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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한 신? - 영화 <곡성>의 통곡소리

기사승인 2016.05.27  11: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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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의 <문화로 본 성서>

영화 <곡성> 포스터

1. 불친절한 감독

“만약 관객들이 너무 열려있다면, 보험으로 있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구가 있기도 했다. 촬영을 했고, 이후 편집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정하기론 내가 보기엔 이 장면은 중언(重言)이었다. 어차피 이 영화의 엔딩은 뭘 선택을 해도 비슷했을 것”이라고 불친절한 나홍진 감독은 말했다. 사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상의 결말은 영화의 엔딩과 다르다. 시나리오 상의 엔딩은 이렇다. 

# 일광이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있다. 
이때 외지인이 같은 차의 운전석 문을 열고 앉으면서 두 사람이 교차된다. 
이후 자동차는 도로에 서있는 무명을 그대로 뚫고 지나간다. 
이후 무명을 뚫고 지나간 자동차가 전복되면서 끝이 난다. #

친절한 위 시나리오 상의 마지막 장면이 있었다면 영화는 이해는 되지만, 캐릭터에 일관성이 없고(특히 외지인), 위 장면이 없기에 영화는 복잡하지만 캐릭터에 일관성이 있게 되었다. 

2. 곡성의 통곡소리(哭聲, wailing): 금어초의 비극

한국 사회는 지금 놀라운 악을 경험하고 그 악을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영화 <곡성(哭聲, wailing)>(2016)은 그 악의 시작은,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악한 무당과 악령이 던진 미끼를 물어버린 인간의 의심이라고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영화와 같이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23살의 여성이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처음 본 남자의 칼에 살해당했다. 남자는 아무 여자나 죽이겠다며 화장실 안에서 범행 대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부근 노래방 건물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실은 의심받을 시간도 없이 여자이기 때문에 무작위로 죽음을 당했다. 영화 <곡성>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현실이 더 무서운 것이다. 이뿐인가? 

쾌적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던 가습기 살균제가 죽음의 독을 내뿜었다. 기업은 영리 추구를 위해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고, 폐질환으로 죽은 사람들, 아이들을 가슴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 산소 호흡기를 들고 통학해야 하는 아이들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참담한 사건이 기업, 학계, 언론, 대형 로펌, 정부 기관의 불의한 공모로 빚어졌다는 사실이다. 돈이 신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당 일광(황정민 분)의 돈 놀이 굿판에 효진이(김환희 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효진의 말대로 ‘뭐가 중요한지 모르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2년여 지난 지금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조롱하고 괴물로 낙인찍는 우리사회의 민낯은 차라리 솔직하다. 뻔뻔하게도 세월호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하던 유가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으며 ‘폭식투쟁’을 하고, ‘세월호 피해자가 국가유공자냐’하며 여론몰이를 하던 보수단체의 배후에 청와대 행정관과 전경련의 자금이 있었다는 게 밝혀져도 조사도 처벌도 하지 못하는 현실은 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정유정의 소설『종의기원』(은행나무, 2016)은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이다. 주인공 유진은 어느 날 어머니를 죽이고 피칠갑을 한 채 깨어난 스물여섯의 청년이다. 소설은 유진이 사이코패스로서 자신을 발견하고 악의 길로 달려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파헤치고 있다. 유진의 내면과 그녀의 살인에 집중하며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성향의 ‘포식자’인 유진이 어떻게 인간을 평가하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단 하나, “나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짓이든 거침없이 행하는 순수 악인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놀라운 것은 유진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 즉 약자들의 고통과 그 약자들을 짓밟고 굴복시킬 때의 쾌감이었다는 것이다. 

좀비가 된 박춘배(길창규 분)를 종구(곽도원 분)와 친구인 마을 사람들이 만류하면서도 폭행을 가하는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영화제 칸에서는 서양인들이 이 장면을 보고 웃었다고 하지만(또한 잘난체 하는 평론가도 자신만이 그 장면에서 웃었다고 말하지만), 이어지는 외지인(쿠니무라 준) 추격에서 보듯이, 폭력은(좀비나 개, 혹은 사람을 향하든!) 웃음으로 우리가 그저 흘러 넘길 때, 당하는 이의 고통은 ‘겁먹은 것의 축축하고 거친 숨소리’ 정도로 잊혀져 버리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폭식투쟁이, 강남역의 살인이, 기업의 부도덕한 영리 추구가, 정권의 무책임이 그리 낯설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화 <곡성>의 주인공 종구와 같이 나와 더불어 나의 가족만 당하지 않으면 침묵하거나 동조하도록 훈련되어온 우리들에게, 오만과 탐욕의 사이코패스 사회가 드디어 그 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순박했던 시골 마을이 ‘나에게 이로운가’만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며, 약자를 괴롭히는 사회가 되었을 때 사이코패스 사회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곡성의 통곡소리는 대한민국 전체의 울부짖음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의 통곡은 아름다운 꽃을 시들게 한다. ‘오만과 탐욕’이라는 꽃말을 가진 금어초는 아름답고 예쁜 꽃이지만, 시들었을 때는 해골의 모습을 한다. 감독은 살인사건이 있었던 집들 마다 시든 금어초를 보여주며 오만과 탐욕의 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금어초
살인사건이 난 집마다 있는 시든 금어초

3. 비도덕적 사회와 비도덕적인 인간 : 악의 ‘합리성’과 ‘평범성’

히틀러의 하수인이었던 나치 전범자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며,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한길사, 2006)에서 ‘아이히만의 생각 없음’이라는 평범성에 주목했으나,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부수적 피해: 지구화 시대의 사회 불평등』(민음사, 2013)에서 아이히만의 관료적 성실성에 주목한다. 관료제가 관리하고 집행하는 악의 특징은 평범성보다 합리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사실 현대사회는 제도적 조직으로 잘 짜여진 관료적 조직 사회이다. 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평범함을 상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비도덕적 사회의 제도적 합리성이다. 

책 제목인 ‘부수적 피해’란 이라크전 이후 언론인들이 해외 파병 부대의 군사 행동을 보도하면서 썼던 말이다. ‘의도하거나 계획되지 않았으나, 생긴 피해와 고통, 손해 등의 군사 행동의 결과’를 뜻한다. 살인마 전두환이 “광주와 나는 상관없다.”라고 말하는데, 바우만은 이렇게 지적한다. 

“수많은 명령권자는 타인의 생명과 생계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사후적으로 면책받기 위해서, 달걀을 깨뜨리지 않고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을 꺼내든다. 물론 이런 경우에 어떤 오믈렛을 만들어 먹고 어떤 달걀을 골라서 깨뜨릴지 결정할 누군가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정당화되거나 빼앗겼다는 점이나, 오믈렛을 맛보는 것은 깨진 달걀이 아니라는 사실은 간과된다.”(『부수적 피해』: 12-13)

아이히만

아이히만과 그의 변호사는 6백만명의 죽음이 단지 자기 책임을 다 하려는 과정에서 빚어진 부수적 효과일 뿐이라고 밝혔다. 정말 미리 알았다면, ‘새롭고 세련된 표현’인 ‘부수적 피해’라는 표현을 썼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어 덜 불편하게 된다면 우리의 이성은 이를 반대하지 않는다. “부수적 피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은, 권리와 기회에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을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동시에, 행동을 취하는 (또는 행동을 단념하는)데서 초래되는 비용의 불평등한 분배를 선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정한다.”(13) 외지인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분노, 타자에 대한 배타성,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절망과 좌절,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편하면(종구에게는 딸이 나으면) 외지인은 죽어도 되는 것처럼. 

앞서 설명한 캐릭터의 일관성에 대한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는 외지인에 대한 의심과 배타성의 피해자에서 시나리오 상의 결론 이후 악의 실체로 외지인을 두 번 활용(한번은 의심받고 도망 다니며 고통 받는 나약한 외지인으로, 한번은 죽어서 일광과 한 패가 된 악령으로)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는 복잡해졌다.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것을 떨어뜨릴 수 있다.”라는 바우만의 말은 비도덕적 인간은 비도덕적 사회와 더불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비록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비도덕적 사회의 도덕적 인간’을 요청했지만.

어느 날 교사들이 모여 팀을 나누어 축구 시합을 했는데, 진 팀이 회식비를 내기로 했다. 두 팀의 교사들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죽기 살기로 달려들면서 교묘하게 파울도 하고, 심판에게 항의하거나 잡아떼기도 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저 사람들이 학생들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이끄는 교사들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 교사들이 부도덕한 집단이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집단 이기주의에 한번 빠지게 되면, 양보하지도 못하고 관용을 베풀지도 못한 채 그냥 비도덕적이 되어 가는 것이다. 따로 떨어진 상태로 있을 때, 개인은 얼마든지 착하기도 하고 양보의 미덕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기주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사회 윤리이다. 

니버는『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문예출판사, 2013)에서 개인적으로 매우 도덕적인 사람들조차도 자기가 속한 이익과 관련될 경우에는 비도덕적으로 변한다고 말하며 개인 윤리와 사회 윤리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했다. 곧, ‘집단의 도덕과 행동은 개인의 도덕과 행동보다 눈에 띄게 도덕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곡성>은 이를 넘어 개인의 도덕은 집단적으로는 부도덕함을 이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딸을 사랑하는 종구가 바로 그런 캐릭터임을 잘 보여준다. 

4. 무기력한 신과 비폭력의 둥근 가슴: 무명(無名)

영화 <곡성>은 우리사회의 민낯이 의심, 편견, 왜곡과 은폐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신은 인간의 편협한 의지 앞에 무기력할 수 밖에 없음을, 종구에게 돌을 던지는 무명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가지 말라”며 종구를 붙잡지만, 붙잡을 수 없는 ‘살과 육을 가진 신’인 무명의 모습으로 잘 보여준다. 

인터내셔널 부문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채식주의자』(창비, 2007)의 주인공 영혜는 함부로 파괴하고 죽이는 세상에서, 차라리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해치지 않는 식물이 되려고 한다. 일찌기 영혜는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인 채 끌려 다니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개의 핏빛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종구도 외지인의 개를 죽이지 않는가! 이후 종구의 눈은 순박한 눈에서 핏빛 눈으로 변한다. 육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탕수육을 밀어 넣으려 했던 아버지는 딸을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딸을 폭력적으로 동화시키고 했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두 아버지의 왜곡된 사랑의 방식은 ‘배제와 포용’으로 달랐지만 사랑의 결과는 같았다. 왜곡된 사랑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사랑은 나와 다른 것을 나와 동화시키고, 그렇지 않을 때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사건(알랭 바디우)’이다. 아니, 차라리 기독교적으로 ‘타자에게 나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무기력한 신이었던 무명이 입은 박춘배의 예비군 군복이나, 무명이 있었던 자리에 떨어졌던 효진의 머리핀, 그리고 죽은 동네 아주머니의 흰옷을 입은 무명이 바로 그 상징이다. 타자의 아픔과 죽음에 공감하는 무명이야 말로 무기력한 신이지만 고통받는 자의 곁에 있어준 신인 것이다.『채식주의자』속 영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 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성폭행 희생자인 동네 아주머니가 아무리 가슴을 들이밀고 경찰서 유리 문 앞에서 울부짖어도 경찰인 종구와 동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곧, 둥근 가슴으로만 살아가려는 식물과 같은 이들에게 세상은, 법의 수호자인 경찰도 역설적으로 공포 그 자체가 된다. 

아무튼 소설 『채식주의자』는 희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바로 영혜의 언니 인혜이다. 자신도 상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안으로 다독이며 어려움 속에 처한 영혜 곁에 끝끝내 머물러준다. 이러한 영혜는 무명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물음표로 다가온다. 생각 없이 살아온 우리의 삶이, 또한 합리적으로 판단한 우리들의 사회 조직이, 폭력에 근거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물음표가 된다. 그리고 인혜와 무명은 사람됨이 무엇인지를 묻는 기호로 우리 앞에 서 있다. 

나홍진 감독의 말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쭈그려 앉은 무명의 초라함, 외로움의 느낌이 그런 느낌이었다. 그게 신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더 필요한 게 신이 아닐까 싶었다. 신이 있다면 좀 더 인간미 넘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 신은 우리 인간의 의지 앞에 무기력한 모습으로, 죄 없는 자의 모습으로 육화되어 우리에게 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쭈그려 앉아 돌멩이를 던지는 무명

필자소개

 

   
▲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목사인 최병학 목사는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받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실천하고 있으며 도덕 이론가 및 윤리사상가, 문화 신학자, 영화 평론가로 경성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서 해체주의 신학자 마크 테일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성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쿠바, 인도와 동학 관련 영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부산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영상시대의 종교와 윤리- 타락을 통한 구원받기』 (인간사랑,2002), 2004년 문화관광부 추천도서인 『현대 사상과 영화이야기-지식인의 자기발견』 (브레인코리아,2003),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윤리-답없는 물음, 찾는 윤리』(부산대출판부,2005),『영화관에 간 현대신학자』(이경,2006),『대중문화와 윤리의 향연』(부산대출판부,2011),『성서로 읽는 동시대 인물』(살림,2012),『해체주의, 사이버스페이스, 신체성과 무의식, 후기생물사회의 신학윤리탐구: 자아의 소멸과 흔적의 윤리』(한국학술정보,2012)등의 저서가 있다.

 

최병학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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