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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기사승인 2022.07.23  15:3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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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의 계보학과 탈식민지 정치 ⑴

▲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두 당사자인 윌리엄 태프드(왼쪽)와 가쓰다 다로
정승훈 교수는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미네소타 루터신학대학원 부교수를 거쳐 시카고 루터교신학대학원 석학교수로 있다. Historians’ Debate–Public Theology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기억은 정체성에 녹아 있다

어릴 적 기억에 제주의 4월은 유채꽃으로 눈부셨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에 사는 이종사촌 댁이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4.3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격적으로 파고 들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별다른 자료도 없었다.

4.3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 UC버클리에서 역사사회학과 탈식민주의(Post-Colonialism)를 공부하던 당시였다. 이후 한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콩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일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나는 그렇게 4.3과 재회했다.

국내에는 4.3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들이 이미 여럿 있다. 노무현 정부시절 공식 사과와 함께 제주 4.3평화공원이 세워진 것을 보면서 안도했다. 최근 하버드대학 교수클럽에서 몇 분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관계자들이 모여 추념식을 가진 것도 보기에 좋다. 제주 4.3이 갖는 국제 정치적인 차원과 시민운동의 의미가 미 대학에서 잘 진행되기를 바란다. 기억은 한 개인의 삶의 정체성에 깊이 들어와 있고 그것은 계보학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백인 남성은 왜 부담스러워하나?

제주 4.3 시민운동을 역사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려면 필리핀-미국전쟁(1899-1902)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이 있다. 이 밀약은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일본에 조선을 양보한 것이다. 미국이 필리핀과 전쟁하던 당시 노벨 문학상(1907)을 받은 영국 시인 루디아드 키플링(J. Rudyard Kipling)은 ‘백인 남성의 부담’(White Man’s Burden)이라는 시(詩)를 런던 타임즈에 기고했다. 그의 시는 백인이 유색인종을 지배하는 것을 미개인을 개화시키기 위한 서구 기독교인의 의무로 포장한다. 이 시는 미국에 소개되면서 미국으로 하여금 필리핀 전쟁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1899년 전쟁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은 장차 태평양 전쟁에서 그리고 일본 패망 이후 대한민국의 미군정 시대로 이어진다. 제주 4.3의 비극이 여기서부터 배태된다. 흥미롭게도 미군정 시절 존 하지(John Reed Hodge)의 기밀보고문서는 1945년 조선이 미군에 대한 적대 감정이 가쓰라-태프트 밀약로부터 기인한다고 말한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5년간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을 때 조선 백성들의 저항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더욱이 신탁통치 안은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belt)가 필리핀 식민지 모델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배와 조선의 미군정에 대한 비교 사회학적 연구가 열린다.

레닌과 민족 자결권

사실 민족 자결주의는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의 전유물이 아니다. 민족 자결주의는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세계 평화유지, 경제원조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승전국을 위한 것이었다. 오히려 몽양 여운형이나 김규식 등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몽양은 손문과 연대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필리핀 식민지배와 한국에서 미군정을 통해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비록 5년 신탁통치로 줄어들었지만 스탈린이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놀라운 일이다.

레닌의 “민족 자결권”(1913)은 단순히 경제운동이나 노동자 계급투쟁 일변도가 아니라, 일제로부터 식민지 해방 민족에게 자결권을 허락하고 이들과 연대한다. 이것은 일찍이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사이에 벌어진 폴란드 독립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마르크스의 폴란드 독립지지와 영국 노동귀족 비판 및 아일랜드 연대에서도 잘 드러난다.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1913)는 물론 억압받는 식민지배 민족의 독립과 연대 정치의 틀에 서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고립주의에 주목하고 이러한 차이가 신탁통치의 신중한 패권 전략으로 수용된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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