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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르라

기사승인 2024.03.25  02: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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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만히 바라지 말고, 만들어 내야 합니다”(마가복음 9:2-8)

▲ 「12th century icon of the Transfiguration of Christ」 ⓒWikimedia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이상중 목사는 한 주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월요일에는 노회 일로 홍천을 다녀와야 했고, 화요일에는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전라도 광주에 다녀왔습니다.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4대 종단 DMZ 평화순례단과 함께 간성에서 출발해 응봉산을 넘어 초도로, 초도에서 마차진 산을 넘어 명파까지 이어지는 총 32km를 걸었습니다. 너무 바빠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목요일 드디어 월요일부터 이어졌던 모든 일정이 끝나, 집으로 돌아와 산의와 봄의를 맞이하기 위해 하교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버스가 다가오는데 버스를 운전하시는 주무관님이 저를 보시더니 활짝 웃으셨습니다. 속으로 ‘왜 저렇게 웃으시지?’ 싶었는데, 버스에서 내리는 산의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세요?”

먼저는 버스 안에서 아내인 이정은 집사(차량 안전 주무관)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저를 멀리서 보고 산의와 봄의에게 “아빠가 너희 기다리신다.”라고 말했을 때, 산의가 “저희한테 아빠가 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대화가 버스를 운전하시는 주무관님이 저를 보고 활짝 미소 지으신 이유였습니다.

“누구세요?”라고 말은 했지만, 저를 대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몸짓은 달랐습니다. 상당히 편안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아이들은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부모와 함께 있으면 안심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상관없이 나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성도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늘 잊지 않고 기억하며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군중들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자신들의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환영받은 일에 대한 기념 주일입니다. 요한복음 12:12-13 “다음날에는 명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 하고 외쳤다.”

이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환영인파를 보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말하였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12:19) 많은 무리는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마중을 나갔으며, 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예수님을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할 메시아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2:16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시편 46:7-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 백성 스스로가 구원을 이루었다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신 구원의 역사(기적)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런 구약의 말씀과 약속을 알기에 많은 군중은 특별히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고대에서 ‘승리’를 의미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에게나 운동 경기의 우승자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건넸습니다.

이런 군중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을 향한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난의 시기, 모욕의 시기는 가고 이제 승리의 날만이 남았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기적이 일어나고, 구원의 날이 다가오리라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군중들의 기대는 무너졌고, 환영했던 목소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약자로, 패배자로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 그리고 고난주일은 이런 어리석은 군중과 같은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를 돌아보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의 욕망, 어리석음, 어둠을 발견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왕으로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왕으로서 로마로부터 해방할 구원자가 아니라면, 예수님은 어떤 방식으로 당시의 사람들을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던져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따르고,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따르는 삶이 바로 ‘구원’입니다. 가만히 서서 구원을 기다리는 삶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움직여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요청,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4-35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듣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욕망을 예수님에게 투영하기 바빴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기적이 메시아를 통해 일어나기만을 바랐습니다.

요한복음 12:24-2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자신들의 목숨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사랑하여 스스로는 밀알이 되지 않으려 했습니다. 죽지 않고 승리하려 했고, 죽지 않고 열매를 따 먹기를 원했습니다. 고난 없는 달콤함만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죽는 것이 구원이고,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 구원임을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군중과 제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2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3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4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말을 주고받았다.”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누더기 같은 옷이 새하얗게 빛날 수도 없을뿐더러, 유대인들에게 가장 위대한 위인인 엘리야, 모세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눈에 이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누구나 만나보고 싶고, 이야기 듣고 싶은 조상이었습니다. 얼마나 황홀하고 아름다운 광경이겠습니까? 

황홀경과 두려움에 빠진 베드로는 이렇게 제안합니다. “5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에는 랍비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겠습니다.’ 6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우리 모두 이곳에 머무릅시다.”라고 말합니다. 이제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환상 속에 머무르기를 베드로는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는 삶,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말씀을 베드로는 잊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또 다른 신비한 일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펼쳐졌습니다. “7 그런데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8 그들이 문득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고, 예수만 그들과 함께 계셨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안주할 때도 아니고, 황홀경에 머물 때도 아닙니다. 나의 만족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닙니다. 나의 유익에 머물러 있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르라는 말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 밀알 하나가 죽어 땅에 떨어져야 하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승리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날 성도들의 꿈, 희망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참 생명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참 생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참 생명을 향해 살아가라고 독려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기적을 보려 하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삶의 과정이 바로 구원입니다. 무엇을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이루어 주십시오!’가 아니라 ‘이루어 가겠습니다!’로 우리의 호소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루어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이루어 가겠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길 가만히 바라는 성도가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고난주간에 이루어지는 전교인 새벽기도회를 통해 나의 욕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傾聽)하는 성도가 되어, 내 뜻을 이루는 삶이 아닌 예수님이 말씀하신 삶을 이루어가는 성도,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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