 은밀하게 모여 회의도 하고 그랬죠. 그때 다 같이 최저임금을 올해 얼마로 요구할 것인지를 논의했어요. 그런데 서노련에서 최저임금이 아니라 생활임금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당시는 한국노총이 산출한 최저임금의 절반도 못 미치는 저임금을 받던 시절인데 말이죠. 최저임금단계를 넘어선 생활임금을 주장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고 절박성이 떨어진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설득력이 떨어져 지지도 받기 어렵고요. 물론, 합의가 가능했지만 다른 단체들도 무조건 생활임금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에 지쳐서 서노련과 결별을 선언했어요. 그렇게 기노련의 주도로 임금인상 투쟁 진행됐죠. 사상적 갈등의 한 사례입니다.

물론, 내부에서도 이런 사상적 갈등은 치열했어요. 저는 항상 개량주의자로 취급됐어요. ‘저 선배는 정치 투쟁이나 정치의식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은 멤버도 있었고요.

▲ 유 소장은 80년대 중반 한국사회 노동운동진영의 복잡한 지형도와 사상싸움에 대해 이야기 하며 회환에 젖기도 했다. ⓒ권이민수

▲ 기노련 활동의 아쉬웠던 점은요?

기노련에는 학생 출신이 많이 들어와 있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학생들이 몇 사람 들어와 있었어요. 그래서 ‘기노련 신문’을 만드는 활동 등에 많이 참여했어요. 얌전한 학생들이었는데요. 이 학생들의 기본적인 사고에는 기독교나 교회라고 하는 것은 혁명 운동을 하기 위해 수단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전 그 학생들과 논의하면서 “기독교를 활용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기존의 기독인보다도 훨씬 더 기독교적인 자세를 가지고 솔선수범해야 한다. 그래야 대중들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어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 기독교 내부에서 ‘기독교는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주장이 있곤 합니다. 기노련이 활동했을 당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혹시 이런 주장이나 보수적인 시선으로 인해 어려움은 없었나요?

당시 각 지역에 산업선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산업선교회는 위원회 조직이거든요. 각 교단의 영향력 있는 교회 목사님들이 산업선교회의 위원들이었어요. 위원 목사님들의 교회들이 진보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지라도 기본적으로 교회의 목사님들이 산업선교회 위원이니 큰 말은 대체로 안 나왔어요. 또 기노련이 조심스럽게 접근했죠. 저는 ‘우리가 조심스럽게만 접근하면 교회가 우호적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교회가 보수적이라고 욕하는 기노련 멤버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교회는 보수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기노련 광주지부에서 한 기노련 멤버가 죽창을 들고 투쟁한 적이 있었어요. 기노련을 도와주던 목사님들은 그 모습이 생경해 충격을 받았죠.(웃음) 그래서 이를 두고 문제 삼고 저에게까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었어요. 그래도 중앙 기노련은 중심을 잘 지키려고 했어요. ‘모든 행사든 투쟁이든 우리의 이름이 기노련이니 가능한 기독교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가진 자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 기독교인으로서 노동운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노동이라는 것은 기독인이든 불교인이든 누구든 해야 하는 것이에요. 노동을 하지 않는 인간의 삶이란 없으니까요. 물론 계급적으로 돈 많은 사람은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땀 흘려 노동한 결과로 얻은 소출로 먹고 사는 존재죠. 목사님들이 교회를 맡으면 노동과 똑 떨어져 있는 것처럼 옛날 귀족마냥 노동을 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대단히 잘못된 것이죠.

창세기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노동을 하셨고 노동 후에 안식을 가지셨고요. 70년대에는 일요일에 쉬는 것이 없었어요. 그 때 안식이 왜 필요하냐? 노동을 하는 사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성서를 인용하곤 했어요.

성서는 오래된 책이지만 저는 성서가 너무 혁명적이고 진보적이라서 놀라곤 했어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담겼죠. 저는 성서가 운동을 하는데 중요한 텍스트가 되곤 했어요. 성서의 진보적 가치를 잊거나 떠날 수가 없어요.

▲ 당시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이었을까요?

제가 원래 굉장히 보수적이었어요. 어느 정도였냐면, 제 신앙적인 궁극적인 목표가 죽은 뒤에 천국 가는 것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세상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죽은 뒤에 얻을 복락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죠. 현실적인 고통은 잠깐 지나갈 것이니깐 감내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노동운동을 하면서 인천 산업선교회를 만나게 되고 덕분에 성서를 다시 보게 됐어요. 자연스럽게 신앙도 바뀌었고요. 죽은 뒤에 천국가기 위해 기독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따르는 삶’을 위해 기독인으로 사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예수가 어떻게 살았느냐? 당시 부자들,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회지도층, 제사장들, 율법학자들 등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는 욕도 하고 나무라고 싸우기도 했었죠. 그런데 반대로 성전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두려워하던 가난한 사람들, 병자들은 위하고 섬겼어요. 예수는 그렇게 살아서 결국 정치적 선동자로 오해받고 십자가에 달렸죠.

그걸 알게 되면서 ‘기독인이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구나,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기독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을 정도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 보니 성서가 완전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부자가 어떻게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는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죠. 제가 현실에서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다 74년, 제가 처음 감옥에 갔을 때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해 묵상하면서 ‘이 고난이 나한테 주어진 십자가구나. 이제야 내가 기독인이 됐구나. 비로소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된 거구나’ 하고 알게 됐어요. 물론 두려움도 있었지만요. 그 후에 중앙정보부에 수도 없이 끌려갔어요. 하지만 그 고통 가운데 끝가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삶을 보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결단 덕분이었어요.

어떤 운동이든 ‘회유’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에요. 회유에 승낙하면 돈이 생기고 대우도 받지만 거부하면 감옥에 가거나 두들겨 맞거든요. 선택에 따라 극단적으로 결과가 뒤바꿔요. 사람이 고통을 선택하기 어렵죠. 그래서 회유 받아서 변절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아마 제가 기독인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에요. 자신이 없어요. 기독교 신앙은 제게 고난 속에서 버틸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됐어요.

▲ 오늘날에도 기독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현장에서 인권 운동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기독 운동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 활동 당시에 사상 투쟁이 격화되면서 기독교라는 외피만으로도 공격 대상이 됐었어요. 기독교 청년 운동도 기독교보다는 진보 사상만을 쫓으려고 했고요. 그런데 저는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배타적으로 기독교 울타리만 고수하면 안 되겠지만요. 저는 성서나 기독교전통같이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요소들에서 얼마든지 우리가 힘을 받고 강건하게 버틸 수 있는 자양분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를 활용하는 것이 좋겠죠. 그렇게 성장한 기독교적인 운동이 기독교 밖의 다른 운동과 연대하고 어울리면서 전체적인 운동을 키워 가는데 얼마든지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 기독교 정체성을 가지고 열심히 투쟁하는 이들에게 잘하고 있으니 위축되지 말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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