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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위대한 평등”

기사승인 2021.10.07  16: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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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도 지옥도 아닌 그저 스올 ⑴

▲ 조셉 케플러, 「스올행 급행열차: 우리 모두가 가는 곳」 (1888) ⓒWikipedia
이 논문의 저자인 메건 헤닝 교수는 데이턴대학에서 기독교 기원에 관한 분야에서 조교수로 가르치고 있다. 그녀는 예일신학대학에서 신학사를, 에모리대학에서 신약성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헤닝 교수는 Educating Early Christians through the Rhetoric of Hell(독일 모어 지벡 출판사) on the pedagogical function of Hell and Hell Hath No Fury: Gender, Disability and the Invention of Damned Bodies in Early Christianity(예일대학교 출판부)의 저자이다. 이 책은 젠더와 장애인에 관한 시각을 통해 지옥을 탐구한다. 그녀는 Jacob K. Javits 재단, 미국성서학회(SBL), 예일신학대학과 에모리대학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았고 연구에 따른 공로를 인정받아 상을 수여받았다. 이러한 결과물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과 CNN의 다큐멘터리 영상에 소개되었다.
이 논문은 헤닝 교수의 “No Heaven or Hell, Only Sheʾol”이며, 앞으로 2회에 걸쳐 게재된다. 명일한움교회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가 번역을 맡아 주셨다. - 편집자 주

스올과 그 유의어인 보르(בור, 구덩이), 사하트(שׁחת, 깊은 틈새), 아바돈(אבדון, 망각)은 죽음 앞에 선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의인이 장수함을 얻을 동안, 악인은 일찍 그곳으로 가게 된다. 제2성전기에 죽음과 스올에 대한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사후 처벌과 영원한 지옥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에녹1서에 나타난 죽은 자가 가는 네 장소는 그곳으로 향하는 첫 단계이다.

스올: 무덤, 죽음, 지하세계?

구약성경은 죽음 앞에 선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어원이 불분명한 스올(שׁאול)은 사람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장소를 지칭하는 용어로 가장 흔히 사용된다. 이는 땅속으로 내려간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지 히브리어 케베르(קבר, 무덤)를 고상하게 표현한 유의어일 뿐일까? 아니면 지하세계로 들어가게 됨과 같은 그 이상의 뭔가를 암시하는 것일까?

이런 모호함에 대한 좋은 예는 야곱이 요셉의 때 이른 죽음을 마주하며(그가 당시 상황을 이해한대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한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위로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울면서, 나의 아들이 있는 스올로 내려가겠다.”(창37:35, 새번역)

야곱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자적으로 지하세계에 내려가서 요셉을 만나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그가 무덤에 들어가게 될 때, 자기 아들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시적 표현일까?

또 다른 예는 야훼가 히스기야에게 곧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후, 히스기야가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지은(본문에는 서신으로 나타난) 시이다.

“나는 한창 나이에 스올의 문으로 들어가는가 싶었다. 남은 여생을 빼앗긴다는 생각도 들었다.”(사38:10, 새번역)

스올이 단순히 죽음의 고상한 표현일 수도 있지만, ‘문’에 대한 언급은 단순한 무덤 이상의 의미로 들리게 한다.

대체 용어들: 유사한 모호함

시적 본문들에서 때때로 스올과 평행한 의미로 사용된 두 개의 다른 단어들을 볼 때 똑같은 모호함이 나타나는데, 이는 무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보르(בור) - ‘구덩이’를 뜻하는 일반적인 히브리어 단어
● 사하트(שׁחת) - 역시 주요하게 ‘구덩이’, ‘깊은 틈새’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임

세 단어를 모두 사용하는 좋은 예가 시편 30편이다.

“주님, 스올에서 이 몸을 끌어올리셨고, 무덤으로 내려간 사람들 가운데서, 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시편30:3, 새번역)
“내가 죽어 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이 주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한 줌의 티끌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흙이 주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습니까?” (시편30:9, 새번역)

시편 기자가 야훼에게 감사하고 있는 점은 구덩이에서 꺼내주셨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 죽음에서 건져주심이다. 역시나 이 용어들은 무덤이나 지하세계에 대한 시적 표현인지 불분명하다.

이와 약간 다른 용어는 아바돈(אבדון, 망각)이다. “잃다”는 뜻의 א.ב.ד를 어원으로 하는 이 단어는 공통점이 가장 적은 유의어이다. 아바돈은 구약성경에 6번 나타나는데, 지혜 문학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아바돈은 네 단어 중 유일하게 문자적으로 물리적인 무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단어는 마베트(מות, 죽음), 케베르(קבר, 무덤), 스올과 유사하게 사용된다.

사후세계?

비록 이 단어들 자체가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명확한 장면을 제공해주진 않지만, 우리는 다른 본문들을 통해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하나 이상의 신앙이 존재했음을 알고 있다.

한편에서 보면, 전도서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사람에게 닥치는 운명이나 짐승에게 닥치는 운명이 같다. 같은 운명이 둘 다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가 죽듯이 다른 하나도 죽는다. 둘 다 숨을 쉬지 않고는 못 사니, 사람이라고 해서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모든 것이 헛되다. 둘 다 같은 곳으로 간다. 모두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 (전도서3:19-20, 새번역)

이후에 전도서 9장 5절은 “죽은 자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והמתים אינם יודעים מאומה)”라고 말하는데, 그들의 인격, 의식, 사후에 이어지는 세계로의 연결은 없다고 말한다.

“죽은 이들에게는 이미 사랑도 미움도 야망도 없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에도, 다시 끼여들 자리가 없다.” (전도서9:6, 새번역)
“네가 어떤 일을 하든지, 네 힘을 다해서 하여라. 네가 들어갈 무덤 속에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지혜도 없다.” (전도서9:10, 새번역)

반면에 많은 성경 본문들은 죽은 자가 무언가를 안다는 점을 수용한다. 그리고 몇몇 본문들은 오보트(אבת)와 이드오님(ידענים)이라 불리는 주술사들을 언급하는데, 이들은 죽은 자를 불러서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다. 사무엘상 28장을 예로 들면, 사울 왕 이야기는 그가 주술사에게 사무엘을 불러내도록 요구했고 질문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무엘은 그가 살아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겉옷을 입은 노인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나타난다(14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처음 한 말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למה הוגזתני להעלות אתי)”였다(15절).

사울이 다음날 블레셋과 있을 전쟁에서 승리할지 알고 싶다고 말하자, 사무엘은 사울의 죄악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을 마친다.

“당신은 내일 당신 자식들과 함께 내가 있는 이 곳으로 오게 될 것이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실 것이오.” (삼상28:19, 새번역)

분명히 사무엘은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사무엘이 서술한 사울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은 모두 죽어서 사무엘과 같은 ‘장소’에 있게 되며, 그들의 존재는 지하세계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이어지게 된다.

모든 이가 스올에 간다

사람이 죽어서 그저 무덤에 묻히던지, 어떤 종류의 지하세계에 가던지, 구약성경은 의인과 악인이 똑같이, 모든 이가 같은 운명에 놓여있다고 일관적으로 그린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극명한 예는 이스라엘의 적대자를 향한 예언자의 저주에서 나타난다. 이 예언들은 어떻게 ‘위대한’ 왕들과 정복자들이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서 스올에 가게 되는지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칼에 의해 단명하게 될 바벨론 왕에 대한 그의 분노를 표출한다.

“땅 밑의 스올이, 네가 오는 것을 반겨 맞으려고 들떠 있고, 죽어서 거기에 잠든 세상 모든 통치자의 망령을 깨우며,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그 왕들을 깨운다. 그 망령들이 너에게 한 마디씩 할 것이다. ‘너도 별 수 없이 우리처럼 무력해졌구나. 우리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구나.’ 너의 영화가 너의 거문고 소리와 함께 스올로 떨어졌으니, 구더기를 요로 깔고, 지렁이를 이불로 덮고 있구나!”(사14:9-11, 새번역)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사14:13, 새번역)
“그렇게 말하던 네가 스올로,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사14:15, 새번역)

에스겔은 이집트 파라오에게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는데(겔31:15-17; 32:21-28), 파라오는 거대한 나무로 비유되며, 그의 그늘 아래에서 다른 이들이 살아간다. 야훼가 그를 꺽고 깊은 지하세계로 보냄으로 그의 오만함을 치유한다.

“내가 그 나무를 스올로 내려 보낼 때에는,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나무를 그리로 보낼 것이니, 그 나무가 스올로 떨어지는 큰소리를 듣고서, 뭇 민족이 벌벌 떨 것이다.”(겔31:16, 새번역)
“에덴의 나무들 가운데서 어떤 나무가 너처럼 화려하고 컸더냐? 그러나 너도 이제는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스올로 끌려가서,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섞여,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과 함께 누울 것이다. 바로와 그의 백성 모두가 이렇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겔31:18, 새번역)

이 본문들의 메시지는 모든 이가 스올에 간다는 것이다. 스올에서 야곱은 요셉을, 사울은 사무엘을 만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의 악한 왕들과 이집트 왕들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강한 자와 온순한 자, 의인과 악인 모두 같은 길에 놓인다. 죽음은 위대한 평등이다.

메건 헤닝 교수/이성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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