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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을 위하여 일어서는 북간도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

기사승인 2022.02.05  16: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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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한 거사 「철혈광복단」의 15만원 탈취사건 ⑵

▲ 김좌진(왼쪽 위)과 홍범도(왼쪽 아래).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북로군정서(오른쪽)

<3.13 만세 시위> 후 북간도의 조선인들은 비분강개로 몸서리쳤으며 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교회지도자들과 망명 지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 청년들 할 것 없이 독립을 위하여 복수를 위하여 총칼을 들고 일어서는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기에 정신이 없었다. 순전히 학생들로 이루어진 무장단체만 해도 충렬대, 암살대, 자위단, 맹호단을 비롯하여 10개의 단체들이 있었고(1) 각 종교단체들의 지도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의 주도로 설립된 단체만 해도 30여개에 이르렀다.(2) 그 중에 간도국민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훈춘한민회, 의군부등이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간도국민회는 구춘선을 회장으로, 강구우를 부회장으로 하여 간민교육회와 간민회의 전통과 역사를 이어받은 단체이다. 시위 후에 당시 <3.13 만세 시위>를 위해 만들었던 협의체인 독립운동의사부를 해체하고 사상자 피해 대책을 위해 조선독립기성회를 결성한 것이 3월 25일에 간도국민회로 재창립 되었다.(3) 본부는 연길현 하마탕의 교회에 두었으며 중요한 일과 사무는 용정의 치외법권지역에 있는 용정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처리하였다. 국민회는 본부 아래 5개 지방총회와 13개의 지방회와 70여개의 지회로 구성되었다.

이는 캐나다장로교 지교회에 근거한 것으로 간도 북시찰회는 하마탕 중심의 북부총회와 국자가 중심의 중부총회가 되었고, 간도 서시찰회는 명월구 중심의 서부총회로, 간도 동시찰회는 용정무산간도 중심의 남부총회와 남양촌, 종성간도 중심의 동부총회가 되었고 시찰 아래 지역교회들이 묶여져 13개 지방회가 되었으며 72개의 교회는 그대로 국민회 지회가 되었다.(4) 1920년에는 지회가 133개로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관할영역도 전 연변지역으로 크게 확장되었으며 지방총회와 지방회의 회장이 30여명이나 되었다. 이외에도 국민회는 대동단, 충렬대, 철혈광복단, 대한간도청년회를 외곽조직으로 가지고 있었다.

특별히 간도청년회는 1919년 11월 1일 국자가에서 간도 청년들의 정신과 의지를 통일하여 비상한 수단과 위대한 능력을 훈련시켜 독립역량을 집결하려는 목적으로 서성권, 강백규, 김정, 조경환 등 22명에 의해 발기되었고 본부는 와룡동에 있는 창동학교에 두었다. 발기인에는 15만원 탈취사건의 주동자인 임국정과 신한촌에서 체포된 나일도 포함되었다.(강덕상, 『현대사자료』 27권, 8, 9)(5)

국민회는 무장투쟁을 위하여 군무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군무위원회에서는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징병제를 실시하였는데 매 가정에서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 1명씩 모집하여 지방총회에 보내 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 기초 위에 1920년 초에 경호대와 국민회군이 결성되었으며 경호대 총사령은 이용이 국민회군의 사령관은 안무가 맡았다. 경호대는 각 지방총회와 지방회에 분산되어 지역의 안전을 돌보았고 국민회군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훈련시킨 후 군대에 편입시켰다.(6) 그해 6월에 국민회군은 450명의 군인, 보총 40자루, 권총 150자루, 탄약 7,000발, 수류탄 120개 소유한 막강한 무장부대로 발전하였다. 국민회는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에 사관훈련소와 국민회 기지를 건립하기에 힘썼다. 그 결과로 국민회군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독립전쟁의 서두를 승리로 크게 장식하였다.

국민회는 각종 무장부대의 연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봉오동전투 전에 4단 연합을 이루어서 북로독군부를 결성시켰으며 청산리전투에서는 7단 연합의 홍범도연합군을 결성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북로군정서는 대한군정서로도 알려져 있으며 1911년 3월에 대종교 신도들이 덕원리에서 만든 중광단을 모체로 하여 만들었다. 서일은 1911년 초에 경성에서 왕청현 덕원리로 망명하여 대종교를 포교하며 무장독립운동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없었으므로 민족교육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는 <3.13 용정 만세 시위> 후에 중광단을 기초로 하여 공교회(유림) 등 다른 종교인들과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을 설립하였다. 정의단은 5개 분단과 70여개 지단으로 확대되어 대한군정회로 조직되었다가 다시 대한군정부로 개편하고 독립군사정부임을 자처하였다. 그러나 12월에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대한군정부는 이름을 대한군정서로 되돌리었다. 대한군정서는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뉘었으며 총재부는 단체내부의 민정 및 민사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를 전담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사령부의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대한군정서는 1920년 7월에 본부를 덕원리에서 서대파 십리평으로 옮겨 사관연성소를 설립하였으며 30호를 1구로 하고 18세부터 35세까지의 장정 중에서 15~25명을 선발하여 무장부대에 편입시키고 건강한 사람들을 뽑아 사관연성소에 입학시켰다. 1920년 8월 북로군정서는 군인 1,200명,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문을 보유한(7) 북간도의 최대 무장부대가 되었다. 그들은 9월 9일 그들은 사관연성소 1기생의 졸업식과 함께 일제의 토벌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동전선과 서부전선으로 군대가 나뉘어 십리평에서 떠났다. 사령관 김죄진과 교성대장 라중소, 중대장 이범석이 이끈 부대는 서쪽으로 와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승리의 기쁜 소식을 조선인들에게 희망으로 안겨주었다.

대한독립군은 1919년 <3.13 만세 시위> 후에 러시아의 추풍당어재골에서 조직한 무장독립운동단체이다.(8) 홍범도는 사령관, 주건은 부사령관, 참모장은 박경철이었다. 홍범도는 독립전쟁을 위하여 병력 3개 중대 300명을 이끌고 1919년 8월에 백두산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혜산진의 일본수비대를 습격하였으며 9월에 갑산군으로 진공하여 동인면 금정주재소 등 일제 식민지 기관을 공격하였다.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으며 자성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대한독립군의 눈부신 활동은 망국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으며 항일무장단체들에게 격려와 고무가 되었다. 일본 측 자료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항일무장부대의 조선 진공작전은 무려 24차례나 되었고,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3월부터 6월까지 항일무장부대의 조선 진입은 32차례였으며 일제 식민기관과 경찰주재소를 파괴한 곳이 34개소나 달했다.(9)

그러나 신화와 전설에 가까운 영웅적인 전투력을 발휘하던 대한독립군이 무기와 군량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하였다. 홍범도 부대는 러시아에서 조직되었으므로 국민회나 북로군정서처럼 간도에 근거지와 지방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무기와 군량 보급이 어려웠던 것이다. 국민회는 1919년 겨울 대한독립군을 지원하여 병력을 400명, 소총을 200정 권총 약 30정, 탄약을 매 총마다 1,200정, 기관총과 수류탄들을 증강시켜 주었다.(10) 또한 홍범도로 하여금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도록 주선하여 최진동의 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김규면의 신민단을 하나로 묶어 정규 일본군과의 최초의 전투인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하였다. 홍범도는 청산리전투에서도 북로군정서를 제외한 무장독립단체들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사령관으로서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는 전투를 치웠다. 청산리전투는 조선인의 독립에 열망과 기개를 세계에 널리 알려주었다.

훈춘한민회는 1919년 4월 13일 전후에 설립되었는데 훈춘대한국민회 또는 훈춘대한국민의회 또는 대한국민의회 훈춘지회로 알려졌다. 본부는 훈춘현 사도구 소황구 였다. 1920년 훈춘한민회로 개칭하였으며 회장은 이명순이었고 황병길은 교통부장과 경호대장을 맡았다. 훈춘한민회의 전신은 기독교교우회 였으며 캐나다장로교 지회와 교우들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7월 황병길은 급진단을 조직하여 강병일의 의사단, 최경천의 포수단은 연합하여 훈춘한민회 군사부를 정식으로 편성하였다. 한민회군은 군인 250여 명, 소총 300정, 기관총 3문이 있었으며 1920년 1월 15일 경원 고건원전투를 비롯하여 온성군 월파도, 미산, 장덕, 심청동, 하탄동 등지의 일본군의 거점을 습격하였다. 1920년 10월 홍범도의 지휘 하에  7단 연합 (국민회군, 의군부군, 신민단, 대한독립군, 광복단, 의민단)에 참여하여 청산리전투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11)

대한신민단은 1919년 3월 12일 김규면을 단장으로 하여 훈춘현 초모정자에서 기독교 성리교 신도들 위주로 설립되었다. 후기에는 본부를 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으로 옮겼다. 군인은 200여 명으로 훈춘현 리수구와 왕청현 장동에 주둔하며 활동하였고 1920년 초에는 두만강남안 국내에 진출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며 일본군초소를 습격하였다. 5월에는 북로독군부 제4대대에 편입되어 6월 4일, 박승길 등 30여명이 남양군 강양동 일본인 초소를 습격하여 수 명을 사살하여 봉오동전투의 서막을 올렸으며 삼툰자, 후안산,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였다. 10월에는 홍범도의 7단연합에 참여하여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다.(12)

도독부는 1919년 3.13이후 최진동(최명록)이 자신이 거느렸던 자위대를 기초로 하여 왕청현 봉오동에서 조직한 항일무장단체이다. 설립초기에 도독부는 200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조직 기반이 든든하고 보급이 충분하였다. 1920년 5월 4단 연합으로 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부장이 되었으며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20년 8월 독군부의 병력은 일제 자료에 의하면 최진동부하 약 670명, 홍범도부하 약 550명 도합 1,200명으로서 보총 900자루, 권총 200자루, 기관총 2정, 폭탄 약 100개, 망원경 7개, 탄약 총 한 자루에 150발이라고 하였다.(13) 청산리전투 전, 각 무장부대들이 봉오동을 떠나자 최진동의 잔여부대는 동부로 이동하여 라자구를 거쳐 동녕현으로 갔다.

의민단은 1919년 3월 23일,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여 연길현 차조구 천주교교회당에서 천주교 신도들을 위주로 하여 설립되었다. 1920년 8월 300명의 군인, 400자루의 소총, 4만발의 탄약, 50자루의 권총, 480개의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10월에 7단 연합에 가입하여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임창세의 야단, 이범윤의 의군부, 김성극의 대한광복단, 이춘범의 대의전의사회 등이 떨치고 일어나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기지를 건설하며 군인을 모집하였다. 이 같은 무장단체들의 설립과 유지, 항쟁과 전투에는 거액의 군자금이 뒷받침되어야 하였다. 훈련된 군인 양성과 소모품인 총탄, 수류탄 등의 충족한 보급 없이는 독립전쟁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각 무장단체들은 군자금 확보에 최선을 다하였다.

1920년 5월,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북간도 일대 항일무장단체는 대원은 4,241명, 기관총 18정, 보총 1,871자루, 탄약 271, 800여발, 권총 255자루, 수류탄 265개를 갖춘 병력이었다.(14) 이 모든 것들이 위의 방법으로 모금된 군자금으로 세워지고 유지되는 것이나 각 2~3개 부대를 제외하고는 넉넉하지 않았다.

미주

(미주 1) 허청선·강영덕 편저, 『중국조선족민족교육사료집 1』 (연변교육출판사, 2002) 462, 463, 464.
(미주 2) 용정기념사업회 외 『룡정3.13반일운동 80돐 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1999), 239, 240, 241
(미주 3)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192.
(미주 4) 서굉일, 『일제하 북간도 기독교 민족운동사』 (한신대학교출판부, 2008), 184, 185.
(미주 5) 반병률, “간도 15만원 사건에 대한 재해석”, 『1910~1930년대 조선민족 반일무장투쟁사 재조명』, 109, 110.
(미주 6) 양소전·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 2009), 185.
(미주 7) 조영진 외 편저 『항일무장독립투쟁사 1』 (도서출판 일원, 2000), 228.
(미주 8) 반병률, 『홍범도 장군』 (한울아카데미, 2019), 121, 248.
(미주 9) 양소전·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7.
(미주 10) 양소전·차철구 외,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187.
(미주 11) 김택·김인철 외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183.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의군부군, 한민회군, 광복단군, 의민단, 신민단군 등
(미주 12) 김춘선,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연변인민출판사, 2015), 70, 71.
(미주 13).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 연구』, 282.
(미주 14)  김춘선,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98.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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