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40
안녕하세요,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루터의 《대교리문답》 제1부, 십계명의 나머지 부분, 곧 제4계명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제4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십계명의 첫 세 계명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것인데, 나머지 일곱 계명은 우리의 이웃과 관계된 계명들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이 되고 우선되는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루터는 부모의 지위는 다른 어떤 지위보다 특별하고 우월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공경하라’고 명하십니다. 형제와 자매, 이웃에 대한 계명은 모두 사랑하라는 명령 외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는데, 오직 부모에게만 공경하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공경한다’는 말은 이미 사랑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고, 더 나아가 이 말에는 겸손이 들어 있고, 존경하며 두려워한다는 뜻도 담겨있습니다: “공경하라는 것은 단순히 부모에게 친절하고 공손한 말로 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부모를 대하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하나님 다음 자리에 계신 높은 분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1)
그래서 루터는 젊은이들에게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힘없고 보잘것없으며,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특이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분들임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처신이나 행동에 결점이 있다 하더라도 부모가 가진 영예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부모가 가진 인품을 보지 말고, 부모의 지위를 창조하고 임명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실로 우리 모두는 동등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사람 사이에 위아래는 없습니다. 다만 창조 질서에 따른 구분은 엄연히 존재합니다.”(2)
부모 공경은 부모의 사람됨에 그 근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지위를 창조하고 임명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는 부모 공경의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합니다: “부모에게 말을 할 때는 공손한 언어를 사용하고, 고집 피우거나 속을 긁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 비록 부모의 언행이 심해도 침묵하고, 대신 부모의 권리를 인정해 그대로 두십시오. 당신의 몸과 물질을 사용하여 부모 공경을 증명하십시오. 부모가 늙고 병들고 힘이 없고 가난할 때, 섬기고 돕고 돌보아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이 모든 것을 기꺼이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순종과 겸손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일입니다. 이것을 알고 전심으로 행하는 자는 부모를 곤란에 처하게 두거나 굶주리지 않게 하는 반면, 부모를 떠받들고 항상 곁에 두어 자기가 가진 모든 재산과 능력을 함께 나눌 것입니다.”(3)
부모공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며, 이 계명을 따르는 자녀는 수도사의 그 어떤 행위보다 거룩하다고 합니다.(4)
부모공경 계명은 일방적이고 가부장적 사회에서나 통용될 수 있었던 계명이지 오늘 우리 시대에는 강요될 수 있는 계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부모공경과 자녀사랑은 상호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십계명의 부모공경 계명은 약속 있는 계명이라는 점에서 쌍방향적입니다. 십계명은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장수하리라”는 성경말씀은 “단지 오래 산다는 뜻만이 아니라, 장수하며 누리게 될 모든 좋은 것을 소유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건강, 아내와 자녀, 양식, 평안, 좋은 정부 등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라는 것이지요.”(5)
부모 공경에 따르는 복으로 장수 외에도 많은 자녀들에 대한 축복이 언급되는데, 루터는 “자녀들이 잘되고 많은 자녀를 둔 오랜 가문이 있는 것은 그 가정이 바르게 자녀들을 양육하고 그들의 부모를 잘 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공경의 계명은 결국 바른 자녀 교육을 위한 것임을 지적합니다.(6) 루터는 부모공경 계명을 단지 자녀들에게만이 아니라, 부모에 해당하는 모든 윗사람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확대합니다. 즉 명령하고 다스리는 윗사람을 향한 태도로서의 순종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루터는 세상의 다른 모든 권세는 부모의 권위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Herr)으로 불리는 모든 사람은 부모의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보살필 수 있는 힘과 권세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 이런 이유로 이들은 공적 관리를 수행하며 아버지의 임무를 다해야 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아버지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로부터 로마인과 다른 나라 사람들은 집주인과 그 부인을 가정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렀습니다. 또 영주와 군주는 나라를 통치하는 국부로 불렀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인임을 자부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렇게 부르지도 않거니와 최소한의 예의나 섬김도 없기 때문입니다.”(7)
우리는 세속 권세에 대한 루터의 태도의 단편을 여기서 읽을 수 있습니다. 권력자와 백성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확대된 것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루터 역시 중세봉건주의 시대적 상황에 규정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순종은 자녀들뿐만 아니라 모든 고용인에게도 해당되는 미덕입니다. 루터는 모든 “가솔들이 주인 부부에게 직업상 복종하지 말고, 자기 부모에게 하듯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해야 할 일을 강압에 못 이기듯 억지로 하지 말고, 즐거움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하나님의 계명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들도 선한 양심을 가진 주인 부부를 그들에게 주시며 얼마나 귀한 일을 주셨는지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8)
루터는 동일한 방법으로 세상 정부를 향한 순종을 언급합니다: “세상 정부는 앞에서 암시한 대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아버지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에서 말하는 아버지란 단순히 한 가정의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주민의 아버지, 시민의 아버지, 종들의 아버지 등 여러 아버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체의 부모를 주신 것처럼(다른 이름의 아버지로) 세상 정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를 안전하게 하며 의식주와 경작지를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명예로운 최고의 영광으로 그 이름과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존경하고 높일 의무가 있습니다. 마치 땅에서 발견한 가장 귀한 보물과 비싼 보석을 대하듯 말입니다.”(9)
“세상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기꺼이 실천하고 순종하며 섬김을 다하는 자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마음에 들어 하시고, 기뻐하시며, 복된 것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사랑의 마음으로 행하지 않고 무시하고 반항하고 혼란스럽게 떠드는 자라면, 이 또한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자는 그 어떤 은총이나 복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일 굴덴(gulden/ 독일어권의 금화 단위)을 아끼려고 세금과 공과금을 숨기는 자는, 반드시 열 배를 물어내거나 혹은 망나니에게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또는 전쟁이나 역병, 기근으로 굶어 죽거나, 아니면 자녀들의 불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종들이나 이웃, 나그네와 폭군들의 정의롭지 못한 행동과 폭력으로 피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얻고자 행하는 대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10)
루터는 세 종류의 아버지, 곧 혈육, 집, 국가의 아버지 외에, 마지막으로 ‘영적 아버지’와의 관계를 논합니다. 루터는 교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움받고 다스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영적인 아버지도 공경을 받아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을 루터는 개탄합니다: “세상이 그들을 공경하는 방법이라야 고작 빵 한 조각 주는 것도 아까워합니다. 그러면서 삶의 터전을 빼앗고 내쫓는 게 다일 정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영적 아버지들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로 취급받았다고 한 이유가 바로 이런 현실 때문입니다. …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들의 영혼을 돌보는 영적 아버지를 친절히 대하며 기쁘게 부양하는 일에 두 배나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마땅한 공경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애쓰는 당신에게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손사래 치며 자기변명하기 일쑤입니다. 오직 자기 배를 곯지나 않을까 염려합니다. 그렇다 보니 예전에는 배불뚝이 열 명도 충분히 부양했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정직한 설교자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 대가를 우리가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과 복을 거두시고 거짓말쟁이 설교자를 세워서, 우리를 악마에게로 인도하여 우리의 피와 땀을 짜내게 할 것이다.”(11)
제5계명: 살인하지 말라
루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하나님으로부터 공적 권한을 위임받은 세상 정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을 먼저 전제합니다. 하나님이 행악자를 벌할 권리를 가지셨고, 그 권리를 부모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2) 분노와 질책과 형벌은 부모와 공적 권한을 가진 대리인에게 속한 특권이라는 것입니다.(13)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웃에 대한 안전한 보호 장벽과 보루와 도피성으로 삼기 위해 주신 계명입니다. 더 나아가 이 계명은 누구든지 악으로 보복하려는 것을 금지합니다.”(14) 살인 자체를 금지하면서 동시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명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살인은 신체에 가하는 행위만이 아닙니다. 루터는 손과 입, 마음으로도 살인하지 말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악을 행해야만 살인이 아니고, 선을 무시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계명은 단순히 악행을 금하라는 뜻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 않아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미리 보호하지 못할 때, 미리 구하지 못하여 고통과 피해를 입게 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옷을 입힐 수 있는 형편인데도 헐벗은 자를 그대로 두면, 당신은 그를 얼어 죽게 버려둔 것입니다. 배고픔으로 고통당하는 자를 보았는데, 먹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를 굶어 죽게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직면한 자들이나 그런 위급한 순간에 처한 사람들을 보거나 또한 구할 방법을 알고 있는데도 구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살인한 것입니다.”(15)
루터의 이런 확대된 해석은 마태복음서 25장에서 메시아가 자신을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에 걸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과 동일시하신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16)
▲ Rembrandt van Rijn, 「Moses zerschmettert die Gesetzestafeln」 (1659) ⓒWikipedia |
제6계명: 간음하지 말라
6계명 이하의 모든 계명은 각종 해악으로부터 이웃을 보호하기 위한 계명들인데, 놀라울 정도로 잘 배열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계명은 각 개인과 관련되어 있고, 그 다음 여섯째 계명은 거기서 확장된 관계를 다루는데, 우선 가장 가깝고 아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관계부터 다룹니다.
루터는 부부는 살과 피를 같이하는 한 몸이고, 손상된 부부관계만큼 큰 아픔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므로, 자기 아내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웃 사랑의 확장이라는 것이 이 계명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17) 그러나 간음금지계명은 육체적 간음뿐만 아니라 모든 정결치 못한 말과 행위, 생각까지도 금하는 계명입니다. 단순히 보이는 행위만이 아니라 부정한 모든 종류의 원인, 동기, 수단과 방법들도 금지합니다.(18)
이 금지명령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른 결혼생활에 있습니다. 부부는 하나님이 세우신 거룩한 지위이고, 하나님은 결혼을 모든 제도 중에 으뜸으로 삼으셨는데, 그것은 서로 진실한 열매를 맺어 자녀를 낳고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양육하고 성장하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19)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성직보다 귀하고, 세상 권세자의 직무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결혼을 천시하거나 멸시하는 우매한 자나 거짓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이렇게 주장한 것입니다. 교황을 따르는 패거리들, 사제, 수사, 수녀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계명을 거스르며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털끝만큼의 사랑도 없고, 위대하고 거룩한 결혼의 정결함에 대해 관심 갖는 것도 거부합니다. 대신 노골적이며 수치스러운 불륜이나 혹은 너무도 악한 행동이기에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행위를 비밀리에 저지릅니다. 불행히도 이런 사건들을 우리는 너무나 쉽게 접하고 있습니다.”(20)
루터는 결혼한 부부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정결한 결혼생활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십시오. 아내는 하나님이 남편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부부의 정결함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며 존경하며 살 때 이뤄집니다. 서로가 마음을 다하여 성실히 사랑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사랑과 정열을 정결로 옮겨 놓는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것이 몸에 익으면, 정결은 억지가 아닌 자발적 열매가 됩니다.”(21)
제7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루터는 지갑을 훔치는 자만 도둑이 아니라, 이웃을 속여 이익을 도모하는 자 또한 도둑이라고 합니다: “금고나 지갑을 훔쳐야만 도둑질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의미로 도둑질은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부당한 손실을 끼치는 모든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도둑질은 시장, 식료품 가게, 정육점, 술 창고, 작업장, 곧 거래가 이루어지고 금전이나 재화나 노동이 교환되는 모든 곳에 만연하고 있습니다.”(22)
태만하고 게으르며 악의적으로 주인의 마음에 괴로움을 줄 정도로 물건을 낭비하거나 맘대로 소비하는 고용인도 도둑이라고 합니다. 또한 “대충 일하면서 공돈이나 바라고 사기 치고 자기 일에 성실하지 못한 수공업자와 노동자들, 일당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루터는 이 계명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좀도둑보다 훨씬 질이 나쁘다는 것입니다.(23)
그러나 좀도둑보다 더 나쁜 도둑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절도하는 공공의 도둑입니다. 이런 도둑은 모든 힘과 수단을 이용해 시장과 일터에서 활개를 칩니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결함 있는 상품을 팔고, 도량을 속이며, 위조 화폐를 유통시키고, 타인을 속입니다. 비밀스러운 속임수와 교활한 계획 아래 상거래를 하면서 타인의 이익을 탈취합니다. 또 어떤 자들은 고의적으로 탈취하고 속이며 남을 괴롭힙니다. … 이런 것들은 최고의 장사치와 최대의 상인조합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흔한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자리를 곰곰이 돌이켜보면, 도둑으로 가득 찬 거대한 마구간 같습니다.”(24)
루터는 작은 좀도둑과 진짜 큰 도둑을 나눕니다. 진짜 큰 도둑은 현금털이범이나 금고털이범들과 달리 귀족처럼 의자에 앉아 법을 지키며 존경받는 시민으로 칭송받습니다. 그러면서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절도하고 도둑질합니다. 이들 “큰 도둑은 황제와 영주들을 대동하여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온 독일 천지를 매일 약탈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큰 도둑들을 보호하는 우두머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는 로마의 청중들 한가운데 거룩한 의자에 앉아 온 세상의 재물을 훔치라고 오늘도 명령하고 있는 자”(25)입니다.
루터는 이 계명을 그리스도인들, 극악무도한 고리대금업자들에게는 물론 누구보다 재판관과 교도관, 그리고 사형집행인들에게 설교해야 한다고 합니다.(26) 왜냐하면 이들은 보수를 받고 이웃의 소유와 재화를 보호하고 촉진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도둑질과 함께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도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27)
도둑질 금지계명의 다른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들의 탄식과 부르짖음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의 상처받은 소리는 하나님께 상달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그들의 눈물을 끌어안으십니다.”(28)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국가는 경제에 관여해야 한다고 루터는 주장합니다. 교회의 소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이지만, 노골적인 방종을 제어하는 일은 영주와 정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주와 정부는 무역과 상거래의 모든 분야에서 가난한 자들이 아픔을 당하거나 착취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타인의 범죄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도록 질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공적 직무를 과감하게 수행해야 합니다.”(29)
루터는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성경에 근거하여 확신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잠언에서 가르치듯이,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고 친절로 이 일을 준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풍성히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제8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너희는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는 말 그대로, 이 계명의 우선되고 분명한 의미는 가난하고 무고한 자들을 향해 거짓 증언하고 고소하며 중상모략을 일삼는 자들을 벌하는 공적 법 집행에 분명한 방점이 있습니다.(30)
사람이라면 대부분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것을 거리끼는 반면에, 자신에게 이로운 돈이나 친절, 우정, 소원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부정직한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불가피하게 억압받고 재판에 져서 억울한 형벌을 받습니다.(31)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재판관은 신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신앙만 있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용감하고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증인 또한 마찬가지로 두려움 없고 정직해야 합니다. 재판관은 자기 귀와 눈을 완전히 닫고 장님이 된 채 제시된 증거에만 의존하여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32)
법을 다루는 자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고 루터는 말합니다. 모든 사건을 정직하고 공평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해야 합니다. 돈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 때문에 정의를 왜곡하거나 숨기거나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 계명의 핵심이며, 법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적용되는 가장 명확한 뜻입니다.(33)
이것은 특히 악마의 지시에 따라 밉살스럽고 수치스레 행하는 뒷말과 중상모략에도 적용됩니다. … 사람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해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듣고자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한 본성입니다. 제 자신은 악해도 자기에 대해 누군가가 나쁘게 말하는 것은 참지 못합니다. 그저 온 세상이 자기를 향해 찬사를 보내기만 바랍니다. 또한 누군가가 타인을 호평하면 듣기 싫어하고 이내 참지 못합니다.(34)
죄를 아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판결까지 해대는 자를 보고 우리는 험담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이야기를 듣고도 동네방네 퍼뜨리며 입방정 떨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자들은 진흙 바닥을 뒹굴며 주둥이로 온 바닥을 샅샅이 핥아 대는 돼지새끼나 다를 바 없습니다.(35)
그러므로 하나님은 험담을 금지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웃의 나쁜 행동에 대해 뒷말해서는 안 됩니다. 확실히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말입니다. 만일 정확히 알지도 못하거나 또는 순전히 남에게 들은 내용이라면 더더욱 입을 다물라고 루터는 권고합니다.(36) 친구든 적이든 간에 누구에게도 혀로 이웃에게 손상을 입히지 말라고 합니다. 합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거나 그를 고쳐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이웃을 나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말입니다. 우리의 혀는 사람들을 좋게 말해 주고, 이웃의 약점을 덮어 주며, 명예롭게 그것들을 가려 주기 위해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그리스도는 복음서에 말씀하셨고, 그 말씀으로 이웃을 향한 모든 계명을 종합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37)
제9, 10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드러난 범죄 행위뿐만 아니라 이웃의 아내나 재산을 탐내는 것, 그리고 이런 일을 도모하려는 마음조차 금지하면서 이것도 죄라고 하십니다. 이 계명을 유대인에게 주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의 하인들은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일한 만큼 노임을 받을 권리도 없었고, 자기 소유와 육체도 집 안에 있는 가축이나 다른 재화와 동일하게 주인의 재산에 속했습니다.(38)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좀 더 넓은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비록 합법을 가장한 좋은 핑계거리가 있을지라도, 이웃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라면 누구도 이웃의 아내와 종, 집, 뜰, 목장, 초원, 가축을 약탈하려는 생각이나 계획을 세우면 안 된다.’고 해석한 것이지요. 앞서 7계명에서는 불법적인 것을 금지했습니다. … 그러나 이 계명은 다른 곳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를 갈취했지만 합법이기 때문에 법을 어겼다고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고, 어쩌면 세상에서 부러운 박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 계명을 통해 그런 행위를 금지한다는 사실입니다.(39)
이 마지막 계명은 세상에 악당으로 선고된 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종의 ‘경건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이들은 사랑받을 만하고, 정직하며, 흠잡을 게 없다고 칭송받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앞에 나온 계명들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와 전혀 상관없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유대인, 상당수의 귀족, 성주와 영주들은 이 계명 앞에 세워집니다.
대부분 이런 차이는 이웃의 재산을 빼앗기 위한 소송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막대한 유산이나 부동산 문제로 다투거나 쟁론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좀 더 많은 법적 증빙서류를 만들고, 이런 서류로 이득을 취하려 합니다.(40)
이런 일은 매우 일상적인 상거래에서도 빈번히 나타납니다. 어떤 이가 타인의 손에 든 것을 아주 재빠르게 잡아챕니다. 피해자는 그 이후에나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고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무시하고 없던 일로 잡아뗀다든지 혹은 이익과 필요에 따라 어떤 다른 일로 협박하여 걱정거리를 만들어냅니다. 아마도 당하는 사람의 상황은 거의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봉착해 있거나 자기 재산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부채가 많은 경우일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경우, 부자는 불법이 아닌 합법과 정직을 가장하여 그의 재산의 절반이나 그 이상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먼저 가져가는 놈이 임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41)
다음으로, 이 계명이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질투’와 ‘소유욕’을 물리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명으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뿌리와 근원을 제거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아주 분명하게 이 말씀을 하십니다. ‘탐내지 말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정결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이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계명은 다른 계명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지 고발할 것입니다.(42)
십계명의 마감 말
루터는 십계명의 마감 말을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상기하면서 서술합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말씀은 위협적인 진노인 동시에 아주 친절한 복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경고하여 하나님의 뜻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이를 통해 그분의 뜻 가운데 움직이게 합니다.(43) 성경은 곳곳에서 이 계명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두 점으로 모든 것을 몰아갑니다.(44)
첫째 계명은 모든 계명 속으로 흘러들어갑니다. 반대로 모든 계명은 첫째 계명으로 되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첫째 계명은 처음이요 끝이고, 다른 모든 계명을 하나로 엮어주는 고리이며 기반입니다.
단언컨대, 십계명은 젊은 세대에게 유용하고 필요합니다. 이것을 항상 가르치고 권면하고 기억하게 하십시오. 단순히 소 매질하듯 억지로 강요하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하시기 바랍니다.(45)
바로 그 때문에 모든 벽과 구석에, 심지어 옷에도 이 계명을 써 놓으라고 구약에서 명한 것입니다. 이렇게 명하는 목적은, 유대인들이 하듯 전시용이 아닙니다. 항상 눈앞에 두고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행위와 모든 삶의 자리 가운데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디로 가든지 글씨로 새겨진 계명을 볼 수 있게 하여, 시장이나 상거래 행위일지라도 장소와 시간을 막론하고 매 순간 몸에 익히라는 뜻입니다. … 아무도 십계명을 지키러 멀리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46)
마틴 루터는 “십계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른 어떤 가르침보다도 최고의 보화로 여기고 높여야 하고”(47), 특별히 젊은 세대에게 가르치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십계명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르고, 오늘의 젊은 세대가 십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이 문고리에 단단하게 매여 있으면 있을수록 문이 잘 움직이듯이 계명에 자신을 자발적으로 단단히 묶어두면 묶어둘수록 더 자유롭다는 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킴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신앙을 정립한 마틴 루터도 십계명을 젊은 세대에게 가르치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뜻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주 |
(1)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역 (서울: 복있는사람, 2017), 100. (2)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01. (3)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01-102. (4)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05. (5)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12. (6)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14. (7)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15-116. (8)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16. (9)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19. (10)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19-120. (11)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23-124. (12)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30. (13)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31. (14)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32-133. (15)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34-135. (16)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36. (17)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40. (18)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41. (19)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42. (20)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45. (21)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47. (22)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49. (23)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50. (24)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51. (25)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52. (26)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53. (27)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57. (28)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59. (29)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0. (30)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2. (31)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3. (32)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3. (33)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4. (34)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6. (35)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7. (36)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68. (37)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74-175. (38)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77. (39)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79. (40)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80. (41)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81-182. (42)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85. (43)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91. (44)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92. (45)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95. (46)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96. (47) 마틴 루터, 《대교리문답》, 197. |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