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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의 원류와 소련의 분단통치 정책

기사승인 2022.07.30  16: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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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의 계보학과 탈식민지 정치 ⑵

▲ 1936년 흐루시초프(왼쪽)와 스탈린(오른쪽) ⓒGetty Image

47년 3.1운동은 세계사적인 시민운동

1947년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대회에서 경찰의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결국 3.10 총파업으로 걷잡지 못할 상황으로 전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3.1절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고무가 된 독립운동인데, 미군정의 관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더욱이 1947년 3.1절은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좌우합작이라는 연대 정치에서 시도된 것이다.

서울에서 민전이 1946년 2월에 설립되었다면 제주도의 경우 1년 후 47년 2월에 창립이 되었다. 여기서 창립축하 인사를 한 박경훈 도지사의 등장이 매우 이채롭다. 박경훈 선생은 경성제대 법대를 졸업한 수재였고 제주 갑부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그는 몽양을 추종하는 지사였고 당시 남로당 위원장인 안세훈 선생과 독립과 통일을 위해 행보를 같이했다.

이런 연대 정치가 제주 4.3의 원류로 등장한다. 흔히들 말하는 남로당의 민중 선동을 원류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대목이다. 제주 4.3을 민중봉기로 주장하는 사람들은 남로당의 역할에 무게를 둔다. 제주도에 제대로 조직화된 남로당이 있었을까?

박헌영이 1945년 8월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을 창립하지만, 그는 이후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곤혹을 치렀고 신전술을 통해 부산 철도파업과 대구 폭동을 주도하다 이북으로 도피한다. 이북에서 활동하는 박헌영이 같은 해 11월에 조선 공산당과 남조선 신민당 그리고 조선인민당의 연합으로 남로당 창당에 관여한다고 해도, 제주도에서 남로당의 적극적인 활동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제주에는 철도나 공장 노동자가 없고 주로 농민과 어업으로 생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지역 정서는 평등했고 공동체주의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제주의 평등한 분위기와 공동체주의에서 주도권은 인민위원회에게 있었고 전폭적인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심지어 제주도는 47년 부산 철도파업이나 대구폭동에 가담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테렌티 시티코프(Terenty Shtykov) 일기를 통해 소련이 오백만 루블을 부산 파업과 대구 항쟁에 지지했다는 주장도 당대 스탈린의 신중한 팽창주의 전략에 비추어 보면 의구심을 낳게 한다.

오히려 스탈린에게 보낸 시티코프의 기밀보고(1946)에서 그가 신탁통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잘 드러난다. 한국의 통일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이후 도움이나 자구책으로 신탁을 이해한다. 이남의 남로당에 경제적 지원을 했다는 주장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사실 제주 4.3은 단순히 미군정 시절 학살과 비극의 사건을 넘어선다. 국제 냉전 질서와 이데올로기 호출 전략에 저항하고 통일임시정부를 위해 연대한 47년의 3.1절 운동 기념대회는 이념형으로 자리 잡는다. 이들에게 신탁은 좌우가 연합해서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이후 미국이나 소련 등으로부터 도움이나 후견을 받는 정도로 이해했으므로, 좌우 대립으로 전쟁을 치렀던 육지와는 전혀 달랐다.

제주KBS에서 70주년 특집으로 다룬 4.3 다큐멘터리에서 고봉식 전 교육감의 증언을 봤다. 당시 96세의 고령인데도 여전히 정정했다. 당시 북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3.10 총파업 때는 교사 전원이 사표를 냈다고 한다. 이 일로 해직을 당하고 재판도 받았다. ‘빨갱이’는 고사하고 거의 모두가 다 선량한 시민들, 독립과 통일을 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빨갱이라고 하면 ‘붉은 악마’를 떠올리니 별다른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 시절 빨갱이는 무서운 말이었고, 연좌제로 인해 고초를 당하는 이웃집 이종사촌을 보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미국은 태생적으로 소련과는 어려운 나라였다. 러시아 혁명 당시 9천 명의 군대를 시베리아에 파견해서 백군파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으로 만났을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러시아를 “기사도 정신으로 충만한 붉은 군대”로 부를 정도로 사이가 괜찮았다. 존 하지 장군이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을 때 워싱턴의 수뇌부는 소련과 합력하라고 하달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 관리들은 하지 장군이 도착하기 전 이미 반공주의로 물꼬를 틀었다. 일본에 있는 미 관리들에게 공산주의 위험을 경고하고 한국은 머지않아 공산화될 것이라며 과장했다. 하지가 몽양의 조선인민공화국을 12월에 해산시킨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일제는 패망하면서까지도 한반도에 분단의 씨앗을 뿌려 놓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의 해방정국을 연구한 미 역사가들은 하지 장군이 이승만을 싫어했고, 사실은 몽양 여운형을 흠모해서 초대 대통령으로 내세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란 것이 하지 장군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냉전 구도 가운데서 대통령 트루먼이 버티고 있는 이상 불가능했다. 트루먼은 한반도를 전략적인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마샬 원조를 계획했지만 48년도에 공산화가 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유럽에서 소련과 한판승을 준비한다. 이러한 유럽에서 공방은 나토창설과 함께 트루먼은 대한민국에서 빠르게 빠져가는 출구전략 (exit strategy)을 쓸 수밖에 없었다.

1947년 유엔 임시 위원회가 구성되어 한반도 전체 선거를 하려고 했지만, 소련의 전략적인 이해와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나 <Korea Times>(2012, 1월 8일자)에 기고한 미국의 동아시아정책 전문가인 앤드류 살몬(Andrew Salmon)의 글을 보면, 하지나 맥아더는 유엔의 신탁통치에 수긍하지 않았다. 하지는 조선을 통째로 자신의 것으로 먹으려는 이승만을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이승만은 오히려 하지를 빨갱이로 몰았다고 했다.

물론 46년에 처음부터 미소공위회에 훼방을 놓고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극우파 이승만의 전략에 하지가 분노를 한 것은 그의 비밀문서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하지의 실패는 애드가 스노우(Edgar Snow)가 말했듯이 몽양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하고 인민위원회를 해체시킨 그의 무능함에 있다. 하지는 한국의 역사도 문화도 더욱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가열찬 민족운동이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이것은 그 스스로도 인정한다.

포스트 수정주의 접근

분단통치는 이미 모스크바 삼상회의(1945)에서부터 일관된 것이다. 스탈린 당시 기밀문서가 1990년대부터 해제되면서 미국의 국제 정치학자들은 정통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후기 수정주의 입장으로 나뉜다. 정통주의는 한국전쟁에서 스탈린의 주도권과 패권 전략을 중요하게 본다. UC버클리의 로버트 스칼라피노(Robert Scalapino)나 이정식 교수의 경우이다.

그러나 후르시초프는 회고록에서 스탈린의 한국전쟁 개입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스탈린의 모든 범죄를 용서할 수는 없지만, 전쟁에 대한 전략에는 동조한다고 썼다. 이후 수정주의 학자들은 후르시초프 회고록을 근거로 미국의 패권주의와 남북한의 갈등 요소를 부각시키는 연구를 발전시켰다. 대표적으로 한국에 잘 알려진 시카코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해제된 소련의 기밀문서가 분석되고 후르시초프의 회고록에 종전과 다른 내용이 발견되면서 그 신뢰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 후기 수정주의자들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국내의 갈등 그리고 미 패권과의 대결이라는 국제 정치질서의 차원에서 한국전쟁을 분석하면서, 소련이 취한 신중한 패권주의에 주목한다. 대표적으로 미국과 더불어 전략적 이해를 추구한 신탁통치 안을 말한다. 필자처럼 역사 사회학자로서 한국전쟁이나 제주 4.3의 계보학을 보는 학자들은 후기 수정주의 입장을 취하고, 필리핀 전쟁과의 비교 관점에서 탈식민주의 인식론을 발전시킨다.

여기서 필요로 하는 것은 ‘제주 4.3 시민운동’에 대한 두터운 기술(thick description)이고, ‘제주 4.3사건’을 ‘빨갱이’로 양산한 문화 담론과 물질적 이해 그리고 권력관계 사이에 드러나는 선택적 친화력에 사회학적으로 주목한다. 이러한 두터운 기술을 통해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질서 안에 제주 4.3 시민운동을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스탈린은 유럽에선 완강했지만 한반도 문제는 힘의 균형의 차원에서 접근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여서 미국과 대결하면서 새로운 긴장이나 전쟁으로 갈 이유가 없었다. 오죽하면 남로당의 지도부가 스탈린에게 서한을 보내 남한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미국에 압력을 넣어 달라고 했지만, 그는 냉담했다. 소련은 승전국으로서 러일전쟁 이전에 가지고 있던 영토를 요구했고, 확실하게 북한에 소비에트 스타일의 정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기밀문서 또는 시티코프가 보고한 내용들을 분석해보면 그의 일기에서 이남의 사회주의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것이 어딘가 맞지 않아 보인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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