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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성학자인가? 영성가인가?

기사승인 2016.10.29  09: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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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②> 영혼의 친구 이강학 교수

이번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는 횃불트리니티 이강학 교수를 만나 진행했습니다. 먼저 영성에 대한 이론적인 접근을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편집자 주-

 

순례의 시작

아주 더웠던 그 여름날, 드디어 영성의 고수(!?)를 찾아가는 첫 순례를 떠난다.

나의 순례의 여정을 지켜볼 동반자 박준호 기자의 등은 땀인지 열정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가 만날 첫 영성의 선배는 횃불트리니티의 영성학 이강학 교수다. 그와는 앞서 두 번의 인터뷰 약속을 잡았지만, 박 기자의 개인적 이유로 두 번 모두 취소하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그런 연유로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날려버리고, 이강학 교수의 스케줄에 맞춰 그가 피정을 진행하고 있는, 가평으로 떠나게 됐다. 부푼 기대를 갖고 시동을 걸었다. 자 이제 출발이다!
 
하...박 기자의 자동차 배터리가 방전이다... 이미 땀을 흘리고 있던 박 기자는 더 격렬하게 땀을 흘렸다. 출동서비스의 도움을 받고 정신을 다잡아 다시 힘차게 출발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박 기자의 자동차인데, 운전은 내가 했다. 하지만 고속도로 출구를 지나치는 바람에 이전에 묵혔던 감정들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고 말았다. 한참을 헤맸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우리는 도상에 있었다.
 
뜬금없지만, 영적 순례의 길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출발과 도착이 아닌 그 여정에서 마주하는 여러 어려움과 위험들 속에서의 체험과 기도가 영성이 아니겠는가? 바로 그 과정 자체가 순례의 중심이며, 종착의 환희는 그 과정을 통과한 순례자의 몫이다.(음..다시 봐도 멋진 말이다)

영혼의 친구
 
2시간여의 폭풍 운전 끝에 순례의 첫 번째 기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웃음으로 맞아주는 그를 만났다.

이강학 교수는 대학생 성경읽기 모임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됐고, 대학을 졸업 후 다니게 된 다일교회에서 최일도 목사의 영성수련에 참여하면서 영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관심은 헨리나우웬, 사막영성, 이냐시오 등으로 이어지며 그가 미국 GTU(Graduate Theological Union, in Berkeley)에서 ‘기독교영성’을 전공하게끔 만들었다. 현재 그는 횃불트리니티에서 기독교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다음은 이강학 교수와의 대화이다.(필자: 광희/ 이강학 교수: 강학)

광희: 교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소개 해주세요.

강학: 제가 하는 일은 ‘영성지도’입니다. 목표는 피지도자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친밀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죠. 다른 표현으로는 피지도자의 영적 성장을 돕는 것. 또는 영적 동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옆에서 길을 가는데 함께 걸어가면서 대화하는 사람을 영성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적지도자는 리더가 아닌 동반자, 안내자, 영혼의 친구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법으로는 영성훈련을 안내하는 것인데, 다양한 영성훈련들을 연구하여 현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영성훈련을 고르고, 실행해보고 그 경험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영혼의 친구라니.. 참 따뜻하고 멋지다.(부끄..)


영(靈)에 학(學)을 붙이다.

광희: 학자에게 드리는 질문인데요, 영성신학에서 정의하는 영성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강학: GTU에서는 ‘영성신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영성신학은 조직신학에 포함된 것으로 개념 정리가 되기 때문이죠. GTU에서는 기독교영성이 독자적인 학문으로 존재합니다.

샌드라 슈나이더의 말을 빌리자면 학문으로서 영성은 “한 개인이 궁극적인 가치를 인식한 이후에 자기초월 경험과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합하는 프로젝트의 참여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은 궁극적 가치의 인식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궁극적 가치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이 시작이 되는데요, 그 과정에서 자기 초월이 일어납니다. 이를 기독교 언어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를 향해가는 거니까 그것은 자기초월에 해당됩니다. 이런 자기초월의 과정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삶의 통합’입니다.

광희: 기독교 영성학의 방법론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은데요?

강학: 기독교 영성학의 방법론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학입니다. 왜냐하면 삶과 경험을 연구하며 해석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경험이 하나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 방법 중 제일 첫 번째는 ‘성경’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다양한 경험들이 기록돼 있기 때문에 성경을 잘 공부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경험의 주체인 인간을 이해하는 ‘현대 과학’들의 이론을 추구해야 합니다.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은 물론 성서비평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타종교를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인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많은 준비와 공부가 필요합니다.


...어머니가 등짝 때려도 안하던 게 공부였는데.. 패기 있게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를 시작했지만 영성은 나의 길이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연재는 2회로 마무리 될 것 같다. 그동안 비루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꾸벅...)


영성이 필요해, 진짜로!

광희: 최근 한국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을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강학: 교회개혁운동 차원으로 주목하고 싶어요. 놀라운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에서 지도자들의 타락한 모습, 성도들의 신앙적인 부재의 인식, 교회 성장의 정체 등의 위기인식과 맞물려서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변화욕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바뀐다는 것은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야 바뀌는 건데, 제대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지금까지 해오던 기도방법과 훈련프로그램이 아닌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이 영성이었던 것이죠. 

물론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의 유행의 측면도 있어서 쉽게 사라질 수 있지만, 실제로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근본적인 부분들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 경험에 대한 확신은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것이니까. 영성지도자는 그것을 신뢰합니다.


...크게 공감되는 부분이었고 마음에 울림이 있는 부분이었다. 필자도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기존 교회에 대한 실망감, 허무감 등이 복합적으로 다가오게 되어 다른 대안으로을 모색하다가 발견한 지점이었다.


영성 프로그램? 댓츠 노우노우

광희: 그럼 이제 저의 고민은 목회 현장에서 어떻게 영성지도를 적용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성지도를 단편적으로 보면 목회상담으로 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현대목회에 이것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강학: 영성지도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상은 ‘목회자들’입니다. 현재 제가 함께하는 소그룹, 일대일 지도, 일정기간의 영성훈련 프로그램 등에 목사님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참여 속에서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이 경험은 과거와는 다른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관상경험’이죠.

핵심은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나고, 바라보고, 그 안에서 변화되는 경험인데요, 목사님들이 이것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관상적 경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거였다면 이제는 완전히 하나님 앞에 개방적이 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자유해지고 행위보다는 존재중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죠.

물론 목회자체에서 하는 일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내용이 질적으로 달라집니다. 그것은 설교의 변화, 예전의 변화, 또한 심방에서 영성지도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등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 부분은 본인도 느끼겠지만 성도들이 느끼게 되죠.


..그 대안은 이 교수의 말대로 어떤 신선한 유행이 아니라, 이 교수가 자신을 소개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영혼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겠다. 영혼의 친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물론이고 동시에 자신의 친구가 변화의 경험에 이를 수 있도록 애정 어린 지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어려운 길이겠다. 이것은 확실히 오늘날 목회의 대안이다. 예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 ‘친구 되기’가 당대 종교 형식에 일으킨 균열을 기억하자. (영혼의 친구... 캬..)


광희: 영성은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군요.

강학: 대개 교회 프로그램이라 한다면 몇 개월, 몇 년,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지 않나요? 하지만 이것은 평생가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장위주의 방식으로는 영성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영성목회는 기본적으로 영성지도가 가능해야하기 때문에 목회자가 도울 수 있는 인원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숫자가 많을 수 없고, 공동체가 형성이 되지 않으면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죠.


...이럴수가.. 필자는 10년 전 신학교에 입학 할 때 50,000명 목회를 꿈꾸는 메가처치 꿈나무였다.(내가 속한 교단의 big 10 교회를 합쳐도 그 인원이 되지 않지만...) 그러나 영성의 길에 접어든 이상, 그 꿈은 이제 다 틀렸다. 이게 다 영성 때문이다. 사실 영성 때문은 아니지만, 그렇게 우기고 싶다. 이제 삐딱해져보자!


광희: 종종 영성의 유행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영성이 개인의 내면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이 있는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강학: 사실 그것이 도전과제입니다. 그 말이 맞아요. 하지만 우리가 전제하고 믿는 바는 그렇게 하나님을 깊이 있게 만나면 하나님을 닮아갈 것이라는 거죠.

영성 수행을 통해 예수님의 실천, 인격과 성품이 이 사람을 통해 나오지 않을까? 또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사회정의와 권력에 대한 태도에 대해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라는 기대를 가지고 영성지도를 하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정치, 생태 등에 대한 민감성은 기도만 한다고 나오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완이 돼야하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영성수련과 함께 정치, 사회정의, 생태의 민감성에 대한 부분을 하나님과 연결 지어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쪽의 초점을 맞춘 활동과 실천이 구축이 돼야 해요.

이럴 때 좋은 방법으로는 영성가들을 모델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균형이 잘 잡힌 영성가들을 롤모델로 삼는 것이죠.

마틴 루터 킹의 경우 미국 시민운동과 내적인 영성운동이 잘 균형 잡힌 인물입니다. 또 가톨릭에서는 도로시데이가 그런 인물이며, 토마스 머튼,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렇습니다. 그런 영성가들을 모델로 삼으면 좋을 것입니다. 올바른 영성이라면 내가 영성이 길을 올바르게 가고 있다면 균형이 잡힐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지막 질문으로는 ‘너희가 영성을 아느냐’라는 제목에 걸맞게 패기 넘치는 질문을 던져보기로 했다.


광희: 영성을 연구한다고 영성가가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영성가가 되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강학: 영성가는 완전히 삶을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가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시대에 오신다면 저런 모습일 것이다 라는 대상이 되는 사람이 영성가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영성학자는 그런 경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지, 본질적으로 영성가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꾸 들여다보니 감동이 돼서 흉내도 내보고 따라 살려고 하고 좋은 것이라고 알게 된것이죠. 본질적으로 영성학자는 영성가가 아닙니다.

광희: 감사합니다.


...이강학 교수와의 만남은 참으로 소중했다. 지면상 다 담을 수 없었지만, 필자가 영성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많은 고민들에 대한 대답들을 들었다. 그러나 수많은 말들 중 집에 돌아올 때는 물론 지금까지 나의 마음을 울리는 대답은 시작과 끝에 있었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가’란 누구인가?‘의 대답이다. 결국 영성이란 ’예수를 닮는 것‘이며, 영성가란 ’예수를 닮은 사람‘이다.

내가 학자에게 기대했던 바는 학문적으로 명확하고 잘 정리된 정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것은 겸손함과 정직함으로 예수를 닮으려는 모습이었다. 나는 어쩌면 학문적인 정의를 핑계로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를 회피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학문적이고 그럴듯한 말로 삶의 철저성을 유보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과연, 예수를 닮는 것 말고,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렇다. 영성으로 돌아가자. 말이나 글이 아닌, 예수를 닮아가는 순례의 여정을 계속 걷자.

 

이광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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