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경화되는 사회의 원인을 잘못 파악한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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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경화의 원인 중 하나인 경제는 문제는 피해갈 수 없다. ⓒGetty Images |
1. 젊은 남성들이 우경화되는 것은, 젊은 여성보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바이든 정부 시절,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액은 약 72조 원에 이릅니다. 이는 단순한 자본의 이동이 아니라, 일자리와 두뇌의 유출을 의미합니다. 반미(反美)라도 외쳐야 하는데, 한국 사회에서 반미는 금칙어에 가깝습니다. 반미(反美) 대신 반중(反中)을 외칩니다. 중국의 굴기倔起)도 부담스럽긴 마찬가지입니다.
2023년 기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60%를 넘어섰습니다. 여성의 고용증가율이 남성을 앞지르는 추세입니다. 여성의 일자리가 증가했다고 해서, 양질의 일자리가 증가한 것은 아닙니다.
남녀 고용 상황을 비교 정리하면, 젊은 남성층이 진입할 수 있는 산업 분야의 고용 기회가 줄었습니다. 반면, 여성들의 취업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서비스업 중심의 일자리가 증가했습니다. 여기서 젊은 남성들은, ‘생각할까요?’ 아니면 ‘느낄까요?
‘느끼는 것’이 먼저입니다. 꼰대 아버지는 ‘먼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각은 아버지가 먼저 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시대 1990년대 세계화 이후, 빈부격차의 심화는 예고된 결과였습니다. 그에 따른 극우 세력의 득세는 세계사적인 흐름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전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현장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는 가난한 집 아이들입니다. 진보가 보이는 모습은, 권력을 잡은 뒤 호의호식하며, 사적 이익을 둘러싼 정의 문제로 분열되고 다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과 논리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느끼는 대로 말하면, 진보는 재수 없습니다.
아버지보다 가난한 아들 세대의 비극, 가난이 대물림되는 비극은,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아프고 힘든 문제입니다. 더 큰 절망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그러면, 민주당이 권력을 잡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국민의 힘이 권력을 잡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더 선명함을 추구하는 다른 야당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파괴하거나 리셋하고 싶어집니다.
2. 계엄은 戒嚴, Martial Law입니다. 계몽은 啓蒙, Enlightenment입니다
2024년 12월, 윤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태국의 일부 환전소에서는 원화 환전을 거부하는 사례가 발생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요?
그 답은 계엄(Martial Law)에 있습니다. Martial은 본래 ‘전쟁’을 의미하며, 전쟁이 선포된 국가에 대한 투자나 중요 물품 주문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금융감독원장의 “탄핵이 경제에 낫다”는 발언과 “헌법재판관 임명”도 이해가 됩니다.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한 이익 문제가 아니라 자본의 이익 문제입니다.
계엄과 환율은 그런 관점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환율은 녹고 있는 중입니다. 계엄은 한국 자산의 외환 표시를 더 자극시켰습니다. 헌재 “인용”도 이 흐름을 되돌리기엔 많이 벅찰 것입니다. 美 경제지 포브스의 “계엄령 시도 대가, 한국 5100만 국민 할부로 치르게 될 것”이란 기사 제목은, 이에 대한 적절한 표현입니다.
만약, “기각 또는 각하”라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이 불안한 나라를 벗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민이 안되면, 자산이라도 외환으로 보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 최상목 부총리의 미국채 매입이 기사화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계몽 운운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부 통용되는 것을 보면, 계몽은 계엄의 최면상태입니다. 따라서, 계몽된 것이 아니라 최면된 것입니다.
지난 계엄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충격은 “살의(殺意)”입니다. 살의를 직접 경험했기에 고통스러우며, 이는 단순한 불안이나 공포를 넘어섭니다. 살의는 최면 속에 감춰져 있으며, 최근 교단에서 벌어지는 ‘출교’ 문제도 이러한 살의가, 유령처럼 우리 곁에 너무 가깝게 출현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 살의를 위장하는 대표적은 수단은 ‘종교심’과 ‘도덕적 우월감’입니다. ‘종북’과 ‘동성애’ 프레임은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악의적 수단이며, ‘애국’과 ‘종교’는 위장된 도덕적 우월감의 표현입니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혐오는 약자가 약자를 공격하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극우는 강자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는 매우 무모해 보이지만, 불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상식과 논리, 생명의 가치가 무너져 가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악이 관찰되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개인과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성찰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반성해야 합니다.
개인과 사회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머무를수록, 불만과 좌절은 쉽게 극단적인 정치적 성향으로 흘러갑니다. 그 결과, 혐오와 배제가 정당화되고, 민주적 가치는 점차 후퇴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혐오와 적대가 아닌 연대와 협력을 통해,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변화는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일상의 성찰과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이현석 위원(에큐메니안 편집운영위) webmaster@ecumen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