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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민주주의의 출발점

기사승인 2022.08.26  20: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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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정치와 짱개주의 ⑴

▲ 『짱개주의의 탄생』(김희교 지음, 보리, 2022)
정승훈은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미네소타 루터신학대학 부교수를 역임 후 시카코 루터 신학대학원 석학교수로 임명되었다. Historians’ Debate-Public Theology 사이트 저널 편집장으로 서구 사회에서 미디아의 담론과 정치전략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글을 쓰고있다.

서구 민주주의도 미완일 뿐이다?

“짱개주의 탄생”이란 책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정치체제와 인권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흥미롭다. 만연해지고 있는 중국혐오를 제거하기 위해 쓰인 것 같다. 확인된 사실에만 근거해서 중국을 편견 없이 보자는 것이 저자의 변이다.

나는 10여년 동안 중국 절강대학(Zhejiang University)과 교류하면서 여러 강연과 연구에 참가한 적이 있다. 중국의 거대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와 인종구성을 감안할 때, 사실 위주로만 중국을 확인하기라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을 사회과학적으로 검토하는 것까지 간과할 필요는 없다.

짱개주의 탄생에서 주목을 끄는 대목은 서구 대의제가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룩하지 못했다는 평가에 있다. 수긍이 간다. 그런데 무엇이 완전한 민주주의인가? 권위정부를 지지하는 싱가포르나 중국에 비해 서구의 대의제는 훨씬 뒤떨어져있는가? 중국의 일당제가 비민주주의적이라 판단하는 것은 유럽중심주의 판단에 불과한가? 과연 그런가? 서구의 대의제가 중국의 공산당 권위체제보다 뒤떨어졌다는 견해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기에 느닷없이 등장하는 유럽중심주의는 또 무엇인가?

의회민주주의에 기반한 시민사회나 인권은 미제국주의나 신식민주의 산물로 섣불리 취급될 수 없다. 역사의 빈곤에 기초한 반지성주의나 선동 담론은 부메랑을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역사의 운명이다. 

의회민주주의나 시민사회는 서구의 역사에서도 아직 미완의 과제에 속한다. 자코뱅주의를 계승했다는 레닌, 혹은 모택동주의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중국의 공산당 지배체제를 들먹이기보다는 손문의 민주주의의 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이 안타깝다. 유럽 전역으로 펼쳐진 1848년 혁명에 대한 엄정한 분석과 사회과학적 연구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에 접근하려는 태도는 학문적 담론의 영역에서는 블랙 코메디로 끝난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미군정부터 군사독재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자유와 인권을 쟁취하려는 투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여기에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종교가 사회를 구성하는 데 나름의 기여를 한 민주주의 전통이 대한민국의 저변에 흐른다. 그러나 중국에서 시민사회와 자유와 인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이다. 중국은 이런 전통과는 너무도 멀리 서 있다.

마르크스의 비판적 민주주의가 중국의 공산당 독재 지배를 검토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중국 공산당에 마르크스란 유명무실할 뿐,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구 민주주의의 비판적 성격과 후기 시민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한국의 미래를 위해 더 소중하지, 짱개주의란 말장난이나 왕서방 모방주의로 회자 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집단적 방법론은 독재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주주의는 영국의 자유방임과는 달리 프랑스에서, 개인보다 사회가 우선하는 전통에서 시작했다. 이것을 사회학에선 방법론적 집단원리로 말한다. 개인의 의지는 모여지는 것이 아니라, 생활세계처럼 일반의지가 헌법과 일반선거를 통해 시민의 승인에 의한 주권으로 나타난다. 개인은 법에 순종하지만 결국 자신의 의지에 복종한다. 만인이 다스리는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회는 루소의 말처럼 천사의 세계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쉽게 타락했고 정치 엘리트들의 민중 선동주의로 갔다. 그러나 로마의 공화정에서 민주주의는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다른 지배방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 지속되었다. 물론 케사르주의(Caesarism)가 나타나기도 한다.

전제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삼권이 분리되고, 사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공공선이 추구되어야 한다. 프랑스의 헌법과 삼권분립은 몽테스키외(1689-1755)의 영향으로부터 온다. 그의 삼권분립과 권력균형은 프랑스의 삼부제(종교인, 귀족, 백성)를 거절하는데서 시작한다.

▲ 몽테스키외의 초상과 그의 저서 『법의 정신』 초판 첫 페이지 ⓒWikipedia

몽테스키외에 의하면, 민주주의 원리는 사익보다는 공익을 선호하고, 법과 국가와 평등을 사랑하는 정치적인 덕의 원리다. 이것이 민주 정부와 시민사회를 움직인다. 이러한 원리를 위해 시민들의 일반교육이 요구된다. 그러나 여전히 불평등이나 전제주의로 흐를 수가 있다.

왜 이토록 전제주의를 봉쇄하는가? 전제주의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민중의 허리를 부셔버렸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다양한 정치체제를 유형화하고, 리버럴 입헌 군주제에 가까워도, 공화제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기여는 루소의 정치철학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는 루소의 일반의지와 몽테스키외의 공화제의 정치적 덕을 이은 사람이기도 했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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