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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본 적의 본질

기사승인 2024.03.27  04: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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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의 계보학④

▲ 원영상 원광대학교 교수

전쟁만큼 적과 아군으로 명백히 나뉘는 것은 없다. 전쟁의 폭력성은 어떤 형태로든 승자와 패자의 삶으로 귀속된다. 석존은 자신의 조국이 강자에게 먹히는 이러한 극한의 현실을 목격했다. 『증일아함경』에는 부친의 왕국인 카필라국이 코살라국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야기가 나온다. 카필라국의 비류왕이 침입해 올 때, 석존은 군사들이 지나가는 도로 옆의 마른 나무 아래에 앉아 명상에 잠겼다. 비류왕이 “잎이 무성한 니그로다 나무도 있는데 왜 마른 나무 밑에 앉아 계시냐”고 묻자, 석존은 “친족의 그늘이 남보다 낫기 때문이요”라고 답했다.

군사들이 철수했다. 다음 침략 때에도 만류했지만 결국 카필라국은 코끼리를 앞세운 코살라국의 전력에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석존은 “전생의 업보란 하늘로 옮길 수도, 쇠그물로 덮을 수도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양자의 인연에 대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증오와 원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로까지 윤회의 사슬을 형성해 왔음을 밝혀준다.

전쟁은 살인을 동반하는 것으로 불교의 첫째 계율인 불살생계를 파괴한다. 이는 출가는 물론 재가에게도 해당되는 계율이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전사마을의 촌장이 “전쟁 중에 싸우다 죽으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속설”에 대해 묻는다. 석존은 잘못된 견해라며, 그처럼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는 “지옥이나 축생 두 가지 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설한다. 윤회의 가장 낮은 층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가 그렇듯이 현실은 언제나 전쟁의 연속이다. 이상과 현실은 그 거리가 멀다. 정법에 의거하여 통치한다는 전륜성왕 또한 사방에 강력한 군대를 갖춘 뒤에 이뤄진다. 실제로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불법에 귀의한 것은 처참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의 일이다. 불법의 통치는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을 앞세운 대승불교에 와서는 정의로운 전쟁을 주장하기도 한다. 대승의 초기경전인 『대살차니건자소설경』에는 전쟁은 최대한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할 경우, 통치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한다. 중세의 기독교가 정의의 전쟁을 말한 것과 같은 논리다.

이러한 정의의 전쟁에서는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나쁜 업장을 짓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석존은 의도하지 않는 업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명백한 적이 존재하는 이상 이 적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딜레마다. 왜냐면 겹겹이 얽힌 상극의 인연이 전쟁 이후에도 유전(流轉) 되기 때문이다.

석존의 초기 설법인 『숫타니파타』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죽이지도 말고, 남을 시켜서 죽이지도 말라. 그리고 죽이는 것을 용인하지도 말라”고 하며, “모든 존재자에 대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라는 당위를 설했지만, 현실은 여전히 약육강식이 지배한다. 석존이 세상에 의문을 가진 것도 왕자 시절에 농경제 행사 때 목격한 것에 있다. 보습으로 일구어진 흙덩이에서 뒹구는 벌레를 새가 날아와서 쪼아 먹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을 통해 세상 또한 약자가 강자에게 잡아먹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승불교의 정의로운 전쟁은 이러한 현실의 불가피한 타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경에서 적에 대한 기록은 아마도 석존의 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내면의 욕망을 비유로써 제시한 것이 처음일 것이다. 이 욕망을 마왕이라고 보았다. 그 적을 최후에 정복함으로써 대각을 성취했다.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적, 극복 대상으로서의 현실의 적은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한다.

『관무량수경』에서는 아예 부왕을 가두고 어머니를 살해하고자 하는 자식의 모습을 보여주며, 상극의 인연으로 뒤덮인 예토(穢土)를 싫어함으로써 극락정토를 구하는 구도가 설정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그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대신 극락을 희구함으로써 여전히 선악이 교차하는 상극과 오탁악세의 사바세계는 그대로 남는다.

비켜둔 현실과 관련하여 피아를 상정한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과 『과거현재인과경』에는 원친(怨親)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라고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불교를 믿는 사회, 예를 들어 일본 중세에서 원친평등의 논리로 발전하기도 했다. 파멸시킨 적의 장례를 함께 지냄으로써 그들을 동등하게 대했다는 역사다. 그러나 이는 평등성보다는 적의 원한을 제거함으로써 우환을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Samyutta Nikaya」. 보살의 출가와 부처가 된 후 교리를 가르쳐 달라는 브라마 사함파티의 요청 사이의 사건을 보여주는 신할리어 표지(안쪽)와 야자수 잎 페이지가 삽화로 그려져 있다. ⓒWikipedia

불교 본래의 사상적 차원에서는 피아는 근본적으로 하나의 동질성, 즉 적의 본성과 아군의 본성은 동일하다는 것에 기반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피아라는 적대성은 항상성, 실체성은 없다. 이는 대승불교에 와서 깊은 사색이 낳은 결과다. 사회적 연기 차원에서 모든 대립은 의존 관계에 놓여 있다는 불교적 상식에 입각해 있다. 주객, 선악, 미추, 시비, 이해 등의 모든 이원적 세계는 상대적이다. 오늘날 국제사회가 보여주듯이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가까울수록 철천지원수가 된다. 멀리 있던 적이 어느새 가까운 이웃이 된다. 이해관계는 새옹지마처럼 끊임없이 요동친다.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쌍조(雙照)이거나 부정하는 쌍차(雙遮)다. 함께 존재하는 동시에 함께 소멸한다. 상대적 현상은 나무의 잎과 가지와 꽃과 같다. 그것의 뿌리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피아 각각의 본성은 무선무악이다. 마음이 요동치면 능선능악이 된다. 인간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오가는 것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 때문이다. 적에 대한 인식은 분별의식 때문이다. 피아를 구분하는 것은 아(我)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자기보호의 본능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피아의 식별로 이어진다.

석존 이후 불교는 지극히 인간적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행을 추구한 것은 인간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해소를 위해서다. 피아, 선악, 능소(주체와 객체)의 무분별은 삶에 드리운 그림자 제거를 통해 참된 평화에 이른다. 번뇌를 제거하는 것, 그것이 열반, 즉 평화라는 것은 결코 관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별과 집착에 의해 생긴 현상의 차별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여 『법구경』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적의(敵意)들은 결코 적의에 의해 멈추지 않는다. 그것들을 멈추게 하는 건 오직 무적의(無敵意)뿐이다”라며 적을 소멸시키는 불타의 방식이 등장한다. 또한 “분노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악은 선으로 다스리고, 인색한 사람은 보시로 다스리고, 거짓말쟁이는 진실로 다스려라. 그가 전쟁터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을 정복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그가 사실상 더 고귀한 승리자이다”라고 한다. 적과 적의의 본질은 마음에 있으며, 자비와 사랑 또한 그것의 뿌리가 같음을 드러냄으로써 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불교가 모든 이원적 세계를 초월하여 다른 세계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명확한 파사현정의 계기가 있다. 무분별의 경지는 피아, 선악, 시비의 이원론적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한다.

『쌍윳따 니까야』에서는 “학살자는 학살자를 부른다. 정복자는 정복자를 부르고, 학대하는 사람은 학대를 당하고, 격분하는 자는 격노한 사람을 부른다. 따라서 업의 진전에 의해, 강탈한 자는 강탈을 당하게 된다”고 한다. 피아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상대적인 대결로 인해 쌓이는 업의 증강을 막기 위한 것이다. 업의 악순환을 끊는 것, 즉 업으로부터의 자유로 인해 자신과 적을 무화(無化)시킨다. 그것의 본질이 무아든 청정법신이든 진여본성이든 무엇이라고 해도 좋다.

인류가 가보지 않은 이 길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이원성이 붕괴됨으로 인해 정체성의 상실이 두렵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무상의 세계 내에서 과연 나라는 정체성이 있기나 한 것일까. 진여법신이든 하느님의 세계든 테두리 없는 바다에 풍덩 빠질 용기가 절실한 시대다.

원영상(원광대학교) wony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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