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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의 비참한 현실만 보인다

기사승인 2023.06.08  01: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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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 메시아론에서 농민의 위치 (3)

▲ Marinus van Reymerswaele, 「The parable of the unjust steward」 (1540) ⓒKunsthistorisches Museum in Vienna

유독 왜 이리도 가혹한가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 달란트 비유로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다. 달란트 비유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갑론을박의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포도원 비유와 비교해서 읽어보면 이 또한 기존의 해석과 달리 부재지주가 포도원을 맡기고 자리를 비우듯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또한 소작농들에게 떠나면서 맡긴 토지나 재산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다섯 달란트 토지를 받은 소작농은 지대와 세금을 내고도 여유가 있었고 얼마간 수익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달란트 토지를 받은 이도 그보다는 못하지만 약간의 이익이 남았으나 한 달란트 토지를 받은 소작농은 농사를 지어봤자 지대와 세금을 내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상황이었을 것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대부분의 규모가 작은 소작농들을 빚을 떠안고 자기 토지를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지주들에게 혹은 더 큰 소작농에게 자기의 땅을 빼앗기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결국엔 한 달란트 받은 소작농은 자신의 한 달란트마저 열 달란트 가진 이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이는 작은 토지를 가진 남반구 소작농들이 지금까지도 겪고 있는 고통의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왜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그리도 혹독하단 말인가? 본인은 달란트 비유를 부재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해보면 그 진의가 명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갈 때 각각 그 재능대로 나누어 주었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능력대로 나누어 주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능력은 비단 긍정적인 개인의 능력을 의미뿐만 아니라 권모술수와 정치적 기반 등도 배려되었을 것이다. 이는 능력을 우선시하고 성과주의를 중시하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비유 속의 주인, 즉 지주는 어찌하여 한 달란트 받은 이에게만 이렇게 가혹하다는 말인가? 한 달란트 받은 이의 말(마 25:24)에 그 단서가 포착된다. 그는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농사를 짓지 않고 세금을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재산을 모으는 자, 그는 악덕 부재지주임이 틀림없다.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이 말은 항변으로 들린다. 저항이자 약자의 무기이다. 이 본문은 적나라한 현실에 대한 고발임이 분명하다.(1) 왜냐하면, 뒤에 이어지는 최후 심판 때 양과 염소의 구분이고 다시 이어지는 본문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후히 대하는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한 예수의 말은 달란트 이야기의 예수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누가 지극히 작은 자인가? 바로 한 달란트를 받아 남기지 못한 소작농이야말로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는 예수의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고발이 있고 난 뒤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의 비유를 통해 한 달란트 받은 자들, 가난한 소작농들과 함께 연대하고 도와주는 자들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진짜 네 것이냐

누가복음 12장 16-21절, 부유한 농부 비유에서는 자신의 밭의 소출이 풍성한 부자의 이야기이다. 이 부자의 걱정은 농사가 풍년이라 소출이 많아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어서 걱정하는 부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부자는 결심한다. 자신의 작은 곳간을 허물고 더 크게 지어서 자신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둘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스스로 말하기를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고 들뜨고 기뻐서 풍족한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는 농부인가? 당시 농민들의 현실이 소작농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할 정도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는 일반적인 소농이 아니다. 앞선 비유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몇 년 동안 먹고 쓸 수 있는 재물을 창고에 쌓아 둘 수 있는 이가 당시 농민의 모습일 것이라고 절대로 상상할 수 없다. 이는 소작농이 아니라 지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2) 또한, 밭의 소출도 경작으로 인한 소출이 아니라 지대와 소작료일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는 절대로 농부가 아니다.

이 부자가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절정에 하나님께서 등장하신다. 먼저 어리석은 자라고 그를 지칭하고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게 되면 네가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며 그를 질책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첫 번째 하나님께서 그의 정체성을 어리석은 자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것이 누구의 소유이냐고 묻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시쳇말로 하자면 ‘으이그 이 나쁜 놈아’ 쯤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며 창고에 그득히 쌓아 놓고 이제는 좀 평안히 쉬자고 하는 농부의 기쁨에 이렇게 비정한 말씀을 하시는가? 하고 의문을 표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짓고 경작한 소출을 창고에 쌓은 농민이 아니다.

당시 농민들은 대부분이 소작농이었고 몇 년은커녕 당장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에도 힘든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지주임이 확실하고 굶주리고 가난한 소작농들의 노동 착취와 과도한 소작료와 지대를 통해 이룬 부에 대한 경고였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두 번째 질문인 ‘이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말은 ‘이것이 본래 누구의 것이었느냐?’ 하고 직접적으로 부자에게 묻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지주인 주인이 죽으면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는 소작농들과 종들이 그 곡물 창고를 급습하여 곡식과 재물을 탈취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가능성이 바로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는 질문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작농에게 좋은 일 해라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6장 1-9절, 부정직한 청지기 비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비유에는 부자와 청지기가 등장하고 부자는 자신의 소유를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에 부자는 청지기를 불러 그동안 하던 일을 정리한 이후 직무를 정지시킬 것이라고 통보한다. 이에 자신의 청지기 직분의 상실이 기정사실화됨으로써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진 빚의 일부분을 탕감해 주고 증서를 다시 쓴다.

그런데 주인은 이 청지기의 옳지 않은 행동에 대해서 지혜롭다 칭찬을 하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까지 한다. 헤어조그는 이 부정직한 청지기 비유는 예수의 비유 중 가장 수수께끼 같은 비유라고 말한다. 또한 제임스 스콧의 ‘약자들의 무기’에서처럼 약자인 청지기는 절박한 생존을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한다.(3)

우리가 이 비유에서 흔히 놓치기 쉬운 실수는 초점을 청지기에 맞추는 동안 5절 이하에 등장하는 빚진 자들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에 있다. 이 빚진 자들이 누구이고 왜 빚을 지게 되었는가가 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될 것이다. 그래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삼으라는 예수의 말이 정확하게 들릴 수 있다.

헤어조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채무자가 주인의 땅을 경작하고 그의 과수원을 관리하며 수확의 일정 부분을 소작료로 지불하는 소작농민으로 보고 있다.(4) 그들이 빚을 질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앞서서 많이 말해왔다. 우리는 복음서의 예수의 비유를 접할 때 대부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전제한 경제윤리를 전제하고 주인 혹은 지주와 종, 혹은 소작농과 청지기의 갈등 관계 속에 늘 주인의 입장에 서서 본문을 읽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복음서 중 예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주인은 대부분 왕 혹은 예수 자신인 경우가 많고 또한 알레고리적 해석에 의한 동일시로 인해서 주인은 언제나 선한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기르타라자는 탈식민주의 성서 비평의 입장에서 이 본문을 주석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부와 가난을 생산하는 착취적 시스템이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5) 수기르타라자에게 있어서는 성서는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의 경제적인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였을 것이다.

반면에 예레미아스(Jeremias)는 부채가 많은 것으로 보아 채무자들은 도매상이었을 것으로 가정한다. 채무자가 소작인이 아니라 도매상이었다면 사회적 배경은 농촌이 아니라 주인의 토지 주변 혹은 도시의 시장이었을 것이라고 본다.(6) 아무튼, 전자이든 후자이든 구조적인 경제적 모순은 변하지 않으며, 부자는 대토지의 소유자임이 확실하고, 그의 부의 원천은 토지를 통한 소작료와 지대 혹은 이를 통한 시장에서의 장사를 통해 형성되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앞선 비유에서처럼 창고에 가득 곡식들과 재화들을 쌓아두었던 자들이 바로 이 부자이다. 성서는 철저하게 이 부자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당시 주인과 청지기 관계, 그리고 청지기와 소작인의 관계는 일정 정도의 거짓말과 눈속임이 있었을 것이다. 청지기가 주인에게 자신의 부정이 발각된 것도 주인의 반응을 보면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닌 것처럼 몇 번 경험해본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청지기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으므로 묘안을 짜낸다. 소작농들의 빚을 감해줌으로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한다. 이 사실을 파악한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지혜롭다 칭찬한 것이다. 이것이 이 비유를 수수께끼로 만든 대목이다. 자신의 재산에 피해를 준 청지기를 칭찬하고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더렛(Derret)은 이를 고리대금의 과도한 이자와 소작농들의 부채의 관점으로 재구성했다. 청지기가 해고되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계약 안에 숨겨진 높은 이자를 취소하여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7) 이러한 해석은 꽤나 개연성이 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필자의 해석에 따르면 청지기의 경제적 관계는 주인과 소작농들 간의 이중적인 관계에 의해서 형성되고 유지되어왔다. 첫 번째 주인과 청지기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즉 상명하복의 절대적인 복종의 관계였으며 자신의 생명과 생존은 권력자의 힘에 붙어있을 때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둘 간의 계약과 이행 중에는 주인을 속이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임금 외 뒷돈을 과외로 챙겼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로는 청지기와 소작농들 간의 관계인데 청지기는 소작농들에게도 소작료와 지대를 더 높이 속여 이중장부를 기록하고 주인에게는 정상 소작료와 지대보다 낮게 상납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청지기는 어떻게든 금전적으로 더 빼먹을 수 있는 상황을 극대화해야만 했을 것이다. 주인은 농촌을 떠나있는 부재지주이고, 이곳을 총 관리하는 사람은 청지기 자신이기에 돈을 빼먹기 허술한 구조였을 것이다. 그러한 이중적인 비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 드디어 주인의 귀에까지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고 청지기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 결단은 소작농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주인으로 대별되는 정치권력적인 억압과 착취적인 사회, 부정직한 경제적인 부의 형성과 결별하고 소작농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주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불의한 재물로 소작농들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에 입회하여 농민 공동체의 보호와 도덕적 경제에 자신을 맡기기로 결단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개인주의적인 성공주의, 더 나아가 식민주의의 착취적인 경제적인 모순의 구조와의 연결고리를 끊고 소농들의 공동체적 삶으로의 전향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비유 속에서 은닉되어 있는 부재지주와 소작농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청중과 ‘오클로스’는 바로 소작농들의 공동체, 제국주의 국가체제와 전쟁의 패배로 삶을 유린당하고 토지를 빼앗긴 농민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안병무도 ‘오클로스’의 대부분이 토지로 유리된 가난한 소작농들이 대부분이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8)

미주

(1) 박종국. “달란트 비유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내부 갈등과 비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석사 논문. (2010), 32.
(2) 『개역개정판』, 독일성서공회 해설, (서울: 대한성서공회, 2005). 115. 해당 본문 해설.
(3) 윌리엄 R. 헤어조그 2세/ 백운철 옮김. 『약한 자의 무기: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루가 16:1-9)』 (서울: 가톨릭대학출판사, 2002), 167.
(4) Ibid., 185.
(5) R. S. 수기르타라자/ 양권석, 이해청 옮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 (서울: 분도출판사, 2019), 212.
(6) 윌리엄 R. 헤어조그 2세. 『약한 자의 무기: 부정직한 청지기의 비유(루가 16:1-9)』, 189.
(7) Ibid., 186.
(8) 안병무, 『갈릴래아 예수』, 170.

안재학 목사(석천교회, 연세대 박사과정) jagafoc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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