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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의 하느님, 저 위에만 계시는 무감각한 하느님이 아니다

기사승인 2022.01.07  16: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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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신학이란 무엇인가 ⑶

▲ 해방신학이 말하는 하느님은 민중들의 고통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 무감각한 하느님이 아니다. ⓒGetty Image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의 명제를 바탕으로 하는 편파성으로부터 출발하는 생명의 하느님에 대하서 살펴보았다. 이제 생명의 하느님에서 파생되는 또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해방신학이 보여주고자 하는 하느님을 열정과 분노의 하느님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열정의 하느님(Dios Apasionado)

일반적으로 서구신학은 많은 경우 하느님과 같은 신의 존재양식을 무감각의 영역에 한정시켜 왔다. 그것은 신적인 존재는 한계를 초월하고 있어야 하며 또한 그의 존재양식은 불변성과 연관되어진다. 불변하는 신의 존재는 늘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신은 늘 변함없는 공정성을 담보해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을 신에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 신은 무감각한 존재다.(apathetic God) 무감각의 신의 존재양식은 특히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강화되어왔고 어거스틴을 거쳐 봉건시대에 들어서서 안셀름 등을 통하여 확고하게 정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

이에 반해 해방신학이 경험한 하나님은 무감각의 신(apathetic God)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신(passionate God)이다. 자신의 백성들의 고통과 고난의 삶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지고한 자신의 자리에서 무감각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는 신이 아니었다. 해방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은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오히려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서 열정적으로 민중들과 함께 거주하면서 함께 고통 받고 백성들과 동행하는 신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감정적인 하느님, 열정을 간직하고 또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존재하는 신이었다. 이처럼 열정의 하나님을 전제하면서,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신을 고백한다.

이 같은 열정의 하느님의 모습은 예수의 성육신 사건으로 인해 역사 속에서 구체화 되었다.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하느님의 열정의 결과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울부짖는 백성들의 외침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신음소리에 열정적으로 응답한다. (이집트탈출기 2:23~25) 하느님은 직접 백성들의 삶의 한 복판에 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신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함께 함으로서 자신이 무감각의 신이 아니라 열정의 하느님임을 보여준다.

분개하시는 하느님(Dios Indignado)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는 하느님의 열정은 삶의 현장에서 또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표현된다. 하느님은 <Dios Indignado>이다. 분개하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은 불의로 가득 차 있다. 불의한 권력자들에 의해서 억압받고 탄압받으며 억압당하여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은 무감각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하여 분개한다. 하느님의 분개(憤慨, indignacion)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정당하지 않다(indigno)라고 봄으로서 시작된다.

하느님은 불의한 상황을 인정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는 정의의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서구 신학은 하느님을 정의의 신이라고 규정해왔다. 그러나 그 정의를 열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기에 정의의 신의 자리에만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정의의 하느님을 넘어서는 분개의 하느님(Dios Indignado)을 경험한다. 그는 정의롭지 않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는 분개한다. 그리고 분노를 표현한다.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한다.

이러한 하느님을 발견한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애서 철학적인 정의의 개념을 넘어 사회학적이며 윤리적인 개념의 분개로부터 행위(praxis)로 나아간다. 해방신학은 그것은 윤리적 분노(Indignacion Etica)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분개의 하나님과 만남의 경험으로부터 생성되는 윤리적 분노가 해방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도 해방신학의 열정과 분개의 하느님을 행위로 구체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안에 머물지 않고 불의한 세상을 향하여 용감하게 나가는 목회적 행위는 열정과 분개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들으시는 하나님(Dios Oyente)

요셉의 이집트 진출 그리고 야곱의 온 가족이 기근을 피하여 이집트에 와서 살게 된 지고 400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요셉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차 이집트의 주류 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주변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이집트 왕국의 노예가 되어 있었으며 궂은일을 담당하는 하층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다. 이집트 지배층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성한 번식력과 생활력을 시기하여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을 탄압하고 억압하였다. 이집트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도 비참한 것이었다. 인간의 삶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날마다 그들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고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약속을 기억함과 동시에 그들의 딱한 처지를 돌아보시게 되었다.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들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개념으로부터 해방신학은 그의 신론을 전개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 밑바닥에서부터 들려오는 외침과 탄식과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하고 행동하는 하나님으로부터 해방신학은 시작되고 있다.

아파하는 하느님(Dios Dolorido)

성서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특히 성서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에게 호소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은 오래 동안의 이집트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이미 상실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에서 한숨을 쉬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들이 내는 한숨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호소하심으로서 하나님이 들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의 한숨소리가 하나님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귀를 기울이셨기 때문이다.(출 2:23-25. 성서는 그들이 너무 힘들어서 소리를 낸 것이지 직접 하나님에게 호소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낸 한숨 소리는 우리 모두가 고통의 삶의 현장에서 한 인간이 내는 고통의 울부짖음이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기의 경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다.’라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행간에 놓인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아무런 감각 없이 팔짱을 끼고 듣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렇게 듣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들으심은 우리의 고통을 함께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리며 들으시는 아파함이었다. 이다. 성서는 분명하게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출 2:24-25)라고 기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생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가슴 아픔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아니 자신의 백성이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의 처지를 동정하게 되었다. 동정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의미가 있다.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종살이 하는 처지를 동정하셨다. 성서의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의 고통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눈물과 그 분의 가슴앓이를 만날 수 있다.

해방신학의 하나님은 이런 가슴앓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가슴아파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자신들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생하는 것,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겪으시면서 아픔의 눈물을 흘리시는 신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시는 하나님, 눈물을 보이시는 하나님이다. 그 눈물은 하나님의 약함을 보여주는 눈물이 아니다. 오히려 눈물 속에서 무한하신 사랑의 강한 힘을 보여주는 눈물이다. 아파하는 하느님을 우리의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해 나갈 수 있을까?

열정의 하느님(Dios Apasionado), 분개하시는 하느님(Dios Indignado), 들으시는 하나님(Dios Oyente)과 아파하는 하느님(Dios Dolorido)은 오늘 목회 현장의 진정성을 가늠하게 해 주는 시금석이다.

미주

(미주 1) 예를 들면, 나는 안셀름의 속죄 만족설을 비롯한 배상설 등은 인간의 고통, 고난 희생에 대하여 별다른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무감각한 신의 존재를 전재하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들은 인간의 삶의 현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오직 신(神)중심의 신앙적 봉건주의를 대변하고 있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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