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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찾고 있는가

기사승인 2020.10.12  17: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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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시 5:1-3; 갈 2:15-21; 눅 15:8-10)

▲ 드라마크라는 찾는 여인 ⓒGetty Image

주님께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주님의 한없는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가끔 저를 아는 분들께 저 자신을 소개할 때 “학승”이라는 말을 쓰곤 합니다. 목사가 되기 위한 필요 과정을 이미 끝낸지 오래 됐지만, 어쩌다가 신학에 매료되어 학위를 위한 공부를 위해 이곳 버클리까지 오게 됐고, 지금은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강의하는 게 고되기도 하지만, 신학의 기초를 가르치는 가운데 반복해서 예전에 공부하던 것들을 복습하게 되고, 그 때는 몰랐던 것을 깨닫곤 하는 게 제게는 큰 즐거움입니다. 학생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큰 배움이 있습니다.

엊그제는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15년 전 처음 미국에 와서 처음 듣던 수업의 강의노트를 발견하고 한참을 상념에 젖었습니다. 장로교 출신의 한국 신학생이 미국에 처음 와서 가톨릭의 한 분파인 프란시스칸 신부 교수에게 강의를 듣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 예기치 못한 일입니까? 나중엔 예수회 신부에게도, 도미니칸 신부에게도 수업 듣는 게 보통이었지만 처음에는 매우 생소했습니다.

프란시스칸 신부셨던 그 분의 수업은 참 재미있는 수업이었습니다. 보통 10명 이하, 많아 봐야 15명 정도의 강의가 대부분인데 이 수업은 40명을 훌쩍 넘는 인기가 좋은 수업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교수의 눈에 들어야 하고, 나중에 박사학위 진학을 위한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 압박감이 있는데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제 막 한국에서 왔는데 영어는 잘 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열심을 다해 수업을 준비해갔고, 학기말에 이르러 구두로 기말시험을 보는데 다행하게도 좋은 성적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제 학위논문 부심이 되셨고, 박사학위 진학을 위한 추천서를 써 주셨습니다. 나중에 그분과의 사귐이 깊어진 후 알게 된 사실은 지금의 프란시스코 교황의 전임 교황이었던 베네딕트 교황의 제자였고, 전미 가톨릭 신학대학 회장을 지냈던 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본인에게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닌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겸손하셨고, 검소하셨고, 유쾌한 분이었습니다. 제자의 결혼 기념일을 챙겨 주시고, 제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도 챙겨 주셨던 모습. 학교 식당에서 학생들에게 커피를 친히 따라 주시던 그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80 중반을 넘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책을 쓰시던 성실함은 오늘의 저를 채찍질합니다.

공부하는 목사로서 저는 책을 통해 수 없는 신학자들과 대화합니다. 다른 목사들보다 더욱 많이 공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을 만들어온 그분들과 대화함으로써 하나님을 깊이 이해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기 위한 것이지요. 때론 많이 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를 알더라도 깊이 아는 게 중요하고, 그 깨달음대로 사는 게 중요하겠지요.

얼마 전 감리교 목사님 한 분이 SNS에 쓰신 글이 있었습니다. 성 프란시스코를 좋아하는 분이신데, 한 번은 개신교 신학자 한 분이 프란시스코에 대해 강의하는 모임에 참석했었다는 것입니다. 강의의 내용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뭔가 현학적이고 겉도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들이 타고 온 자동차를 몰고 집에 갑니다.

얼마 후 또 다른 프란시스코 강의에 참석했는데 이번에는 간단하면서도 뭔가 울림이 있는 그런 강의였다는 것입니다. 강의의 말미에 그 강사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프란시스코에 대해서 배우셨는데,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그러자, 참석한 사람들이 “예,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밭으로 일터로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 모임들을 비교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우리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성 프란시스코는 우리에게 청빈과 노동, 겸손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의 말장난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는 게 중요할 것입니다. 그가 한 일들이 훌륭하지만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 하는 단절이 아니라 흉내라도 내 보는 데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은 정말 단순합니다. 누가 보더라도 누가 읽더라도 발견하게 되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이른바 죄인들이라는 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식탁을 같이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즐거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권세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이들 죄인들과 똑같은 수준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고 여깁니다. 입을 열면 하나님 나라 운운하고 대단히 거룩한 척하지만 알고 보니 별거 아니구나,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그렇고 그런 놈이로구나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수군거립니다. “그러면 그렇지. 별 볼일 없는 놈이군. 저런 형편없는 놈들과 함께 자리를 하는 거 보니 별거 아니구만. 사람은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가를 보면 안다니까. 갈릴리 촌놈이 그렇지뭐. 지가 뭔데 누굴 가르치고 누굴 훈계하냐.”

이런 수군거림을 듣고 계시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에는 세 가지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온 목자, 다른 하나는 멀리 떠났다가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 그리고 다른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드라크마 이야기입니다.

이 드라크마 잃은 여인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자가 드라크마 열 닢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등불까지 켜서 집 안 구석구석을 쓸면서 샅샅이 뒤적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순간, 여인은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친했던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자기의 기쁨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드라크마”는 “데나리온”처럼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 단위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율법학자를 비롯한 예루살렘 권세자들의 눈에는 우선 “뭐야 별거 아니잖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냥 한 시골 구석의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살림살이에 얽힌 이야기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을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귀 있는 사람은 그 메시지를 듣습니다. 이 드라크마 열 닢은 단지 열흘 동안의 품삯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결혼한 여인이 비싼 보석은 할 수 없는 형편에서 그 열 개의 동전을 묶어 자신의 결혼 생활을 지켜 달라는 뜻을 담은 장신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남이 보기에는 별 볼일 없고 초라해 보이나, 당사자에게는 뜻이 매우 깊은 것이지요. 그 열 개의 드라크마를 잘 간수하고 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그녀에게는 힘들고 가난한 생활을 이겨내는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는 보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열 개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그저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 게 됩니다. 열 개로 꽉 채워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 그만 제대로 그 꼴을 갖추지 못하게 된 것이 됩니다. 그녀에게 이 한 드라크마가 사라진 것은 그 자신의 결혼생활에 무슨 어려움이 생길지 모른다는 어두운 징조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열 개에서 하나가 빠진 아홉 개 짜리 드라크마 묶음은 본래 이 여인이 그 동전 묶음 장신구에 둔 뜻을 살려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한 드라크마는 나머지 아홉 개에 비하면 “단지 하나”라는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 하나가 사라져 버린 드라크마 묶음은 이제 온전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니 그 여인이 이 가운데 하나를 잃었으니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샅샅이 뒤지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이 여인이 그 잃은 한 드라크마를 포기하고 다른 드라크마로 그 빈자리를 채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그 하나의 드라크마를 찾아내는데 여인이 온 힘을 기울였고, 그것을 마침내 찾아내니 그토록 뛸 듯이 기뻐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그 하나로서 고유한 의미와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아무리 새 동전이나, 드라크마가 아니라 그에 비할 수 없는 일년의 품삯인 고가의 달란트로 그 자리를 끼워 놓는다 해도 나머지 아홉 개가 다시 온전한 그녀의 장신구로서의 자리를 회복할 수 없는 것을 뜻합니다. 그 하나의 동전은 나머지 아홉 개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고, 한 달란트에 비하여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 하나에 쏟아 부었던 그녀의 마음과 정성을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목숨을 잃으면 또 하나를 낳아 열을 채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드라크마의 주인인 이 여인에게 그 하나 하나의 드라크마는 다 나름의 귀중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가 특별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하나가 그저 그 자리에 있어야 나머지 아홉의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잃어버린 드라크마 한 닢이 본래부터 그런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 가치는 바로 드라크마의 주인인 그 여인이 그 동전 한 닢에 부여한 것입니다. 그 동전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주인이 그 동전을 가치 있게 여긴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뭔가 탁월해서, 내가 뭔가 다른 사람보다 훌륭해서 가치 있습니까? 아니 거꾸로 내가 너무나 평범해서, 내가 별거 아니라서 다른 사람이 나를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의 가치는 별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의 가치는 나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라는 존재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모든 것을 거신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이로써 나의 삶이 그토록 소중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존재 전체를 걸 만한 대상으로 나를 대하셨기에 나의 가치는 빛나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걸고 나를 향해 생명과 사랑의 능력을 쏟아 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열 드라크마 꾸러미의 하나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이들 이른바 죄인들과 어울렸기에 그 예수의 가치를 멸시하지만, 그들은 이들 죄인들이라고 업신여김 받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그들과 어울려 주셨기에 그들의 가치가 그만큼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열 드라크마 묶음과 같이, 그 하나 하나에 담은 하나님의 소망과 뜻이 이루어지는 자리에 우리가 존재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잘 아십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 한 닢을 찾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 시간에도 찾으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홉 개의 드라크마를 완성하기에 주님은 등불을 켜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아내십니다. 그만큼 우리는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이 단순하고도 깊은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휘감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함에 우리의 영혼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이 한주간도 하나님의 은혜에 충만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minics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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