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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숨겨진 것일까

기사승인 2023.06.15  15: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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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 메시아론에서 농민의 위치 (4)

▲ 예수의 비유 속에서 소작농들은 자신의 상황을 발견했다. ⓒGetty Images

복음서 중에서 예수는 이야기 대부분을 비유를 통해 전달한다. 그 비유들은 제자들도 곧바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었으며 바리새인들은 비유 속에서 질타를 받는 이들이 자신임을 깨닫고는 예수를 잡아 죽일 생각에 골몰하기도 한다. 왜 예수는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외인은 누구였을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비유로 말을 할 때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첫 번째는 말의 핵심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로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성서의 많은 부분이 은유와 비유 그리고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독자들은 알고 있다.

일례로 요한 계시록 같은 본문은 수많은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식민지적인 특수한 상황 아래 유대의 민중 독자층들을 제외한 외부인들은 그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끔 쓰여졌다. 예수의 비유들도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알아들었을 것이나 이방인들이나 지배층들은 그 진의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비유의 의미에 관해서 설명하는 대목에서 그 직접적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마가복음 4장 11-12절(마 13:10-17, 눅 8:9-10)을 보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1)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라고 되어있다. 예수는 그 이유를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며 그들이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을 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병행 구절인 마태복음 13장 10-17절에서는 마가복음의 ‘외인’이 ‘그들’에게는 허락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외인’과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아마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부자들과 권력자, 대지주들과 부재지주들과 바리새인 집단들로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에게는 원수 같은 존재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는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적이고 착취적인 민중의 억압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셨다.

이것은 진의를 감추기 위한 장치이다. 이를 토대로 비추어 보면 복음서의 예수의 비유들은 제임스 스콧의 관점에서는 은닉 대본(2)에 해당한다. 마가복음 4장 11-12절과 그 병행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예수가 비유를 통해 가르친 이유가 외인이나 지배적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로부터 명확하게 진실을 감추고자 하는, 즉 은닉하고자 하는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본문 앞의 비유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것을 유념해서 볼 필요가 있다. 이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예수와 함께 한 사람들(오클로스)과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을 때에 그 비유의 뜻을 감추시고 그들이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단호하게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거부하신다.

또한, 비유의 끝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못을 박는다. 무리와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어보았다는 것은 일부는 알아들었지만 일부는 못 알아들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가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한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많은 이들이 알아 들었으리라는 것이다.

필자가 만일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던 그 무리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면 길가에 떨어져 새들에게 먹혀버린 씨앗도,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져서 해가 돋은 후에 햇볕에 타죽은 씨앗도, 가시떨기에 떨어져 결실을 못 한 씨앗의 모습은 민중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대변해주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 듣고 있던 민중들은 무릎을 치면서 우리의 비참한 현실과 삶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로 설명해주시니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 삶인지 깨닫게 되고 이에 공감해주는 예수의 비유 말씀에 눈물이 났을 것이다.

뭘 해서라도 먹고 살아보려고 애를 써보았지만, 결국엔 딱딱한 길바닥 같은 삶의 현실을 뚫지 못하고 강자(새)에게 잡아먹히는 삶,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고된 노동으로 지쳐 삶의 뿌리조차 흔들리고 말라버린 삶, 그나마 가시덤불 같은 현실을 뚫고 근근이 살아보았지만, 결실을 보지 못하는 캄캄한 삶들이 어쩌면 이 비유가 말해주는 민중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그 씨앗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투영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에서 뿌려진 씨앗들은 민중을 의미하고 있다고 보여지며 부재지주들의 폭력이 비유 속에 녹아있다고 보는 것이 당시 1차적 청중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다.

이에 반해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 무성하여 결실을 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수확을 올린 사람은 누구인가? 이는 누가복음 12장 16-21절에 나오는 부유한 농부 이야기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한 부자로 소개되며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서 더 이상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서 그곳에 보관하고 자신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한다.

그는 소농이나 소작농이 아니라 지주였을 것이다. 예수는 본문에서 이를 어리석은 자로 명명하며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책망한다. 하나님에게 부요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가난한 자, 굶주린 자, 즉 소자에게 행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이런 측면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은 오히려 민중들에게 과도하게 부과되었던 각종의 세금과 토지세, 소작료, 그리고 춘궁기 때 빌린 곡식에 대한 이자들의 과도한 폭력적 징수의 은유적 표현으로 보여진다.

당시의 대부분 민중은 농민이었거나 소작농이었거나 농사를 기반으로 삶을 유지해오던 소농 중심의 가족농이었다. 갈릴리 지방은 토양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하여 주변 도시들에는 풍부한 식량을 제공해주던 곳이었다. 그런데 정작 갈릴리 사람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쫓겨나 유리 방랑하는 떠돌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떠돌이들 처지에서는 좋은 땅에 떨어져, 좋은 땅을 차지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수익을 올리는 저들이야말로 원수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진짜 예수님의 설명일까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도전하는 본문 자체의 모순적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것은 비유 뒤에 이어지는 예수 자신의 비유 해석 부분이다. 예수가 직접적으로 비유를 해석해 준 본문은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가라지 비유’를 복음서 중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그 해석에는 이미 교회 공동체의 해석들이 삽입된 듯한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비유로 이야기하는 이유를 그렇게 강조하여 그들로 통칭되는 식민지 지배 세력들과 성전 체제를 둘러싼 제사장 그룹, 바리새인들, 그리고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그들로 하여금 떠돌이 인생을 살게 만든 대지주들과 부재지주들로 대표되는 장본인들이 비유의 뜻을 깨닫고 죄 사함을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해놓고 그 비유의 뜻을 선뜻 명확하게 해석해 준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본문의 연결점들을 끊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예수가 홀로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따로 해석해 주었다는 단서를 달면서 친절한 해석을 어색하게 덧붙인다.

그런데 비유에 대한 예수의 해석은 너무 ‘케리그마’적이다. ‘씨앗은 말씀이다’라고 답을 주는 것은 너무나 정언적이다. 그러한 예수의 해석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할 때 주로 씨앗, 누룩을 가난한 자, 병든 자, 핍박받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 비유를 들 때 민중의 상징처럼 사용한다. 그런데 예수의 해석에서 씨앗은 말씀이라는 해석이 느닷없이 끼어든다. 예수의 비유와는 결이 다른 어떤 충돌하는 지점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뒤에 이어지는 씨앗의 성장과 하나님 나라, 그리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 속에 씨앗에 대한 연속적인 의미와 이미지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오클로스’로 명명된 사회 속에서 기생충 같은 존재로 눈에 보이지 않는 보잘것없는 민중들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우뚝 서게 되고 역사의 주체로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사이에 느닷없이 예수의 직접적인 비유의 해석이 등장한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씨앗에 대한 민중적인 의미론적인 연속성을 무시하고 ‘씨앗은 말씀이다’라고 선포한 것은 갈등의 해결책처럼 일방적으로 주어진다. 이는 아마도 마가 공동체의 특수한 상황이 이러한 해석을 삽입함으로써 공동체 내의 갈등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른 비유들과는 달리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가라지 비유’는 다양한 해석을 낳으며 누가 민중을 억압하는 이들이냐는 계급적인 갈등을 낳았을 것이다. 공동체 내에서의 갈등을 순화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은 예수의 직접적인 해석을 삽입함으로 갈등사태를 정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은혜로운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안병무는 복음서가 전승된 것은 케리그마를 정리했던 자들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다른 전승모체가 있어서 그들이 예수 사건을 전했다고 보고 있으며 케리그마를 성립시킨 층과 예수 사건을 전한 층이 분명히 서로 다른 전제 위에 서서 그 각각을 전승했고 그것이 마가복음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3) 이러한 측면에서 ‘사건 전승의 모체’ 개념과 ‘은닉 대본’이라는 방법론은 같이 역사적 배경과 사회학적 성서해석을 기반으로 케리그마가 아닌 예수의 비유 속에 나타난 사건 전승의 모체를 밝혀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수의 직접적인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공개대본’(4)으로써 안병무의 표현으로는 ‘공적인 발표의 성격’이 오늘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교회는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다시 말해 감추어진 ‘은닉 대본’ 속에 고통받는 소작농들과 민중의 삶을 보지 못했고 그들을 억압하고 유린하는 유대교 기득권 세력들, 대지주, 부재지주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공개대본’으로써 은혜로운 ‘말씀’ 뒤에 감추어진 민중들의 고난을 지금까지 간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지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도래한 건 교회였다.”라고 말한 알프레드 루아지(Alfred F. Loisy)의 말은 상황에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미주

(1) Mark 4,11 “καὶ ἔλεγεν αὐτοῖς· ὑμῖν τὸ μυστήριον δέδοται τῆς βασιλείας τοῦ θεοῦ· ἐκείνοις δὲ τοῖς ἔξω ἐν παραβολαῖς τὰ πάντα γίνεται”(Nestle Alland 28th). ‘외인’은 이 구절에서 ἐκείνοις δὲ τοῖς ἔξω이고, ἐκείνοις는 영어로 those, δὲ는 but, τοῖς는 the, ἔξω는 원형이 ἐκ이고 부사이며 outside로 번역된다. 즉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마가복음의 삶의 자리가 갈릴리인 것을 감안하면 이는 공간적으로 갈릴리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면서 비유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감추고자 했던 대상들을 지칭한다고 보여지는데, 특히 이는 갈릴리 바깥에 살면서 갈릴리의 소작농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소작료를 부과했던 부재지주들일 가능성이 높다.
(2) 제임스 스콧/ 전상인 옮김,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대본』(서울: 후마니타스, 2020), 85.
‘은닉대본’은 지배 권력의 면전에서 피지배자들이 표현할 수 없는 분노와 대응적 공격을 환상 속 그리고 가끔은 비밀스런 관행 속에 숨겨서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지배 권력 앞에서 굽신거리며, “네 알겠습니다.” 등의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공개대본’이라고 명명한다.

(3)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257.
(4) 제임스 스콧, 『지배, 그리고 저항의 예술-은닉대본』, 30, 32 참조. 제임스 스콧은 은닉대본과 공개 대본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검토함으로써 지배 권력이 공식적 언설에 미치는 효과와 영향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공개대본은 피지배 집단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지침임을 명확히 밝힌다.

안재학 목사(석천교회, 연세대 박사과정) jagafoc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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