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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 지주 그리고 부재지주

기사승인 2023.06.01  00: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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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 메시아론에서 농민의 위치 (2)

▲ Jan Luyken illustrating Matthew 21:33-39 ⓒWikimediaCommons

예수의 비유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왔다. 구체적인 상황이란 투쟁, 방어, 변호, 공격 및 도전의 상황이었다고 황성규 교수는 말한다.(1) 또한, 철저하게 농본주의적인 관점에서 쓰여 졌고, 탈식민주의적인 관점도 깊이 관여하며 비유 속에 속내를 감추려는 의도 또한 엿볼 수 있다. 이는 예수의 비유 전체가 의도한 특정 청중을 제외한 이들에게는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보여진다.

엘렌 데이비스는 구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토지와 전통문화, 농민을 관통하는 성서의 ‘농본주의’에 대해서 주장한다.(2) 그의 주장 또한 구약을 관통하고 있는 감추어진 성서의 농본주의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현대과학의 시대를 농경사회로 되돌리자는 것이 결코 아니듯이 탈식민주의 성서해석이 단순히 식민주의 시대의 이전, 즉 토착주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닌 것(3)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탈식민주의 성서해석의 방법 역시 성서가 쓰여 졌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영향이 성서 속에 어떻게 반영되었고 숨어있는지를 깊이 관찰하고 그것을 벗겨내어 원래의 뜻을 복원해내는 작업일 것이다. 수기르타라자(R. S. Sugirtharajah)는 탈식민주의 성서해석은 텍스트를 도덕적, 영적 저장고가 아니라 해석자들이 풀어야 하는 하나의 암호 체계로, 다시 말해 숨겨진 권력 관계와 이데올로기들을 드러내기 위해 이 암호 체계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4)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농민 신학적인 관점에서 예수의 비유 중 1) 마태복음 20장 1-16절, 포도원 일꾼의 비유, 2) 마태복음  21장 33-42절,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그리고 3) 마태복음 25장 14-30절, 달란트 비유, 4) 누가복음 12장 16-21절, 부유한 농부 비유, 5) 누가복음 16장 1-9절, 부정직한 청지기 비유를 당시의 부재지주와 소작농의 부당한 경제적 관계를 바탕으로 민중신학적인 관점에서 탈식민주의 성서해석의 방법을 통해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이번 글에서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다루고자 한다.

예수 시대 농경사회, 평화로운 풍경이 아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학적 유형이 아니라 발전된 농경사회의 계급이나 그룹 안에서 그 정체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들이라고 헤어조그(Wiliam R. Herzog Ⅱ)는 보고 있다.(5) 그리고 마태 공동체 당시의 시대적 배경, 즉 지주와 농업 노동자들의 관계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내부적인 충돌과 대립, 그리고 갈등을 살펴봄으로써 기존의 성서적 해석과는 다른 성서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은 마치 ⋯ 집 주인과 같으니”(개역 개정)라는 1절은 청중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지주들과 농업 노동자들, 즉 소작인들 간의 관계는 그리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국이 악랄하고 착취적인 지주들 같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놀랐을 것이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이 집주인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수의 비유 중 대부분이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알레고리적 비유 방법으로 그 둘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당시의 포도원 일꾼들과 주인 사이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 않았다. 이미 당시의 사회는 제국의 식민지 시대를 통과하고 있던 시대로서 부와 권력, 그리고 토지의 소유권이 집중되어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빼앗기고 지주의 땅을 경작하며 근근이 생존을 이어갔다. 또한, 도시에 거주하며 토지를 청지기에게 관리를 맡기고 호의호식하던 부재지주들과 소작인들의 갈등 또한 다음에서 언급할 두 번째 비유, 마태복음 21장 33-46절, 소작인의 비유에서 읽어낼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악랄했던 집주인이 하루아침에 선한 주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일꾼들의 반응은 의아하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부터 일한 일꾼은 화가 났다. 왜냐하면, 아침부터 일한 자신과 오후 늦게 온 일꾼이 동일한 일당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아침부터 일한 일꾼에게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1 데나리온을 주었다면 순차적으로 늦게 온 일꾼들에게는 늦은 시간만큼의 금액을 차감하고 지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예수의 비유에서 주인은 마지막에 온 자에게 동일한 일당을 줌으로써 큰 기쁨을 맛보게 한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그의 책,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Unto this last)에서 이것을 노동권보다 생존권이 우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농민 기본소득 개념의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다. 조금 더 부연 설명하자면 러스킨은 부에 대한 확고한 정의를 내린다. 즉, 부의 획득은 도덕적 조건 아래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하면서 전통 경제학을 반대한다.(6)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애정이 깃든 경제였다. 다시 말해 경제학이란 정의와 애정이 생산과 소비, 고용주와 고용인 등의 관계에서 정의의 균형을 맞추며 그러한 정의 가운데 상호 간의 애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경제, 즉 집의 경제라는 것이다. 제임스 스콧(James C. Scott)은 이것을 ‘호혜성과 생계에 대한 권리’적 측면에서 농민 경제(7)라고 말한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예수가 ‘천국이 포도원의 주인과 같다’라는 선포 자체가 혁명적인 발언이며 지금의 경제체제와 사회질서에 반하는 새로운 주님의 도래를 예고하는 듯이 보인다. 지금 우리는 소작농들을 착취하는 옛 포도원 주인이 아니라 ⋯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동일한 임금을 나눠주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질서의 맨 앞에 선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누가 부재지주를 ‘선하다’ 하는가

마태복음 21장 33-42절에 나타나는 ‘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는 당시의 부재지주와의 소작농의 갈등에 대한 본문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당시의 농촌의 현실과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악랄한 부재지주들이 세금과 지대 등을 터무니없이 많이 뜯어가서 소작농들의 원성은 높았을 것이다. 우리의 동학 혁명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포도원 비유’에서 부재지주와 소작농들의 갈등을 읽어 낼 수 있다. 제임스 스콧 역시 서구 봉건 사회에서 식민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부재지주와 소작농들의 갈등과 소작농들의 반란과 농민 사회 구조에 대해서 상세히 보고한 바 있다.(8) 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정확히 그러한 갈등과 부재지주 살해 장면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제임스 스콧이 말하는 농민들의 ‘은닉 대본’ 측면에서 보자면 비유 속에 숨겨진 당시의 지주와 소작농 간의 갈등과 작은 반란들을 읽어낼 수는 있지만 성서는 포도원 주인의 편에서 이 비유를 완성시키고 있다고 하는 큰 충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농민들을 착취하고 억압적이었던 부재지주에 반대하며 저항했던 소작농들이 취한 행동은 지주의 아들을 살해하는 극단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성서의 비유는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서 ‘제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라’(마 21:41) 고 말을 하고 ‘너희는 빼앗기고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43)고 말한다.

질문은 이것이다. 이 포도원의 비유에서는 왜 불의한 경제 구조 속에서 부재지주의 지나친 지대 요구와 세금으로 인한 소작농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경제적 부정의에는 함구하며 주인의 것을 가로채려는 소작농들의 욕심만을 부각시켜서 포도원 지주가 심판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냐는 것이다. 왜 주인이 돌아와 소작농들의 잘못만을 따져 권선징악 적인 비유의 말씀처럼 끝을 맺었을까?

이는 예수가 젤롯당과 결탁한 농민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지만 마가 공동체 내에서 발생하는 젤롯당원들의 살인과 폭력에 대한 마가 공동체 내에서의 엄중한 경고의 뜻도 포함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9) 여기에서 우리는 안병무의 ‘사건 전승의 모체’(10) 개념을 상기하여 케리그마에 역사적 사건을 캐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은폐되고 추상화되고 비역사화 되어있는 공적인 발표의 성격, 제임스 스콧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공개대본인 셈이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성서가 당시에 흔히 발생했고 누구나 이해할 법한 부재지주와 소작농들의 갈등과 사건들을 비유를 통해 빌려와서 간접적으로 시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알레고리적 성서 해석은 수기르타라자에게는 예수가 영락없는 백인 식민주의자 대지주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내러티브를 통해서 당시 사회상들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있으나 비유가 비유로써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이중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어쩌면 공동체 내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발생하는 부재지주들과 소작농들의 갈등과 다툼, 심지어는 살인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정치적, 종교적 부정적 판단이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서의 본문은 포도원 주인이 돌아와서 소작농들의 포도원을 빼앗아 제때에 세금을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새로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원수의 관계였다. 이는 사회적 법에 대한 복종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주

(1) 안병무 박사 고희 기념 논문집, 『예수 민중 민족』(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 33.
(2) 엘렌 데이비스/ 정희원, 정희영 옮김. 『성서, 문화, 농업』. (대구: 도서출판 코헨, 2012), 30-40.
(3) R. S. 수기르타라자/ 양권석, 이해청 옮김. 『탈식민주의 성서비평』(서울: 분도출판사, 2019), 9.
(4) Ibid., 233.
(5) 윌리엄 R. 헤어조그 2세/ 백운철 옮김. 『포도원 노동자들의 비유(마태 20,1-16)』(서울: 가톨릭대학출판사, 2001), 183.
(6) 존 러스킨/ 김석희 옮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파주: 열린책들, 2010), 90.
(7) 제임스 스콧/ 김춘동 옮김. 『농민의 도덕 경제』(서울: 아카넷, 2004), 47.
(8) Ibid., 261-274.
(9) 김정태. “소작인의 비유와 마가 공동체”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신약학 석사 논문(2002). 58. 이하 참고.
(10)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1), 257.

안재학 목사(석천교회, 연세대 박사 과정) jagafoc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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