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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기사승인 2025.04.02  03: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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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요한복음 6:47-59)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의 최고 경지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 아니라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경우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차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 내가 마음먹은 것이 곧 하나님께서 마음먹은 것과 같아지는 차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것은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셔 내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밖을 향한 요구에는 능하지만 스스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행위에는 미숙합니다. 밖에 계신 하나님께 청원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모시는 데는 미숙합니다. 밖에 계신 하나님께 말을 건네는 것은 특정한 시공간, 바로 만나는 그 순간 옷깃을 여미는 것만으로도 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모시는 것은 늘 옷깃을 여미는 태도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6:47), 스스로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나라를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빵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일관된 메시지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6:48~51)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빵이라는 말뜻도 알아먹지 못했고,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준다는 말뜻도 알아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수군거렸습니다. 그렇게 수군거리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선언하십니다.

“내 살은 참 양식이요, 내 피는 참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6:55~57)

60절 이하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그 말씀의 뜻을 알아먹지 못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일부가 수군거렸습니다.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6:60) 제자들은 그렇게 반응했습니다. 급기야는 제자들마저 슬금슬금 예수님 곁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열두 제자만이 남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6:67)

본문 말씀의 상황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6:1~15). 오천 명이 운집해 있던 상황에서 열두 명만 남았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육의 양식을 나눠줄 때는 오천 명이 와글거렸는데, 영의 양식을 받아먹으라고 하니까 다 내빼고 열두 명이 남았습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그렇게 어려웠을까요?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 다들 그렇게 내빼고 말았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 말씀의 뜻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이야기라는 건 다 맥락이 있는 법입니다. 그 맥락 안에서 웬만한 이야기는 다 알아먹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했을 때, 짐승을 잡아먹듯이 하라는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성만찬에 임할 때 어떤 의미로 참여하는지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옷깃을 여미며 그 뜻을 생각하면서 참여합니다.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것이 일종의 은유라는 것을, 꼭 대단한 학식이 있어야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삶을 체화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이 말씀은 그 의미를 풀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체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을 못 알아먹은 것은 지식의 결여나 이해력의 결여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못 알아먹은 것은 삶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씀을 알아먹지 못한 것입니다. 밖에 제시된 표지를 따라가기는 쉽지만, 안으로부터 나오는 깨달음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율법을 따르기는 쉽지만 진정한 믿음의 결단은 쉽지 않습니다. 밖에서 누군가에게 구하기는 쉽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도무지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나 밖의 누군가가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의 실상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는 생명이 없다”(6:53). 당신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Getty Images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 도마복음이 이미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깨달아 알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요한복음은 모셔 들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것은, 그렇게 모셔 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삶을 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삶에 이르는 여정에 대한 이해에서 두 복음서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의 차이입니다. 도마복음이 훨씬 급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인간 실존에 대한 좀 더 냉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 가운데 다가오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고, 더불어 살라’ 하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그렇게 선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모신 삶을 직접 보여 주신 그분을 곧 하나님과 동일시하여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분을 받아들여 모시는 사람은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선포합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미 앞에서 강조하였듯이 그것은 그분의 삶을 온전히 따라 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이 살과 피를 강조한 뜻을 우리는 잘 헤아려야 합니다. 그것은 이른바 가현설(假現說), 곧 예수님의 몸은 일종의 환상일 뿐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이 된 하나님은, 곧 살과 피를 가진 존재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점을 강조합니다. 역사 안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간 그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그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도대체 그게 가능할까요? 오늘날 신학에서는 역사적 예수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이해된 예수님 말고, 몸속에 따뜻한 피를 지니고 실제 사람들 가운데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을까 탐구하며 우리가 실제 삶에서 본을 삼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재현해 보려는 노력입니다.

의사이자 음악가요 또한 신학자였던 알버트 슈바이처는 초기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파산선고를 내렸습니다. 역사적 예수를 재현한다는 것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역사적 예수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의 사실(fact)로서 역사적 예수를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평가대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는 결국 당대의 관념을 예수께 투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갖는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입니다.

하늘의 삶을 산 인간에 대한 탐구, 땅에서 하늘을 살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탐구입니다. 신성에 대립하는 부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안에 모시고 산 사람의 모습을 찾아내려는 시도입니다. 우리가 닮고자 하는 인간, 그대로 따라 살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의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차라리 교리적으로 딱 정리해서,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좋지 않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도그마에 대한 맹신을 조장하는 신앙이 일반화된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믿어서는 본문 말씀이 일깨우는 진실에 다가설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삶의 진실을 부단히 묻고 깨닫는 가운데 우리는 그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언뜻 한 순간의 극적인 체험으로 그칠지 몰라도 그렇게 체험한 진실은 우리 삶을 좌우합니다.

4월을 맞이하면 떠오르는 시인, 그의 시가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입니다. 1960년 4·19혁명 직전의 작품이지만 훨씬 훗날 1969년에야 알려진 시입니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네가 본 건, 먹구름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 쇠 항아리, / 그걸 하늘로 알고 / 일생을 살아갔다. // 닦아라, 사람들아 / 네 마음속 구름 / 찢어라, 사람들아, /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 아침저녁 /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 티 없이 맑은 영원(永遠)의 하늘 // 볼 수 있는 사람은 / 외경(畏敬)을 / 알리라 // 아침저녁 / 네 머리 위 쇠 항아릴 찢고 / 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 / 마실 수 있는 사람은 // 연민(憐憫)을 / 알리라 // 차마 삼가서 / 발걸음도 조심 / 마음 조아리며. // 서럽게 / 아 엄숙한 세상을 / 서럽게 / 눈물 흘려 // 살아가리라 /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2024년에서 2025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이제 봄이 성큼 다가온 오늘 우리는 감히 하늘을 보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전히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는 하늘이지만, 그 먹구름 뒤편의 맑은 하늘을 우리는 알고 있고, 이미 보았습니다. 여의도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그 하늘을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배척하고 제압하고자 하는 권력을 지닌 자들, 그들을 뒷받침하는 법 기술자들은 알 턱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가리는 먹구름일 뿐입니다. 그러나 연민의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며 살아가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거꾸로 하늘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지를 지닌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먹고 진정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그렇게 삶의 의지로 충만한 그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는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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