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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恨)과 해한(解恨), 떠남과 돌아옴: 영화 <귀향>

기사승인 2016.03.08  17: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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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병학의 <문화로 본 성서>

강일출 할머니의 ‘태워지는 소녀들’

1. 도상-지표-상징 기호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기호 구분인 시니피앙(signifiant, 의미하는 것, 기표)과 시니피에(signifié, 의미되는 것, 기의)로 이루어진 2항적인 구조주의 언어학과 달리 기호학의 창시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는 기호를 ‘도상-지표-상징’의 3가지로 나눈다. 도상기호(Iconic sign)는 ‘외부세계의 실제 대상과의 유사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기호’이다. 지시 대상과 닮은 관계를 유지하는 기호이기에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외견상 비슷한 형태를 갖춘다. 

지표기호(Index)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부분, 또는 그 대상과 인과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써 수용자에게도 동일하게 인식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인접성 혹은 근접성에 의거하는 기호 유형이기에, 지표기호와 대상 사이에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상징기호(Symbolic sign)는 임의로 만들어진 기호이다. 기호의 형태와 대상의 의미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나 유사성 없이 그저 약속에 의해서 성립된 기호를 말한다. 한국어에서는 ‘나무(namu)’라는 기호가 미국에서는 ‘tree’라는 기호로, 중국에서는 ‘木’이라는 기호로 사용되는 것과 같다. 이 세 가지 소리기호와 ‘나무’라는 대상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을 때 상징기호라고 한다. 

2항식의 구조주의에 따르면 모든 것은 구조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3항식을 따르면(또한 퍼스의 기호학을 평생 연구한 움베르트 에코에 의하면) 세상은 ‘장미의 이름’일뿐, 그 이름의 상징을 찾아내야 한다. 

2. 恨: 일본군의 성폭행-은경의 성폭행-베트남 빈안학살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밀양 아리랑) 

영화 <귀향>을 보고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이들은 영화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은경의 성폭행은 넘어가고 일본군의 만행만 보는 것은 도상기호만 보는 것이고, 우리의 또 다른 죄이자 어리석음일 것이다. 더 나아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반성하지 않고 일본군을 규탄하는 것도 지표기호만 보는 것이고, 일방적인 민족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남의 것을 뺏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나쁘다는 것을 첫 장면에서 분명히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43년 경남 거창, 14살의 외동딸 정민(강하나 분)은 부모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노리개(괴불노리개)를 갖고 싶었던 정민은 내기를 해서 친구들의 노리개를 뺏는다. 괴불노리개의 ‘괴불’은 어린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이 옷을 입은 후에 장식하기 위하여 차는 장식물을 말한다. 괴불주머니, 괴불줌치라고 하는데 뾰족한 세 귀퉁이는 삼재를 막고 귀신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괴불노리개

그러나 어머니에 의해 그 일이 탄로 나고, ‘남의 물건을 빼앗으면 안된다’며 회초리를 맞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된 정민은 그 이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그의 몸을 뺏긴다(끌려간다). 이후 정민은 산청에서 끌려온 영희(서미지 분), 그리고 각지에서 끌려온 또래의 소녀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길림성 목단강 주변 일본군 지역으로 끌려가, 전장 한가운데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앙굴렘 국제만화축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국만화기획전
끌려가는 정민

장면은 바뀌어, 1991년 경기도 양평이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한 전과자가 은경(최리 분)의 집에 들어와 은경이를 성폭행하고, 마침 집에 돌아온 아버지까지 죽인다. 고통스러워하는 은경이에게 어머니는 “밖에 나가면 놀림거리 된다”는 이유로, 무녀 송희(백수련 분)에게 찾아가 송희의 수양딸로 삼는다. 상징기호가 인간 삶을 규정하는 장면이며, 여성의 삶이 단순한 지표기호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무녀와 언니 동생 하는 영옥(=영희, 손숙 분)은 정부에서 정신대 피해 조사를 한다기에 동사무소에 들러 서류를 접수하려고 한다. 머뭇거리고 있는 영옥의 귀에 동사무소 직원의 말이 들린다. “정신대 피해 실적조사, 우리 동에는 없죠? 미치지 않고서야 과거를 왜 밝히겠어요?” 영옥은 그 공무원 앞에 나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성폭력은 일본 군인이든, 한국인이든, 한국 군인이든 할 것 없이 다 똑같다. 그리고 피해 여성을 보는 국가의 시선은 모두 동일하다. ‘환향녀는 화냥년’이고, 여성은 남성 가부장제에서는 하찮은 약자였던 것이다. 장면은 바뀌어, 1991년 경기도 양평이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한 전과자가 은경(최리 분)의 집에 들어와 은경이를 성폭행하고, 마침 집에 돌아온 아버지까지 죽인다. 고통스러워하는 은경이에게 어머니는 “밖에 나가면 놀림거리 된다”는 이유로, 무녀 송희(백수련 분)에게 찾아가 송희의 수양딸로 삼는다.

상징기호가 인간 삶을 규정하는 장면이며, 여성의 삶이 단순한 지표기호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머니에 의해 그 일이 탄로 나고, ‘남의 물건을 빼앗으면 안된다’며 회초리를 맞는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된 정민은 그 이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그의 몸을 뺏긴다(끌려간다). 이후 정민은 산청에서 끌려온 영희(서미지 분), 그리고 각지에서 끌려온 또래의 소녀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길림성 목단강 주변 일본군 지역으로 끌려가, 전장 한가운데서 위안부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베트남 전쟁은 우리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100여 곳, 사망자는 3만 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미국은 미라이 학살 사건뿐1)). 그 중 최대 규모인 빈안 주변 15곳의 마을에서 1966년 1월 23일부터 2월 26일까지 벌어진 ‘빈안학살’에서 한국군에 의해 1,004명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1937년 4월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의 독일군 공습 희생자는 1,600명). 빈안학살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생존자 응우옌떤런은 2015년 4월 평화박물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결코 망각이 아니다. 한국 정부가 책임지길 원한다.” 자신이 받은 상처만 기억하고, 남에게 끼친 상처는 망각하려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속성일진대, 밀양 아리랑은 이렇게 노래 부른다. “널 좀 보라”, 그리고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1-6) 

일본군에 의해 처형당하는 소녀들
한국군에 의해 나체로 불태워지는 소녀(빈안학살벽화)

3. 解恨: 산자와 죽은 자, 그리고 영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온갖 성적 치욕과 모진 고통을 겪다가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상부의 지시로 위안부 여성들을 총살 시키는 현장에서 영희와 정민은 독립군의 습격으로 혼란한 틈을 타 도망을 친다. 그러나 쫓아온 일본군 장교 류스케(임성철 분)에 의해 정민은 영희를 대신해서 죽고 영희만 살아남는다. 세월이 흘러 1991년 경기도 양평에서 평생 그 한과 미안함을 안고 살아가던 영옥은, 영매인 무녀 은경을 통해 가슴에 묻어둔 한을 풀어낸다. 한풀이는 산자와 죽은자, 그리고 그 영매인 무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잘가라 언니야.” 
“다 끝났다. 집에 가자.” 
“내 곧 따라갈끼다.” 
“내 혼자만 돌아왔다. 미안하다.” 
“괘않다.”
“지금까지 나도 거 있었다. 몸은 여기 왔지만 마음은 거기 있다. 이제 끝이다. 여기 소풍 끝내놓고 곧 갈끼다.”

그리고 정민은 한 마리 나비가 되어 거창 한디기댁,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먹는다. 아버지는 말한다.   

“밥묵자!”

밥으로 상징되는 도상, 지표기호들이 날아다닌다. 나비, 괴불노리개, 조선의 푸른 산천, 그리고 날개가 부러진 나비는 전쟁의 참혹함과 남성들의 잔인함과 연결된다. 따라서 성서는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는 남성의 도움 없이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태복음 1:18-25)  

『기독교 사상』3월호에서 김수남 주간의 말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 그 분이 동정녀에서 나신 것도 믿는다. 신약성서는 남성의 역할이 배제된 예수의 탄생 이야기를 첫 장에 두고 시작한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될 ‘사실’도 아니고, 폐기해 마땅한 종교 천재의 ‘창작 신화’도 아니다. 남성에 의하지 않고 성령으로 말미암은 탄생. 이 ‘동정녀 탄생’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득하는 장치이다. 그 이야기는 가부장, 폭력, 국가, 전쟁으로 표상되는 ‘남성’ 문화에 대한 거부를 설득한다. 평등, 비폭력, 평화가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한다. 나아가 그 몰생명의 가부장 역사를 심판하는 이가 바로 예수이고, 믿음은 그런 예수 편에 서는 것임을 말해준다.”

바라고 원하는 바를 보증해 주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증거해 주는 것이 믿음이라면, “왜곡된 현실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믿음, 비정상이 바로 잡힐 것이라는 믿음, 동정녀에서 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이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는 김수남 목사의 말이 상징이 아닌 지표기호로 들릴 때 참신앙의 길이 열릴 것이다. 

나비가 되어 고향에 돌아와 밥먹는 마지막 장면

4. 떠남과 돌아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온 10대 소녀들은 모처럼 햇살을 받으며 냇가에 둘러앉았다. 그 중에 언니가 되는 소녀 분숙은 소녀들이 노래를 청하자, 낭랑한 목청으로 한 곡조 뽑는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를 버리고 가시렵니까)
날더러 어찌 살라고 (나더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나난 (버리고 가시렵니까)
가시리 가시리잇고 버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난 (붙잡아 두고 싶지마는) 선하면 아니 올세라 나난 (서운하면 아니 오실까 두렵습니다) 설온님 보내옵나니 (서로운 임을 보내오니) 설온님 보내옵나니 설온님 보내옵나니 설온님 보내옵나니 가시는 듯 도뎌 오소서 (가시자마자 돌아서서 오십시오) 가시는 듯 도뎌 오소서” (가시리)

‘비분리성의 윤리(ethic of inseparability)’를 말하는 여성윤리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인간/비인간 이원론의 근원이 되는 그러한 하나님 상에서 벗어나 ‘관계적 자아’ 개념을 수용할 때 비로소 대립적, 계층적, 이원론을 넘어 만물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유기체적 비전을 함축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데카르트의 유명한 코기토가 천명하듯, 이성적이고 비육체적이며 다른 존재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관계적 자아’이다. 따라서 떠남은 돌아옴의 다른 이름이고(가시는 듯 도뎌 오소서) 한은, 달이 해를 품듯이, 해한을 품어야 한다.  

* 뱀꼬리

2002년 나눔의 집(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 시설) 봉사활동을 통해 만나게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강일출 할머니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 <귀향>의 조정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 소재 영화가 수익성이 있겠느냐. 일본과 밀접한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과연 투자하겠느냐. 쓸데없는 고생하지 마라. 별의별 말을 다 들었어요. 투자자들 찾아가면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죠.”

1943년 강제로 끌려간 20만명의 소녀들 중 238명만이 돌아왔고, 2016년 3월 현재 45명만이 남았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관련 자료와 증거들을 은폐하고 파기하였다. 투자자들과 영화계 큰 손들이 외면한 영화를 세계 각지 75,270명 시민 후원자가  완성하였다. 

** 뱀꼬리의 꼬리

베트남 양민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안하면 시민들이라도)가 “파이 찌우 짝 니엠(phai chiu trach nhiem, 책임져라)!”

1)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필자소개

 

   
▲ 최병학 목사
남부산용호교회 담임목사인 최병학 목사는 생명이 생명답게 존중받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 실천하고 있으며 도덕 이론가 및 윤리사상가, 문화 신학자, 영화 평론가로 경성대, 한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서 해체주의 신학자 마크 테일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경성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쿠바, 인도와 동학 관련 영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으며 부산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영상시대의 종교와 윤리- 타락을 통한 구원받기』 (인간사랑,2002), 2004년 문화관광부 추천도서인 『현대 사상과 영화이야기-지식인의 자기발견』 (브레인코리아,2003),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윤리-답없는 물음, 찾는 윤리』(부산대출판부,2005),『영화관에 간 현대신학자』(이경,2006),『대중문화와 윤리의 향연』(부산대출판부,2011),『성서로 읽는 동시대 인물』(살림,2012),『해체주의, 사이버스페이스, 신체성과 무의식, 후기생물사회의 신학윤리탐구: 자아의 소멸과 흔적의 윤리』(한국학술정보,2012)등의 저서가 있다.

최병학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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